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유치하게 굴지 마.”
이설은 얼른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다시 이기적으로 구는 제 모습이 보였다. 자괴감이 훅 밀려들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건 아니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얼굴을 들었을 때 시야를 꽉 채운 건 백인서의 모습뿐이었다. 상체를 똑바로 편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 갈 거니까.”
백인서가 엷게 웃었다. 상처받은 감정을 어둡게 침잠한 눈동자 속에 차곡차곡 욱여넣은 채로 이설을 내려다보면서.
“갈게.”
“……조심해서 가.”
이설은 점점 멀어지는 백인서의 등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백인서처럼 오래도록. 선명한 오렌지색 현관 센서 등이 자연스럽게 꺼졌다. 검은색 어둠이 낮게 드리워진다.
이설은 허벅지 근처에 놓인 손을 들어 제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그녀가 허락만 하면 언제든 시작되었을 신체적 접촉이었다. 되게 달콤했겠지? 백인서하고 나누는 키스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검게 물든 공간 속으로 상처받은 게 분명해 보이는 암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무 매몰찼잖아.
이설은 멍하니 서 있는 와중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후회 몇 줌과 알량한 자기 반성을 해본다.
백인서는 알고 있는 걸까? 상황이 어떻든 관성의 법칙처럼 이어지는 그의 관심과 따뜻한 눈길 한 번에 힘겹게 다잡아 놓은 그녀의 결심이 참으로 쉽게도 바스러지고 허물어진다는 걸. 그리고 볼품없이 부서져 내린 그 결심을 도로 세워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도.
* * *
“아, 진짜 짜증 나네. 뭔 매일 차출이야. 쓸데없이 사진이나 찍으라고 지랄 떨 건데.”
출근하자마자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듣고 황호범이 요란하게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김후섭 그 새끼 잡느라 부산까지 내려가서 일주일 내내 뺑이치는 바람에 힘들어 죽겠구만. 뭘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라 마라야.”
“내 말이. 사람이 좀 쉴 틈을 줘야지. 시도 때도 없이 차출이니 뭐니 해서 사람을 들볶아대니 살 수가 있나.”
황호범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박성진 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근데 우리 진짜 이거 나가야 돼요? 치렁치렁한 띠 두르고 시민들 앞에서 홍보해야 하는 거냐고요.”
“별수 있냐? 밤송이를 까라면 까야지.”
“뭔데요, 진짜. 우리가 무슨 얼굴마담도 아니고. 그딴 거 왜 시키는데.”
“야야,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윗선에서 너를 얼굴마담 시키겠냐. 우리 도암서에도 나름 선호하는 경찰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박성진 형사가 황호범을 위아래로 쓱 훑어내리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그 이미지라는 게 뭔데요.”
황호범이 대번에 발끈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저기 앉아 있는 백인서가 바로 산증인이잖아. 지구대 근무할 때부터 여기저기 엄청나게 불려 다녔지? 경찰 홍보 한답시고. 안 그러냐, 백 형사?”
“그러긴 했죠.”
인서는 별말 없이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때의 피곤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아 씨, 자꾸만 사람 외모 가지고 차별하실 겁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디 나가기만 하면 다들 백인서 저 자식이랑 비교하면서 떼도적같이 생겼다고 무시하는 판에.”
“말씀 중에 대단히 죄송한데, 이거 나가면 경찰 홍보도 되고 좋은 거 아니에요? 시민들한테 강력계 형사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도 심어줄 수 있고요. 다른 관할 지역에서도 요즘 다들 그렇게 하는 추세라던데요?”
옆에서 눈을 순진하게 깜박이며 황호범과 박성진 형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하준 형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제주도로 근무지를 옮긴 원도협 형사 대신 강력2팀으로 들어오게 된 막내 형사였다.
“홍보? 친근한 이미지? 우리 귀여운 막내가 뭣도 모르고 함부로 떠들지. 네가 한번 나가 봐라. 그딴 소리가 나오나.”
황호범이 가자미눈을 뜨고 막내를 째려보려는 찰나, 김모동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팀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너네 오늘은 차출 나가지 마. 그냥 사무실에 있어.”
“그러다가 또 시말서 쓰시면 어쩌려고.”
차준섭 형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모동 팀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넨 그딴 걱정 붙들어 매. 알아들었어?”
“야, 김 팀장. 너 돌았냐? 지난번에도 애들 안 내보내서 박 터지게 깨져놓고, 이번에도 말 안 들으면 서장 성격에 가만있겠냐고.”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강력1팀 윤홍식 팀장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럼 부산 가서 그 개고생을 하고 이제 막 올라온 애들을 또 길거리로 내보내라고?”
“야, 모동아. 너만 애들 위하는 거 아냐. 우리도 애들 위하는 마음은 다 똑같아. 싫어도 그냥 꾹 참고 하는 거지.”
“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열심히 거리 홍보하세요. 그딴 거 안 해도 할 거 많아 힘들어 죽겠으니까.”
“저놈의 성질머리하고는. 황호범 저게 누굴 닮아 성격이 저 모양인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지네 팀장 판박이네, 판박이야.”
