84화
“……아아.”
그제야 기억이 나는지 엄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으니까.”
“……뭐가?”
“적어도 사랑은 했다고, 그때만큼은. 어쩌면……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걸 수도 있고.”
머릿속에서 이명이 울리듯 윙윙 소리가 났다. 벌집을 쑤셔놓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러면서 오빠가 일곱 살 때부터 혹시 모를 이혼에 대비해 소송 자료를 모았다고? 무슨 사고방식이 그래?
“이상하긴 하지?”
자신이 생각해봐도 앞뒤가 안 맞는다고 느꼈는지 엄마가 힘없이 웃었다.
“그럼 지금은?”
이설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마에게 물었다.
“지금도 아빠를 사랑하는 거야?”
“……글쎄, 잘 모르겠네.”
엄마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랑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건가 싶기도 하고. 몇 년을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없어도 살겠더라고.”
엄마는 이설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헛헛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감정선 깊은 곳을 건드렸는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었다.
“누가 그러더라. 사랑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줄 아나 본데, 그거 다 착각이라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다들 그렇게 믿으면서 사는 거래.”
읊조리듯 조용히 흘러나오는 말엔 체념 반, 자조 반이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머리로는 분명 이게 아니다 싶은데, 마음은 또 그렇지 않더라고. 제멋대로 살아 움직였어. 마치 전혀 동떨어진 존재처럼. 이설이 네가 들으면 한심하다고 비난할 테지만, 아빠가 잘할 땐 또 굉장히 잘했잖아. 네 비싼 기숙학원 등록비나 의대 등록금도 군말 없이 내줬고, 오빠한테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그거 전부 내준 사람도 아빠가 맞거든. 무엇보다 아빠 인물이면 주변에 좋다는 여자들도 많았을 텐데 바람 같은 것도 전혀 피우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까…….”
“엄마!”
이설은 듣던 도중에 너무 화가 나서 엄마의 말을 싹둑 잘랐다.
“이혼 결심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아빠한테 미련이 남은 거야? 좋았던 점만 줄줄이 쏟아내게?”
“……그런 게 아니라.”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래. 어떻게 오빠랑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 얘길 꺼낼 수가 있어? 내가 이상한 거야? 아빠가 뭘 얼마나 잘했는데?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윽박지르다가 수틀리면 손찌검할 거 다 하면서, 때 되니까 먹을 거 던져주고 잘 곳 제공해주면 그게 잘하는 거야?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이나 가축한테도 그렇게 비인간적으로는 안 해. 대체 엄마한테, 그리고 오빠나 나한테 아빠가 뭘 얼마나 잘했다고 이래? 설마 내가 선택적 기억상실인 거야? 아빠가 잘해준 것만 쏙쏙 까먹는 재주가 있는 거냐고.”
이설은 미간을 와락 구긴 채 엄마를 향해 다다다 쏘아붙였다. 이 지경이면 정말 아빠한테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한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의구심이 합리적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기분 내키는 상황에서만 잘하고, 그 잘난 이목구비를 가지고도 주변 여자들이랑 바람을 안 피웠으니 장한 남편, 장한 부모상이라도 주라는 건가?
지금 그녀의 엄마가 말하고 있는 아빠의 좋은 점들은, 부모라면 그리고 남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었다. 자식과 부인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는 있어도 잘한 일이라며 으스댈 일은 절대 아니었다.
이설은 눈물이 핑 돌면서 뼛속까지 한숨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당하고도 여태 정신을 못 차렸나 싶어서.
엄만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알아, 엄마도.”
꽉 잠긴 목소리로 엄마가 겨우 말을 이었다.
“엄마가 뭘 아는데?”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물었다. 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설도 안다. 평소엔 냉정하기 그지없는 자신이 엄마의 입에서 무심코라도 아빠에 대한 칭찬이 흘러나오면 발작 버튼이 눌리기라도 듯 제대로 엉망진창이 돼버린다는 걸.
“……기분 좋을 때 선심 쓰듯 잘하는 건 네 말처럼 정신병자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엄마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근데?”
“아는데도…… 아빠가 잘해주면 좋더라고. 열 번 성질내다가 한 번만 잘해줘도 막대사탕 받은 어린애처럼 속이 대번에 녹아내리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빠 없이 살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설이 너를 번듯하게 키워내야겠다는 욕심이 제일 컸던 것 같아.”
“……뭐?”
“재수까지 해서 들어간 의대인데 이혼 문제로 집안이 시끄러우면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설이 네가 지금까지 마음고생 한 게 얼만데. 적어도 너만큼은 훌훌 털고 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어. 그래서 조금만 더 버티자던 게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린 거야. 결국……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채로.”
