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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75화 (75/130)

75화

이설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무려 3년 전에 이별을 통보했음에도 백인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꾸만 찾아왔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이 시간 될 때 불쑥 나타나서는 이설의 얼굴을 보고 가는 게 끝이었다.

약속을 잡고 오는 게 아니다 보니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백인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어쩌다 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이설의 얼굴을 보면 감사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마는 건지.

깊은 얘기를 나누지 않다 보니 이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알아도 딱히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긴. 친구가 왔는데 서로 인사하면 되는 거지.”

무감한 얼굴로 대꾸하자 강라희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이설의 얼굴을 빤히 건너다본다.

“그게 돼? 너랑 백인서 사이에?”

“안 될 것도 없지 않을까? 원수처럼 헤어진 사이도 아닌데.”

“……뭐, 네가 그렇담 그런 거겠지.”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

이설은 당사자인 자신보다 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강라희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게 되냐고? 안 된다고 하면 다른 방법이 있기나 한 건가?

쿨한 척 행동하려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방법도 몰랐고. 그나마 유난스럽지 않게 말을 주고받는 것이 백인서를 앞에 두고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그러는 것일 뿐.

백인서는 병동 입구 벤치에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긴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서. 정해진 퇴근 시간보다 50분이나 늦게 나왔으니 모르긴 몰라도 분명 그만큼의 시간 동안 저렇게 앉아 있었을 거다. 언제 나올지도 모를 그녀를 기다리면서. 미련하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지금 가?”

눈이 마주치자 백인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응. 넌 별로 안 바쁜가 봐? 요 며칠 계속 오는 걸 보니.”

여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선은 백인서의 눈동자와 콧잔등 언저리 즈음에 두고서. 도저히 뻔뻔하게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구나, 정이설. 속으로 그런 스스로를 비웃었다.

“바쁜 거 다 해결됐거든. 좀 한가해.”

“그럴 때도 있구나. 매일 바쁜 줄 알았더니.”

“바쁜 거로 치면 네가 더 바쁘지.”

“1년 차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아.”

“아무튼.”

백인서가 빙그레 웃는다. 속도 없는 사람처럼.

“저녁은 먹었어?”

한 걸음 더 다가온 백인서가 자상한 눈동자로 이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 같은 표정이다.

“대충.”

“대충 뭐?”

“그건 알아서 뭐하게?”

이설은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저녁 식사 메뉴가 궁금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방금 전에도 강라희가 똑같은 질문을 하더니.

“부실하게 먹었으면 저녁 사주려고.”

“네가 왜?”

이설은 그녀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을 이어가는 백인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밥 사주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냥 사주고 싶음 사주는 거지. 넌 얻어먹으면 되는 거고.”

“됐어. 별로 배고프지도 않고.”

이설은 그대로 백인서를 지나쳤다.

“맛있는 곳 알아놨는데.”

그녀가 뭐라고 하든 백인서는 아랑곳없이 따라왔다. 다리가 워낙 길다 보니 서너 걸음 벌려놓은 공간을 단숨에 따라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게 정말 뭐 하는 짓인지. 3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한 사람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한 사람은 계속해서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누가 봐도 기형적인 관계이건만 백인서는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결같이 다정한 눈빛으로 무장한 채. 그렇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

“다른 사람이랑 가. 동료들이랑 가든지. 이번에 새로운 신입도 들어왔다며. 친해질 겸 같이 밥이라도 먹어.”

“그건 이미 서너 번이나 했지.”

“잘했네.”

백인서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녀와 달리 그는 사회생활엔 별 무리가 없는 타입이니까. 선배에겐 깍듯하고 후배에겐 자상할 테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탁월한 수사능력까지 겸비해서 백인서는 지난 2년 동안 살인, 강간, 강도, 절도, 방화 등 ‘5대 범죄’로 불리는 범행의 현장 검거지수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랬으니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특진을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두 번이나 했겠지.

어떻게 아느냐고? 오늘처럼 약속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는 일상의 변화를 담담한 어조로 흘러가듯 전달해주었으니까.

“같이 가자. 너랑 밥 먹은 지 너무 오래됐어. 춘천에서 쌀국수 먹은 게 마지막이잖아.”

지금도 그랬다. 백인서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누가 저런 얘기를 흘리듯 한다고. 그게 더 마음이 쓰이는 줄 모르는 건가.

“미안한데 집에 가 봐야 해.”

“좀 늦게 가도 되잖아. 어차피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오피스텔 말고.”