“팀원이 팀장 성격 닮는 거야 당연한 이치고만 뭘 따지고 드냐.”
김모동 팀장이 윤홍식 팀장에게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무튼, 우리 강력2팀에서는 오늘 차출 한 놈도 안 나가는 거다, 알아들었냐?”
김모동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호범이 혼자서만 우렁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하여간에 저 꼴통들 못 말린다니까.”
윤홍식 팀장이 입꼬리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말아 문 다음 혀를 끌끌 찼다.
“저기, 팀장님.”
구석에서 난처한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던 막내가 김모동 팀장을 다급히 불렀다.
“왜.”
“신고가 들어왔는데요?”
“무슨 신고.”
“그게…… 살인사건이랍니다.”
“뭐? 장소가 어딘데.”
“금영구 반야 빌딩 7층이랍니다.”
“들었냐, 윤 팀장?”
김모동 팀장이 윤홍식 팀장을 건너다보며 씩 웃었다.
“우린 어차피 차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 서장이 개지랄을 떨어도 운명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고.”
* * *
119가 최초 신고 전화를 받고 금영구 소재 반야 빌딩에 도착했을 때, 피해자는 이미 사망한 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김모동 팀장이 이끄는 도암서 강력2팀은 일선 지구대에서 보존해 놓은 현장으로 과학수사팀과 함께 진입했다.
“아, 씨, 피 냄새.”
황호범이 미간을 구기며 숨을 소리 나게 들이켰다.
“진짜 이 냄새는 적응이 안 돼. 맡자마자 소름이 쭉 돋아.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누군들 적응이 되겠냐.”
황호범과 함께 나란히 사건 현장으로 들어서던 박성진 형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인서도 마찬가지였다. 살인사건 현장을 드나들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이리저리 난도질당한 사체가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훅 끼쳐지는 지독한 피 냄새였다.
강력계에 발을 들인 뒤 처음 사체 훼손 현장을 접했을 땐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하필 장소도 비좁은 원룸 화장실이었다. 여기저기 살점이 떨어져 있는 데다 배수구를 중심으로 온통 피 칠갑이 되어 있던 네모난 공간은 그날 밤 꿈에서까지 나타났더랬다.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현장조사를 마쳤으나, 비좁은 화장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비릿한 피 냄새는 사건 현장을 벗어나고도 끈질기게 코끝을 맴돌았다. 밥을 먹을 땐 더 곤욕이었다. 벌건 김치는 김치대로, 고춧가루 범벅인 국밥은 국밥대로 온통 피범벅인 사체처럼만 보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인서에게 시도 때도 없이 썩은 농담을 투척하며 시비를 걸던 황호범이 그때만큼은 자상한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때때로 괜찮냐고 다독여주기까지 하면서.
인마, 형사 생활이 원래 다 그래. 선지 같은 피도 보고, 다져놓은 고깃덩어리 같은 사체도 보고, 어쩌고 했으면 그나마 있던 정마저 뚝 떨어졌을 것 같은데 황호범은 영 딴판으로 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나름의 배려였던 셈이다. 그래서 인서는 그 사건 이후로 황호범을 제법 좋아하게 됐다. 이따금 보여주는 행동이나 말투들이 얼핏 감정표현에 서툴렀던 아빠를 연상시키기도 했고.
범행현장은 여기저기 뭔가를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엔 현금다발이 굴러다녔고 책상이며 소파 위엔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보이는 서류 뭉치들이 함부로 흩뿌려져 있었다.
“좀 이상한데요?”
박성진 형사가 사무실 내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김모동 팀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강도 목적으로 위장한 것 같기는 한데, 그러기엔 굴러다니는 현금이 너무 많아요. 지갑 속에 지폐와 신분증도 그대로 들어 있고요.”
“박 형사 네가 봐도 그렇지? 금품 목적의 강도살인 사건으로 보기엔 뭔가 이상해. 살해방법 역시 지나치게 잔인하고.”
“그러니까요. 무슨 오버킬도 아니고, 대체 몇 번을 찌른 거야. 후두부에 이 정도 크기의 열창이 생길 정도면, 피해자가 분명 기절한 상태이거나 저항이 어려운 상태였을 텐데 급소 한두 군데만 찔러도 죽을 사람을 이렇게 곤죽이 되도록 쑤셔놓았으니. 더구나 노인네를 말입니다.”
박성진 형사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황호범이 툭 끼어들었다.
“원한이나 보복살인 아니겠어요? 치정은 아닐 테고. 사채놀이하는 양반이니 여기저기 원망 살 일도 많았을 거 아니에요.”
“야, 황호범. 너 형사 생활 처음이냐? 신삥이냐고.”
김모동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요즘은 인마, 치정살인도 나이 안 가려. 옛날 같은 줄 아냐? 60대, 70대도 혈기왕성해서 치정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인데 그걸 왜 네 맘대로 배제하냐고.”
김모동 팀장이 섣부른 판단 내리지 말라며 황호범에게 주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