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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78화 (78/130)

78화

“알았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 줘. 나 피곤해.”

이설은 백인서를 그대로 지나쳐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갔다.

“무거워 보이는데 그거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백인서가 손을 뻗어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빼앗듯 가져갔다.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워?”

“가져가고 싶음 가져가서 먹든지.”

선심 쓰듯 중얼거렸다.

“음식인가 보네? 먹으라는 걸 보니.”

“네가 좋아하는 섞박지와 LA갈비야. 생각 있으면 가져가라고.”

“아무렴 아주머니가 너 먹으라고 싸주신 음식을 눈치도 없이 날름 가져갈까. 그 정도로 개념이 없진 않거든?”

백인서가 피식 웃었다. 정작 웃고 싶은 건 이설 자신이었다. 순진한 엄만 그녀가 스무 살 적에 홧김으로 한 소리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철석같이 믿으면서 틈만 나면 섞박지와 LA갈비, 때로는 전복 넣은 미역국과 감자전 등을 바리바리 싸서 이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사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어, 너 눈치 없는 거 맞아.”

“내가? 어느 부분에서?”

백인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지금 이곳에 떡하니 와 있는 게 결정적인 증거잖아.”

“그게 눈치 없는 거라고?”

“어, 완전.”

이설은 냉소적으로 덧붙이고는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눌렀다. 바로 곁에 서 있던 백인서가 눈치껏 시선을 돌렸다.

사생활 보호라도 해주려는 참인가. 그깟 비밀번호 누르는 거 보면 좀 어때서.

이설은 뾰족하게 생각하며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백인서가 곧장 등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가도 돼?”

“아니.”

이설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백인서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궁금한데.”

“뭐가?”

“예를 들면 잠은 어디서 자고, 샤워는 또 어디서 하는지 같은 거 말이야.”

백인서는 정말 궁금한 눈빛이었다.

“별거 없어. 그냥 일반적인 오피스텔하고 똑같아.”

“그럴 리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정이설 네가 사는 곳이잖아. 어떻게 다른 오피스텔하고 같을 수가 있어.”

“서른이 되었어도 이상한 곳에 의미부여 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럼 안 돼?”

“괜한 시간 낭비야. 그러지 마.”

이설은 현관 안쪽으로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출입문에 손을 뻗었다.

“문 닫아야 하는데 계속 그러고 섰을 거야?”

“언제까지 밀어내려고만 할 건데?”

“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3년이면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하는데.”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백인서가 물었다.

“내가 왜 밀어낸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닌가?”

“우리 3년 전에 끝났어.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사이 아니라고.”

이설은 백인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백인서는 그저 숯검정 눈썹을 한번 쓱 치켜 올렸을 뿐이다. 타격감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듯.

“난 한 번도 너랑 끝낸 적 없는데?”

“그래서?”

“네가 일방적으로 끝낸 거잖아. 나랑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매번 똑같은 얘기 피곤하지도 않니?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이미 우리 관계를 끝내기로 마음먹었어. 너도 이미 다 동의했던 거잖아. 우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관계에서 발을 빼고 싶으면 그렇게 하기로. 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찾아오지…….”

“별일 없었다며.”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백인서가 불쑥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럼 이건 뭔데?”

긴 손가락이 이설의 눈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눈물 자국이 있던 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울었던 거 아냐?”

“……그건.”

“왜 자꾸만 우는 걸 들켜서 사람 미치게 하냐고.”

마냥 부드럽기만 하던 백인서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가해졌다. 이설은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붙잡을 것을 찾기라도 하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기분으로 꿰뚫을 듯한 백인서의 시선을 받고 있으면 꼭꼭 싸매든 감정의 둑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겁이 더럭 났다.

“말해줘. 본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백인서의 눈동자는 꼭 풍랑이 일기 직전의 여름 바다 같았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버릴 것 같은 검고 깊은 바다.

“너랑 상관없잖아.”

“말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

“정말 나 미치는 꼴 보려고 그래? 정이설 네가 원하는 게 그거야?”

“오빠가…….”

이설은 입술을 달싹였다.

“형님이 왜.”

백인서의 눈빛이 한층 더 굳어졌다. 이설은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 망설였다. 뭐라고 얘기한단 말인가. 이제는 침도 못 삼켜서 수건에 뱉어내는 지경이라고? 그런데도 엄마나 아빤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그냥……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 그게 다야.”

“어떻게 안 좋아졌는데. 증상이 있을 거 아냐.”

