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8장. 그림자 없는 섬
“잘 먹겠습니다.”
등 뒤로 인턴들이 씩씩하게 외쳤다. 이설은 빙그레 웃으며 인턴 휴게실을 나섰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저렇게 인턴 휴게실에 동기들과 올망졸망 모여 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레지던트 3년 차였다.
간호사 스테이션을 지나 변동 건물 밖으로 나왔다. 9월 중순이라지만 아직까진 햇살이 제법 따끈하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조금 걷다 보니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 하나가 엄마와 나란히 앉아 볕을 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일상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었다. 퇴원을 곧 앞두고 있어서인지 환아와 보호자 모두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조곤조곤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환아 보호자가 덧붙인다. 아이가 좋아진 게 전부 담당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것에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사실, 처음 전공과를 선택할 땐 조금 고민을 했었다. 내과와 소아청소년과 중에. 영상학과나 병리의학과 같은 비진료과는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환자를 직접 진료해 보고 싶어서 의사가 되겠다는 결정을 했으므로.
수술과와 비수술과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선 인턴 때의 경험이 많은 작용을 했다. 수술장에서 교수님을 도와드리는 일은 이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작업이었다. 피가 흥건하게 고이고 장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데에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이 아니라, 서너 시간씩 같은 동작을 취해야 하는 데서 비롯되는 신체적 고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짧게는 한두 시간에서, 많게는 열 시간이 넘게 지속되는 수술 시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술과 역시 선택지에서 사라지게 됐다.
최종적으로 남게 된 과가 내과와 소아청소년과 둘이었는데, 이건 제법 고민을 많이 했다. 자그마치 두 달 이상을 고민했으니까. 결국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하게 된 건 방금 병동 밖에서 마주친 환아의 사례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내과는 뭐랄까,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해 줘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치료가 끝이 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반면에, 소아청소년과는 상대적으로 치료 기간이 짧고 완치가 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더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설은 아이들을 진료하는 게 좋았다. 곧잘 떼를 쓰고 목청 높여 울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보이는 해맑은 미소라든가 금방금방 표정이 바뀌면서 저를 바라보는 눈망울 같은 것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지금껏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가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공과마저 적성에 맞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버텨냈을까 싶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엄마였다.
「오늘 시간 되니?」
근무 중엔 부담이 될까 싶어 좀처럼 연락을 하지 않는 분인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빠가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재작년 여름, 오빤 멀쩡히 길을 걸어가던 초등학교 남자아이를 따라가서는 갑자기 차도 쪽으로 확 밀어버리는 사고를 쳤다. 천만다행으로 맞은편에서 차가 오지 않아 교통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난데없이 변을 당한 그 초등학생은 도로에 엎어지는 바람에 손목과 무릎 주변으로 심한 찰과상을 입었다. 그 일로 인해 엄만 피해를 당한 초등학생 부모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죄송하다며 빌고 또 빌었다.
문제는 그런 돌발행동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틈만 나면 이상 행동을 보이는 오빠 때문에 엄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기자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져 한동안 도암시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아빤 민선시장에 당선된 지 고작 두 달도 못 돼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염원하던 시장으로서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저녁에 돌아와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했다. 한 번만 더 이딴 일을 벌이면 아들이고 뭐고 시설에 처넣어버린다는 엄포를 놓으면서.
이설은 따로 방을 구해 나와 살고 있는 데다, 하필 그날 당직을 서는 바람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아빠의 평소 언행을 돌이켜 보건대 끔찍하리만큼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거라 미루어 짐작만 할 뿐.
그 일이 있고 난 후 오빤 안 그래도 잘 열지 않던 입을 아예 봉해버렸다. 하는 일이라고는 삼시 세끼 주는 밥 잘 먹고 있다가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는 게 다였다. 비가 요란스럽게 오는 날엔 특히 발작이 더 심해져서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온 집 안을 쿵쿵거리며 돌아다녔다. 참다못한 위아래 층에서 항의가 쏟아졌다. 쿵쿵거리는 건 그나마 견디겠는데, 동물 소리 비슷한 괴성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그래서 엄만 장대비가 유난히 잦았던 올여름을 특히 더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다. 비쩍 마른 몸에서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나 빠져나간 걸 보면 말 다 했다. 이러다간 오빠가 아니라 엄마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이설은 체기가 몰린 듯 콱 막힌 심장을 다독이며 엄마가 보낸 문자를 곱씹었다.
