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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76화 (76/130)

76화

이설의 대학 선배이면서 엄마의 담당 주치의이기도 한 김주현 선배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이설에게 말했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자살 기도로 이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입원 치료가 불가피해질 거라고. 절대 자연적으로 오는 증상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엄만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은 모른 채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아빠의 눈치를 보며 오빠한테만 매달리고 있었다. 이래저래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이었다. 엄마나 오빠 둘 다.

“이젠 안 그래. 꼬박꼬박 먹고 있어.”

엄마가 얼른 덧붙였다. 전혀 신뢰감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제발 부탁인데, 먹다 안 먹다 그럼 아무런 효과도 없는 거 알지? 최소 6개월 이상은 꾸준히 복용해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증세가 나아진다고.”

“……안 그런다니까.”

“우울증이나 신경불안증세가 엄마 생각처럼 정신력이나 의지력으로 호전되는 문제 같았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아. 근데, 우리 마음도 몸하고 똑같아. 아프면 병원 가서 약 먹고 치료해야 낫는 거라고. 의지력이나 들먹이고 있을 게 아니라.”

“…….”

엄만 이제 알겠다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맞잡은 손만 꼼지락거렸다. 한숨이 나왔다. 정말 어쩌겠다는 건지.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이설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엄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뭔가 곤란한 대답이 나올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왜, 또 오빠 문제야?”

이설은 속이 답답해져서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네 오빠야 항상 그렇지 뭐.”

“그럼 뭐, 아빠 문제야?”

이설은 고저 없이 물었다.

“그런가 보네.”

“…….”

수긍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엄만 잠시 대답이 없다. 이설은 그런 제 엄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담 난 할 말 없어.”

칼 같은 반응에 엄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부부 사이의 일은 엄마와 아빠가 직접 해결할 문제라며. 내가 함부로 끼어들 일 아니라고 엄마 입으로 직접 말했던 거 기억 안 나?”

자못 냉담하게 덧붙였다.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는 나쁜 딸년이라고 대차게 욕을 먹어도 할 수 없다. 더 이상은 싫었다. 지긋지긋하게 암울한 상황에서도 아빠를 사랑한다고 했던 엄마였다. 집을 나오기 직전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엄마, 아직도 모르겠어? 오빠가 저렇게 자꾸만 나빠지는 거, 아무리 약 먹어도 별 호전이 없는 거, 그거 다 아빠 때문이야. 제일 큰 불안요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 좋아지냐고. 살 떨리게 무서운데. 엄마도 그래,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 한번 결혼하면 죽을 때까지 살라는 법 없잖아. 아니다 싶으면 갈라서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그래도 아빠가 잘할 때는 잘했어. 기분 좋을 땐 너나 형설이한테도 무척 너그러웠잖아.」

「엄마! 자기 기분 좋을 때 잘하는 건 정신병자라도 할 수 있어. 사람 됨됨이는 기분 좋을 때가 아니라 나쁠 때의 행동거지로 알 수 있는 거야. 아빤 자기가 기분 좋을 때만 우리한테 잘해주잖아. 기분이 나쁘면 처자식이고 뭐고 안 보이는 거 몰라? 그게 사랑이라는 말로 감당이 돼? 내 일반적인 상식으론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말이지.」

「…….」

「나 벌써 레지던트 2년 차야. 조금만 더 버티면 전문의 자격증도 나온다고. 그렇게 되면 풍족하게는 못 살아도 엄마랑 오빠 정도는 충분히 내 힘으로 책임질 수 있어. 그러니 제발 이혼해. 오빠가 저렇게 된 거, 아빠한테도 엄청난 책임이 있다니까?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돼, 응?」

마지막 말을 쏟아낼 땐 답답하고 안타까운 나머지 거의 울먹였던 것 같다. 그런데도 엄만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설은 혼자서만 막다른 곳에 몰린 사람처럼 사뭇 간절했고, 쪼그라진 표정의 엄만 점점 더 방어적으로 나왔던 순간이었다.

그래, 이젠 정말 그만하자, 정이설. 차라리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게 더 낫지.

이설은 불쑥 떠오르는 일 년 전 기억에 미간을 좁혔다.

“그만 갈게.”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엄마 쪽은 보지도 않고 현관 쪽으로 발을 돌렸다.

“저기…… 이설아.”

엄마가 다급히 따라왔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돌아보았을 때, 엄만 핼쑥한 얼굴로 이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바짝 말라붙은 입술로 겨우 운만 떼어놓고 엄만 하릴없이 손만 만지작거렸다.

“나 바빠. 할 말 있음 빨리 해.”

성마르게 재촉했다. 엄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좋은 징조는 절대 아니었다. 벌건 심장이 저 아래 시커먼 바닥으로 순식간에 처박힌다.