“딱히 뭐라고 말하기가 그래. 너도 우리 오빠 상태 잘 알잖아. 매일매일 조금씩 증상이 달라지는 거.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더 신경이 쓰이고 눈에 밟혔어. 나 원래 우리 오빠랑 관련된 일엔 예민하잖아. 별것도 아닌 일에 수시로 신경 곤두서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잠깐 운 거야. 정말 그게 다야.”

“…….”

“인서야, 나 피곤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말해줬잖아. 그러니까 제발 그만 돌아가 줘. ……부탁이야.”

작게 덧붙여지는 말에 백인서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뒤이어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문단속 잘하고 자는 거 알지?”

“어린애도 아닌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알아. 너 서른인 거. 그리고.”

떨어져 나갔던 백인서의 손이 도로 얼굴 위로 올라왔다.

“툭하면 우는 것도.”

“…….”

“아무리 꼼꼼히 닦아내도 내 눈엔 다 보이거든. 너 운 거.”

눈자위에서부터 부드럽게 내려오던 손가락이 입술 바로 위에서 멈췄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가운데 부위를 이리저리 문지르는 손길에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이런 거 하지 마.”

이설은 손을 들어 백인서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돌덩이처럼 단단한 팔뚝 근육이 느껴졌다. 늘 그녀를 힘있게 안아주던 팔뚝이었다. 물론 오래전에 다 끝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잡아본 그의 팔뚝은 여전히 힘이 넘쳤으며 비할 데 없는 온기로 가득했다. 또다시 그 안에 폭 안기고 싶을 만큼.

미쳤다고 생각하며 손을 떼려는 순간 백인서가 얼굴을 내려뜨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키스하고 싶다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거냐?”

뜨끈한 숨결이 정수리 위로 흩뿌려졌다.

“알면서 묻는 게 제일 미련한 거랬어.”

이설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익숙한 감각들이 야금야금 기억 저편으로부터 튀어나왔다. 꾹꾹 눌러놓으려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저기서 앞뒤 헤아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알지. 그런데 너만 보면 그게 뭐든 하고 싶어 미치겠는 걸 어쩌라고.”

“우리 성인 아냐? 신체적인 욕구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네가 지금처럼 예쁜 모습으로 눈앞에 있으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렇잖아. 섹스야 수음으로 어떻게든 해결되는 거라지만, 키스는 도저히 혼자서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거지.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말을 이으면서 백인서가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이설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럼 상대를 찾으면 되잖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사람 놀리면 재밌어? 정이설 너 말고 누구한테 키스를 하라고.”

“찾아보면 마땅한 여자 있을 거 아냐.”

“나한텐 그 마땅한 여자가 바로 너야.”

“…….”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너하고만 하고 싶다니까? 키스든, 섹스든. 넌 아니야?”

백인서가 손을 뻗어 이설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겼다.

“난 아니야. 다른 사람하고 얼마든지 키스하고 섹스할 수 있어.”

“근데 왜 여태껏 안 하고 있었던 건데? 사실은 못 하겠으니까 그런 거 아냐?”

백인서가 맞붙은 몸을 은근하게 비볐다. 아랫배로 흥분한 그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못 하긴 뭘 못해. 시간이 없으니까 그랬던 거지.”

“설마. 전혀 못 믿겠는데?”

“난 너랑은 달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르다고.”

백인서의 도발에 따박따박 대꾸를 하면서 이설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와 나누는 지금 이 순간의 대화를 너무나 즐기고 있다는 것을.

“나 아니면 섹스는커녕 키스도 못 하는 주제에 억지는.”

백인서가 낮게 웃었다. 그녀처럼 그도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그리운 마음이 물밀 듯 몰려왔다. 이렇게 달콤한 걸 왜 밀어냈는지 모르겠다. 겨우 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그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어차피 다들 성인이고 각자 사는 인생이잖아.

“진짜 딱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무려 3년이잖아. 더 이상은 나도 버티기 힘들어. 한계라고.”

이설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단박에 알아챈 백인서가 상체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정수리 근처에서 맴돌던 숨결이 순식간에 입술 위로 느껴졌다. 그녀가 허락만 한다면 언제라도 키스가 시작될 수 있는 위치였다.

이설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모른 척 고개를 끄덕여볼까? 그럼 백인서는 당장에라도 입술을 맞물리겠지? 뜨거운 숨결로 그녀의 입술을 먼저 애무하고, 말캉한 혀로는 그 속에 품은 제 혀를 양껏 얽고 빨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몸속 깊은 곳에 미처 사라지지 못하고 잔열처럼 남아 있던 욕망이 순식간에 바글바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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