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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83화 (83/130)

83화

「정형설! 너 이 새끼, 미쳤어? 왜 네 맘대로 놀이방을 나가! 그러다가 유주랑 이설이까지 길 잃어버리면 네가 다 책임질 거야? 어?」

할아버지 댁 문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손찌검이 시작됐다. 철썩! 철썩! 아빤 오빠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한 번도 아니고 연이어 네 번을.

좁고 마른 등이 자비 없는 손찌검 아래서 이리저리 휘청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섰던 이설은 공포로 심장이 졸아붙었고, 생전 눈앞에서 누가 폭력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던 유주는 작은아빠의 다리에 매달려 울먹울먹했다.

「그만해, 형. 찾았으면 됐잖아.」

작은아빠의 만류에도 아빤 손찌검을 멈추지 않았다. 오빤 새파랗게 질린 와중에도 울지 않았다. 그저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애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래요!」

소란을 듣고 집 안에서 달려 나온 엄마가 오빠를 품에 끌어안고 나서야 아빤 겨우 손찌검을 멈췄다.

불쌍한 오빤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소리를 지르며 반항을 한다거나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대신, 머리카락이 축축해지도록 땀에 젖은 상태로 엄마의 품에서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숨소리 하나 제대로 못 내고.

「그러게 왜 마음대로 애를 데려가서는.」

팔짱을 끼고서 오빠가 두들겨 맞는 모습을 냉한 얼굴로 지켜보고 섰던 작은엄마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필 이설의 바로 옆에 서서.

“……아빠가 심하긴 했지.”

순식간에 되살아난 기억은 참으로 잔인했다. 좁은 등판 전체에 손자국이 시뻘겋게 남을 정도로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공포에 질린 오빤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엄마 품에 매달렸다. 놀란 엄마 역시 입술만 달싹였을 뿐 오빠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은엄만 오빠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싸한 표정으로 유주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댁 안으로 들어갔다.

이설은 이따금씩 그때의 장면을 떠올린다. 맞은 오빠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겠지만, 그 광경을 코앞에서 모조리 목격한 이설에게도 그건 악몽 같은 사건이었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았다. 가끔은 꿈속에서도 나왔다. 죽일 듯이 쫓아와서 불쌍한 오빠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아빠의 모습이.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어린 이설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훌쩍였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서.

“미친 새끼. 겨우 일곱 살이었잖아. 그것도 중증 장애가 있는. 아빠가 돼 가지고 그게 할 짓이냐고.”

엄마가 혼잣말처럼 곰삭은 분노를 쏟아냈다. 생전 사용할 줄 모르던 욕설까지 섞어가면서. 상처는…… 이설과 형설에게만 남은 건 아닌 듯했다. 엄마에게도 아빠의 폭력성은 고스란히 상처가 된 모양이다.

“잊은 적이 없어. 무자비하게 네 오빠를 후려치던 아빠의 모습과 땀에 젖은 채 새하얗게 질려있던 형설이의 표정을.”

“…….”

“잊으면 엄마도 아닌 거지.”

오빠의 등판에 시뻘겋게 남아 있던 아빠의 손찌검 자국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사라졌으나, 엄마의 가슴 속에 남은 상처 자국은 점점 더 진해졌었나 보다. 25년이란 시간이 묵묵히 흐른 보람도 없이.

“문득 죽고 싶어졌어.”

지워지지 않는 상흔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과거를 천천히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엄마가 중얼거렸다.

“한 알 두 알 모아놓은 수면제를 한 움큼 손에 들고 있다가 진지하게 고민했어. 나만 죽으면 안 되는데. 우리 형설이는 어떡하라고.”

뭐?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엄마?

“새벽 한 시에 조용히 방문을 열고 형설이 방으로 들어갔어. 자고 있더라? 아기처럼 새근새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했어. 엄만 이제 한계인데 어쩌지, 형설아?”

그렇게 말하는 엄만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정말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어쩌면 엄만 그 밤에 홀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악몽을 꾸고 난 이설이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던 것처럼.

돌아보면 그녀 역시 엄마나 오빠에겐 방관자에 불과했다. 행여나 시커먼 진창에 발이 빠질까 무서워 경계선 근처에서만 몸을 사리느라 바빴던.

사실은 그래서 백인서에게 더 야멸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자신이 들어가기 싫은 진창 속으로 애꿎은 백인서마저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내가 형설이를 죽일 수 있지? 안 아프고 편안한 방법은 있을까. 그게 엄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인데. 우리 형설이…… 아프게 죽으면 안 되잖아. 행복했던 삶도 아닌데.”

