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단지 반복되는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비루한 마주침이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관심의 산물이었음을 알게 된 건 그에게 마음을 열고 나서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설은 절망적이었던 첫 번째 수능 이후로 더는 거스러미를 뜯지 않았다. 덕분에 입술 여기저기로 볼썽사납게 피딱지가 앉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입술 가운데 볼록한 부분을 건드리게 되었다. 백인서가 특히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는 키스라도 할라치면 예외 없이 그 부분을 중심적으로 핥고 빨아들였다. 꼭 음핵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미친 드립을 늘어놓으면서.
백인서는 심지어 이설의 입술 가운데 부분을 혀로 핥아 올릴 땐, 잊지 않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동그랗게 솟아오른 음핵을 함께 문질러댔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찌걱찌걱 소리까지 내면서. 생각해보니 음란해도 그렇게 음란할 수가 없다.
넌 왜 그렇게 나한테 절실한 건데? 내가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너한테 못되게 굴어도 좋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니? 그렇게 참을성이 많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왜냐하면, 너랑은 달리 난 마음이 무한정 넓지 않거든. 좀 이기적이야.
냉소적으로 중얼거려보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입술 안쪽에서 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제 혀에 맞대고 비벼질 또 다른 혀를 갈망하면서.
그녀의 허락 한마디에 언제든 백인서는 키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정수리 위에서 느껴지던 그의 숨결은 뜨겁다 못해 홧홧했으니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어야 했나? 너도 원하고 있었잖아. 한 번쯤 져주지 그랬어. 그런다고 누가 비웃을 것도 아닌데. 그럼 백인서는 당장에라도 입술을 맞물리고 뜨거운 혀를 집어넣었을걸?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랬으면…… 뭉근히 혀가 빨리고, 달착지근한 타액이 서로의 입안을 끝도 없이 넘나들었을 텐데. ㅤㅊㅠㅂ, 츄릅, 할짝, 쯔으읍. 좁은 현관이 가득 메워지도록 흘러나오는 질척한 소리는 덤이었을 테고.
그러는 사이사이 백인서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슴과 허리를 집요하게 더듬어댔겠지? 무섭게 발기한 성기로는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아래를 노골적으로 쿡쿡 찔러댔을 거고.
“……하아.”
대담하게 입술을 더듬던 손가락이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와 봉긋한 가슴 위에서 멈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백인서를 떠올렸다고 어느새 빳빳이 일어선 유두가 브래지어를 잔뜩 밀어내고 있었다.
둥글게 문질러보았다. 백인서가 그녀에게 그랬듯.
손가락 끝이 얇은 원피스 천과 브래지어 아래 숨어 있는 유두를 부드럽게 누르며 지나가자 입술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호흡이 단박에 흐트러졌다. 잠시간 그러다 손을 더 아래로 내렸다. 가지런히 맞붙어 있는 다리 사이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얌전하게 맞붙어 있는 다리를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 앞에선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조신을 가장하고 있지만, 백인서와 있을 땐 잘만 벌어지던 다리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새하얀 허벅지를 벌리면, 기다렸다는 듯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위로 혀가 들어오고, 손가락이 들어오고, 종내에는 막대기처럼 굵직한 성기가 들어왔었다. 온갖 난잡스러운 소리와 함께.
그러면 이설은 처음의 민망함이나, 엄청난 부피감 때문에 혹시 아래가 찢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자지러지게 ‘앙앙’대며 백인서에게 매달렸더랬다. 연이어 절정에 오르고 난 후의 침대 시트는 흡사 물난리를 방불케 했다. 흥분에 못 이긴 그녀가 이렇게 저렇게 싸놓은 흔적들로.
“……으으응, 흣, ……하아.”
어둠과 적막이 여전히 좁은 오피스텔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동안 이설은 홀로 몸이 달아올랐다. 백인서와 나눈 지극히도 외설스럽고 달콤했던 기억들로 인해.
달뜬 호흡을 집어삼키며 허벅지를 조금 벌렸다. 원피스 자락을 걷어낸 다음 팬티 위로 손을 가져갔다. 축축했다. 손가락을 꾸물꾸물 움직여 질구가 있을 부위를 찾았다. 일부러 내려다보지 않아도 흘러나온 질액으로 축축해진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껏 달아오른 마음 사이로 설핏 조소가 비어져 나왔다. 이렇게 비참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달아오르는 아랫도리라니. 정말 눈 뜨고는 볼 수 없이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이설은 뾰족하게 반문했다. 꼬일 대로 꼬여 비웃음을 내비치는 제 속의 멍든 심연을 향해.
한계에 다다른 사람은 백인서만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가 그리웠다. 잠깐의 추억 되새김질만으로도 아래가 흠뻑 젖어버릴 정도로 심각한 중증이었다.