오늘 시간 되냐고? 그건 왜 묻는데?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전화나 문자를 받으면 반가운 마음보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작년 오빠가 연이어 그런 일을 벌이고 난 후엔 증상이 부쩍 더 심해져서 아파트 현관문만 보여도 고산증에 걸린 사람처럼 호흡이 가빠지면서 짓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는 일이 끔찍하게 싫었다.
견디다 못해 엄마에게 이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지나가듯 스치는 말로가 아니라 날을 잡고 진지하게. 사실은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 늘 생각해오던 일이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고 꾸준히 약을 복용하는데도 오빠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악화일로로 치닫는 건 아빠의 폭력적인 성향이 크게 한몫하는 거라고. 설상가상으로, 낯을 심하게 가리는 오빠가 두 번의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유세를 도운 것 역시 상태를 악화시킨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이러다 두 사람 다 큰일 나겠다고.
이설의 간절한 설득에도 엄만 묵묵부답이었다.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난 독립할 거야.」
선언하듯 내뱉었을 때 이설은 엄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그렇게까지 강수를 둘 거라고는 예상 못 했을 테지.
「방은…… 알아본 거야?」
거스러미가 하얗게 피어올라 까칠해진 입술을 소리 없이 달싹거리고, 메마른 손으로는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엄만 이설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성인이니 독립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했다.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주제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으나 입술을 지그시 감쳐 물었다. 이런 진창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대로 있다간 정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으므로.
「엄마 아빠 사랑한다며. 그러니까 오빠가 어떻게 되든 못 헤어지는 거 아냐?」
「…….」
「나라도 벗어나려고. 이렇게 살다간 미칠 것 같아서 내가 못 견디겠어.」
얼이 나가버린 엄마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독한 말을 퍼부은 다음 집을 나왔다. 레지던트 2년 차에 접어들던 해였다. 그러고는 급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겨우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렀나?
어쩌다 마주치면 아빤 이설에게 말했다. 고생고생해서 기껏 의사 만들어주었더니 저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안다고.
「왜, 무슨 일 있어?」
이설은 복잡한 속내를 꾹꾹 눌러 담으며 문자를 보냈다.
「그런 건 아니고. 우리 딸 얼굴 보고 싶어서.」
절대 그럴 일 없다는 걸 이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특별한 일 없음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 거야.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갈게.」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이설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라희가 다가왔다.
재수학원에서 스무 살을 함께 보냈던 강라희는 현재 이설과 같은 대학병원, 같은 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심지어 같은 오피스텔 위아래층에 살고 있으니 대학 동기를 넘어, 오래된 직장 동료이자 이웃사촌인 셈이다.
생각해 놓고 보니 정말 엄청난 인연이다. 옷깃만 스쳐도 대단한 인연이라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한 몸처럼 붙어 다니고 있으니.
“집에 가게?”
강라희가 특유의 밝은 목소리 톤으로 물었다. 없던 힘도 이 목소리를 들으면 생겨난다.
“응.”
이설은 가방을 메고 복도로 나섰다.
“저녁은 먹었어? 오늘 퇴근이 좀 늦었는데.”
“아까 대충 때웠어.”
“아까 뭐? 혹시 어제 먹다 남은 피자 말하는 거야?”
“한 조각 남았더라고. 잠깐 짬이 나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어. 따끈한 커피랑.”
“그거 가지고 저녁이 되겠어? 다 말라비틀어져서 맛은 있었나 몰라.”
“나름 먹을 만하던데?”
이설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손을 살짝 흔들고 제 갈 길을 갈 듯하던 강라희가 발을 두어 번 복도 바닥에 비비더니 몸을 빙글 돌려 다가왔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이설의 물음에 강라희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또 왔어.”
“또 왔다니?”
“백인서 말이야.”
이설은 걸음을 멈칫했다.
“오늘은 퇴근이 빨랐다던데?”
“……그래?”
“어쩔 거야?”
이설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어쩌려는 거야, 백인서? 우리 헤어졌잖아. 근데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