엄마가 넋이 나간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오빤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거실 커튼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두색 수건을 생명줄처럼 두 손에 꼭 쥔 채. 가끔씩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침을 뱉기도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형설이 목에 손을 대고 있는 거야. 여차하면 조를 기세로. 때마침 오빠가 몸을 뒤척이지 않았으면 정말 졸랐을지도 몰라. 벌벌 떨리는 손을 화들짝 뗐어. 내가 해놓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엄만 말을 하면서도 이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냥 허공만 바라보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탓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네모난 공간 속 어딘가가 엄마의 시선이 닿는 전부였다.

“그때 결심했어. 이젠 정말 한계구나. 그냥 이대로 있다간 입에 담지 못할 일을 저지르겠구나. 미친 생각이었던 거지. 내가 뭐라고 자식 목숨을 멋대로 거둬가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누구도 그럴 권리를 준 사람은 없었는데.”

말을 잠깐 끊고 엄마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는 엄만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에 둔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다는 듯.

“잘 생각했어, 엄마. 내가 도와줄게.”

당연히 그러라고 할 줄 알았다. 네 도움이 필요해서 털어놓은 거라고. 그런데 엄만 전혀 의외의 말을 했다.

“아니야. 엄마 혼자 해도 돼.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 없어.”

좋은 일도 아닌데. 엄마가 말끝으로 작게 덧붙였다.

“이런 일을 엄마 혼자 어떻게 해. 아빠가 쉽게 동의해줄 리도 없을 텐데.”

“……그렇겠지.”

“그렇겠지 정도가 아니라 불을 보듯 뻔한 수순이야. 엄마가 이혼 얘길 꺼내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할 사람이 바로 아빠라고.”

말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의 아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혼을 막을 사람이었다. 그게 불법이든 적법이든 상관없이.

첫 도전에서 보기 좋게 낙선한 뒤 몇 년 동안 절치부심한 후에야, 꿈에 그리던 민선시장이 된 지 고작 3년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뛴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빠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다. 더불어 주변 지지 세력도 비례해서 늘어갔다. 한껏 고무된 아빤 재선이 아니라 3선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도지사까지도.

그런 마당에 다른 것도 아니라 고작 이혼 소송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이 얼룩지는 걸 용납한다고?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아빠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의 이혼 결정을 철회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게 뻔했다.

분명 갖은 회유와 협박이 난무할 테지. 아빠에게 엄만 인격적으로 동등한 존재라기보다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자, 자신보다 한참 아래의 하수인에 불과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얼마나 엄마와 오빠가 상처받을지 생각하니 이설은 벌써부터 마음이 아팠다.

“나도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아무렴 준비도 없이 그냥 막 이혼 얘길 꺼낼까.”

엄만 그사이 진정이 된 듯 목소리가 차분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의 불안감이 사라진 엄만 평소보다 훨씬 더 담대해 보였다. 마치 아빠와의 이혼 소송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엄마가 뭘 생각해 놨는데?”

이설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물었다. 엄만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자그마한 중소기업 디자인실에서 2년인가 근무한 게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퇴직할 무렵엔 오빠를 임신하는 바람에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다지?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 평생을 아빠의 그늘 밑에서만 살아온 엄마가 뭘 어떻게 준비해놓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혼 소송에 도움이 될 만한 증거들은 전부 모아놨어. 승소율 높은 변호사도 이미 알아놨고.”

“변호사는 그렇다 치는데…… 증거라니?”

“말했잖아. 형설이가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아빠한테 정이 떨어졌다고. 그때부터 차근차근 모아놨어. 형설이 등에 난 손찌검 자국 사진부터 그날의 일을 세세하게 기록한 일기장, 병원 기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합치면 꽤 될 거야. 20년이 넘게 모아놓은 거니까.”

이설은 뭔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도 아니고 무려 20년 동안이나 증거를 모으고 있었다고? 그녀에겐 말 한마디 없이? 입으로는 이혼할 일은 없을 거라고 대뇌이면서? 어쩜 이렇게 감쪽같이 그녀를 속여온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나한텐 왜 아빠를 사랑한다고 했어?”

조금은 얼이 나가서 물었다. 엄마가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기억 안 나? 설 명절 끝나고 나한테 그랬잖아. 할아버지 댁에서.”

엄만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오빠가 머리로 할아버지 가슴 치받던 날 말이야. 그때 내가 물었잖아. 아빠 사랑하냐고.”

작은집 식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할아버지 댁은 깊은 바닷물 속 같았다. 너무 깊어서 빛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무섭고 어두컴컴한 바닷속. 그날의 할아버지 댁 분위기가 딱 그랬다.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하고 예쁜 열대어는 한 마리도 없이 괴상하고 징그럽게 생긴 괴생명체들만 우글거리는 바닷속 한 귀퉁이에서 엄만 죽은 듯 누워 있는 오빠 옆에 비슷한 모양새로 누워 있었다.

이설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런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를 사랑하냐고. 돌아온 건 놀랍게도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첫사랑이라는 부연설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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