이설은 딱 잘라 대답했다.

“엄마한테 가는 거야.”

“그래?”

백인서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설은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백인서가 운전석 옆 유리창을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설은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오른팔을 차체에 걸치고 상체를 깊숙이 숙인 자세로 백인서가 물었다.

“나야 모르지.”

“무슨 대답이 그래?”

“사실이니까.”

“이설아.”

“설령 안다고 해도 백인서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봐.”

이설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한 다음 창문을 올렸다. 백인서가 차체에 기울이고 있던 몸을 마지못해 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차창으로 비치는 백인서가 꼭 그렇게 묻고 싶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렇게 약속 없이 찾아오는 행동 하지 마. 시간 낭비야. 멋대로 이별 통보를 한 주제에 시간 좀 흘렀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여느 친구처럼 밥 먹고 눈빛 교환하는 행동 따위, 적어도 난 못 하거든. 진짜 웃기는 짓이기도 하고.

이설은 습관처럼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차의 속도를 높였다. 백인서가 금방 룸미러에서 사라졌다. 언제 그곳에 서 있었냐는 듯이.

* * *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엄만 거실에 앉아 있었다. 비쩍 마른 모습을 하고서. 체중이 40킬로그램은 되려나.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불편한 감정 덩어리들이 쓴 물과 함께 목구멍 밖으로 치밀어 올랐다. 이런 기분이 싫어 되도록 집을 찾지 않았다.

“바쁜데 엄마가 괜히 오라고 한 건 아니지?”

언제나 을을 자처하는 사람답게 엄만 처음부터 저자세였다. 이설은 잠잠해졌던 두통이 다시금 생기는 걸 느꼈다.

“그런 거 아냐.”

손으로 미간을 살짝 누르며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저녁은?”

“병원에서 대충 먹었어.”

“대충 뭐?”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만 벌써 세 명이나 물었다. 대충 뭐 먹었느냐고. 강라희에 이어, 백인서, 그다음엔 엄마까지. 이런 것도 기록이라면 기록이었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입맛 없다고 손에 잡히는 대로 그냥 아무거나 먹은 거 아냐?”

엄만 그녀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도무지 방금 한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이야. 안 먹었으면 안 먹었다고 하지 내가 왜 거짓말로 둘러대겠어.”

엄만 미심쩍은 눈길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빤?”

이설은 소파에 앉으려다가 오른쪽 방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약 먹고 아까부터 자.”

“그래?”

“어제 천둥 번개 치는 바람에 한숨도 못 잤잖아.”

맞다, 그랬었지. 그래서 그녀가 맡고 있는 환아들도 당직을 서는 내내 무섭다며 칭얼대곤 했었는데 오빤 오죽했을까.

“일어날 때 거의 다 됐는데 깨울까? 이설이 너 왔다고 하면 무척 좋아할 텐데.”

“아니야, 됐어. 일부러 깨우지 마. 피곤할 텐데.”

“그럴까?”

“엄만 어때? 좀 잤어?”

이설은 눈 주위가 움푹 들어가 부쩍 수척해 보이는 엄말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도 자기야 잤지.”

“언제?”

“아까 형설이 잘 때 눈 좀 붙였어.”

“얼마큼.”

“잘 만큼 잤으니까 그런 눈으로 안 봐도 돼.”

“전혀 안 그렇게 보이니까 문제지. 엄마 지금 얼굴, 내가 연속으로 당직 설 때보다 더 피곤해 보인다고.”

책망하듯 흘러나오는 말에 엄만 그저 웃기만 했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는 거야?”

“……응.”

대답에 자신감이 없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지난번처럼 조금 좋아졌다고 마음대로 중단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이젠 안 그래.”

“…….”

“정말이야.”

엄만 오십 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우울증이 극심해졌다. 수면제 없인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중증이었다. 그러면서도 의지력만 있음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보다 못한 이설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신경정신과에 올 때까지도 계속 그랬다.

그러더니 처방받은 약을 두 주 정도 복용한 후, 증세가 완화되는 듯 보이자 병원에도 가지 않고 마음대로 치료를 중단해버렸다. 증세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는 건 당연했다.

엄만 또다시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이설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서.

아빠가 그랬다지? 원래 여자들은 폐경이 오면 자연스럽게 우울증이 발현되는 건데 모녀가 쌍으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다른 여자들도 그 나이가 되면 다들 죽고 싶다느니 하면서 기분이 사춘기 때처럼 들쭉날쭉해지는데 혼자서만 유난 좀 떨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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