속옷을 한쪽으로 밀어젖히고 중지를 밀어 넣었다. 온통 미끌미끌한 아래가 만져졌다. 질구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쓸어올렸다. 쏟아져나온 질액 때문에 손가락이 수월하게 미끄러졌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음핵에 검지 끝이 닿았을 땐 허리 아래로 지르르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힘을 꾹 주어 백인서가 하듯 문질렀다. 위로 아래로, 그러다간 끊어치듯 빠르게.
“……하으응.”
밭은 신음이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처음 해보는 자위는 믿을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는 행동을 백인서는 매일 한다는 걸까? 그녀를 떠올리면서?
감은 눈 사이로 자신의 성기를 거머쥔 채 빠르게 흔들어대는 백인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연달아 오르가즘에 이르고 난 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그녀의 앞에서 백인서는 종종 수음을 했었으므로.
그럴 때의 그는 수차례의 섹스로 귀두가 벌겋게 드러난 것은 물론이고 사정의 결과로 온통 정액투성이가 된 중심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문질러댔었다. 그녀가 흥건해진 다리 사이를 드러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면 더 흥분된다는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으면서.
이설은 점점 가빠지는 호흡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아래쪽 질구로 뻗었다. 기대감을 품어 안고 연신 오물대는 구멍이 퍽 난잡하고 야했다.
이대로 힘을 주어 밀어 넣으면 백인서가 주는 감각과 비슷할까? 그렇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걸 어떻게?
이설은 머뭇머뭇 좁은 구멍 주위을 비벼댔다. 찌걱찌걱. 계속되는 마찰에 질구가 움찔댐과 동시에 척추를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확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감히 얇디얇은 제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을 생각은 못 했다. 굵기가 열 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백인서의 성기는 잘만 받아들인 주제에.
그러다 문득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백인서라면 여기는 이렇게 만져줄 테고, 여기 이 부분엔 혀를 끝까지 집어넣어서 쿡쿡 찔러줄 테지? 때로는 낯 뜨거운 말까지 속삭여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서툰 손짓으로 스스로의 몸을 만져보았지만 백인서가 주는 아찔한 달콤함에는 근사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아…….”
이설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착실하게 달아오른 아래를 만족시킬 만한 방법을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백인서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부질없는 가정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이 돌아온 건 갑작스럽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때문이었다. 이설은 황급히 손가락을 속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미끄덩한 점액질이 보란 듯 함께 딸려 나왔다.
신기한 것을 대하듯 빤히 내려다보았다. 투명하면서 끈적한 것이 두 번째 손가락 끝마디에 잔뜩 묻어 있었다. 마치 백인서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위까지 하는 상황을 빗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정이설. 지금 뭐한 거야?
이설은 불현듯 수치심을 느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더러운 것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세정제까지 이용해 손을 박박 닦았다.
널 지워버리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왜 진작 몰랐지? 하다 하다 자위라는 것까지 하게 되는 날이 올 줄 바보처럼 왜 몰랐던 거지? 응?
하지만 이설은 알고 있다. 그녀가 스스로의 몸을 만지면서 저릿한 흥분감을 느낀 이유는 입술이나 음핵, 유두 따위를 마찰해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면서 백인서를 떠올렸기 때문이라는 걸.
찬물로 손 전체가 얼얼해질 정도로 닦고 또 닦고 나서야 휴대폰이 울렸다는 걸 기억해냈다. 서둘러 거실로 나가 휴대폰을 집었다. 부재중 전화의 주인공은 엄마였다.
이설은 얼른 전화를 걸었다.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곧바로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우리 다 왔다고.」
“……그래?”
이설은 최대한 차분히 대꾸했다.
「저기…… 주차장에 차를 대면서 보니까 거실 불이 꺼져 있던데, 혹시 아직 집에 안 왔어?」
“아, 아니야. 지금 집에 있는데 불 켜는 걸 그만 깜박했어.”
이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금세 오피스텔 내부가 환해졌다.
「……정말이구나. 난 또 불이 꺼져 있어서 아직 집에 안 온 줄 알았지.」
전화선 너머로 엄마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올라와도 돼.”
이설은 전화를 끊으려다 덧붙였다.
“오빠도…… 함께 왔지?”
당연한 소릴 묻는다. 엄마가 언제 오빠를 혼자 집에 내버려 두었다고. 더구나 지금처럼 모든 게 엉망이 되어 있는 시기에.
「……응. 혼자 두고 오긴 아무래도 그러잖아.」
“알았어.”
전화를 끊고도 심장박동은 계속 그대로였다. 쿵쿵거림이 도통 멈추질 않았다. 처음 시도해본 자위의 여파는 상당했다. 허리 아래는 여전히 움찔댔고 머리는 편두통이 온 것처럼 사뭇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