머릿속이 또다시 윙윙거렸다. 벌집이 여러 군데서 마구잡이로 터진 듯했다.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 되겠냐만.”
엄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이설아. 너랑 형설이한테 상처만 주고, 그리고…… 여러모로 현명하지 못했던 엄마여서.”
참회처럼 이어지는 엄마의 말에 이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내내 커튼만 주시하고 있던 형설이 울고 있는 이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난 형설이 이설에게로 다가왔다. 연두색 수건을 양손에 꼭 쥐고서.
이설이…… 왜 울어?
형설이 알아들을 수도 없이 죄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아마도 달래주려는 의도였겠지. 울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오빤 누구보다 심성이 착했고, 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울음이 터진 여동생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므로.
하지만 이설은 멈추지 못했다. 한번 울음이 터지니 통제 불가였다. 그런 이설의 앞에서 형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수건을 쥐었다 폈다, 팔을 내밀었다 거두어들였다를 수차례 반복했다. 입으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이 뭉개진 발음으로 끈기 있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9장. 데저트 플라워
“혈흔이 군데군데 묻어 있기는 한데, 아쉽게도 전부 피해자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지문 역시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고요. 살해할 당시 범인이 장갑을 끼고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브리핑을 위해 차준섭 형사가 입을 열었다.
“사인은 뭐래.”
김모동 팀장이 물었다.
“둔기에 의한 후두부 1차 가해 후, 쓰러진 피해자를 예기로 17회 찌른 것이 직접적인 사인입니다. 피해자는 손목 부위에 작은 타박상이 발견된 것 외에 딱히 이렇다 할 방어흔이 없는 것으로 보아, 1차 후두부 공격 때 잠시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망 추정시간은?”
“02시 30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잠자코 차준섭 형사의 말을 듣고 있던 김모동 팀장이 고개를 돌려 인서를 바라보았다.
“CCTV 꼼꼼히 확인해 봤지? 뭐 좀 나온 거 있어?”
“아쉽게도 쓸 만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
“한번 보시겠어요?”
인서는 김모동 팀장이 볼 수 있도록 컴퓨터 화면을 켰다. 그런 다음 살해용의자로 보이는 남자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CCTV를 재생시켰다.
“범행 장면이 보이기는 하는데, 어두운 데다 의복마저 검은색 일색이라 구체적인 인상착의는 식별이 어렵습니다. 범행시간 자체도 얼마 걸리지 않은 걸 보면 사전 계획하에 침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보시겠지만, 도주 역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건을 계획할 때 인근 지리적 상황까지 꼼꼼히 파악한 게 틀림없습니다.”
김모동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어. 들어온 시간이 02시 20분이고 잠깐의 대치 후에 돌아서는 피해자의 후두부를 손에 들고 있는 장도리로 2회 가격, 이후 쓰러진 피해자를 깔고 올라타서 품에 감추고 있던 예기를 이용해 심장 부위만을 집중적으로 공격.”
말을 하다말고 김모동 팀장이 한숨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아, 진짜 저거 제정신인가? 대체 몇 번을 휘두르는 거야. 미친 새끼가 사람을 아주 난도질해버리네. 이게 전부 2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
“네. 심지어 범행 직후에도 아주 차분합니다.”
“아무리 봐도 전문가 냄새가 나는데.”
손에 턱을 괴고 있던 김모동 팀장이 다음 장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저건 또 뭐 하는 거야.”
CCTV 속에서 피해자를 살해한 남자가 부지런히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리저리 서랍을 여닫고 방 안을 뒤지는 것이 누가 봐도 목적물이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더니 한참을 뒤진 후에 목적물로 보이는 것을 다급히 챙겨 주머니에 넣은 후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남자는 사무실을 나가기 전 강도 목적으로 위장할 심산이었던지 바닥 곳곳에 물건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새끼들. 꼭 덜떨어진 것들이 저런 짓을 해요. 우리가 진짜 물색흔과 거짓 물색흔도 구분 못 할까 봐.”
황호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기왕에 조작할 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돈다발들이라도 좀 살뜰히 챙겨가지.”
박성진 형사가 황호범을 거들었다.
“자, 다들 모여 봐.”
CCTV를 멈추고 김모동 팀장이 팀원들을 불렀다.
“범죄 사건은 피해자의 신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인 거 잘 알고 있지? 돈이 많은 재력가인지,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유난히 많은 보험을 들었다든지, 여자관계가 지저분하게 얽히고설켰는지, 아니면 주변에 원한 관계가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야. 이번 피해자는 밝혀진 자산만 무려 9천억에 가까운 거부야. 고작 푼돈이나 노린 범죄는 아닐 거라고. 추정컨대, 용의자가 챙겨 가지고 나온 물건이 결정적인 단서일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