“사실은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듣고 있어.”

발치로 떨어져 내린 심장 부스러기들을 감정선 밖으로 최대한 무심하게 밀어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민 많이 했는데…….”

엄마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아빠가 들어섰다. 거실 안 풍경을 재빠르게 눈에 담고 있는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치자 엄만 겨우 열었던 입을 얼른 다물었다.

“어쩐 일이냐, 네가 집엘 다 오고.”

건조한 목소리로 아빠가 툭 건넸다. 한 달 만에 보는 부녀 사이치고는 참으로 냉랭하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이었어요.”

이설은 그대로 아빠를 지나쳤다.

“너 요즘도 그 자식 만난다며?”

이설은 뒤통수로 날아와 꽂히는 말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백인서 말이야. 계속 만나는 거 다 알고 있어.”

“누가 그래요? 제가 백인서를 계속 만난다고.”

“아니면 그 자식이 네 병원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이유가 뭐야. 본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알아?”

“…….”

“너 내가 정말 모르고 있는 줄 아나 본데, 그거 큰 착각이야. 일부러 선수 친 거 다 알고 있어. 그 자식한테 선거운동 도와달라는 말 나올까 봐 미리 둘이 짜고 헤어진 척 한 거 아니냐고.”

잔뜩 굳은 표정을 보니 아빤 추측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백인서와 그녀가 작당해서 자기를 속인 거라고.

“첫 번째 선거 때는 국가대표라서 안 된다고 했으니까 두 번째 선거 때는 보나마나 그 자식이 또 그랬겠지. 자기는 현직 경찰 신분이라서 함부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하여간에 핑계도 그럴싸해. 간부급도 못 되는 말단 경사 나부랭이 주제에 말이야. 내 말이 틀렸어? 그래서 헤어진 척하는 거 아니냐고.”

아빠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백인서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데에는 방금 아빠가 한 말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될 테지만, 사실 그 너머를 들여다보면 그녀의 가족 구성원 전체가 훨씬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한 그 구성원들 속으로 백인서까지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사랑을 들먹인다 해도 그건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일뿐더러, 백인서는 그녀가 손만 내밀면 언제, 어느 때든 그 진창 같은 구성원들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설은 비소를 머금고서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언제는 편부 슬하에 머리 텅 빈 운동선수라고 폄훼를 일삼더니, 백인서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어마어마하게 급상승하자 태도를 180도 바꿔 두 사람의 관계를 허락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의 아빠였다.

나중에 있을 본인의 시장 선거 출마에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이었는 줄도 모르고 이설은 잠시 잠깐이나마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연거푸 두 번씩이나 백인서가 자신의 선거운동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한 꼴이 됐으니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이야 말해 뭐할까 싶다.

어쩌면 아빤 자신이 첫 번째 선거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신 이유가 일정 부분 백인서의 거절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기, 이설아.”

바로 등 뒤에서 엄마가 불렀으나 못 들은 척 현관문을 열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면 아빠의 저 이기적인 눈빛도, 엄마의 비루한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질 것이다.

“엄마가 너한테 줄 거 있어. 잠깐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설의 팔을 엄마가 기어코 붙잡았다. 이설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정말 잠깐만이야. 시간 얼마 안 걸려.”

현관문 안쪽에서 아빠가 쏘는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도 엄만 막무가내였다.

“대체 뭔데 그래.”

“먹을 것 좀 싸주려고.”

엄만 이설에게 절대 그냥 가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곧이어 무언가를 들고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뭐야, 이게?”

이설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엄마에게 물었다.

“너 좋아하는 섞박지하고 LA갈비 좀 했어.”

“……그래서 오라고 한 거야?”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엄마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이설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못해 받아들었는데 제법 묵직했다.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는다고.”

“섞박지는 냉장고에 두고 먹으면 되고, 갈비도 양념에 재운 거라 냉동실에 넣어두면 오래 먹을 수 있어. 엄마가 너 먹기 좋게 일일이 다 소분해서 포장했으니까 먹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면 돼.”

“힘들게 뭐하러 이래. 나 병원에서 주로 밥 먹는 거 잘 알고 있으면서.”

웃음기 하나 없는 차가운 대꾸에 엄마가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더니 말을 이었다.

“너 좋아하는 거잖아.”

“…….”

“정 가져가기 싫으면 할 수 없고.”

“아니야. 잘 먹을게.”

이설은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그럴래?”

냉담하기 짝이 없는 딸이 뭐가 예쁘다고 엄만 그새 눈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심장이 또 시끄럽게 운다. 그만 가겠다고 말하려는데 현관문 사이로 오빠가 얼굴을 비쭉이 내밀었다. 머리에 여기저기 까치집을 지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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