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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71화 (71/130)

71화

“이건 말이 안 돼요. 서커스도 아니고 어떻게 집어넣었다는 건지. 더구나 키 차이가 20센티미터도 훨씬 넘게 나는 마당에.”

용을 쓰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황호범이 있는 대로 투덜댔다.

“그 자식이 한 말 중에 사실이라고는 앞으로 한 번 한 다음에, 뒤로 한 번 더 했다는 거, 딱 그 두 가지밖에 없다니까요? 처음부터 촉이 싸하고 안 좋더라니. 박 선배도 느꼈죠? 그 새끼 쳐다보는 눈빛하며, 말하는 품새가 영 아니었다는 거.”

“그렇긴 했지.”

박성진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증거부터 확보하자고. 황 형사하고 백 형사는 내일 피시방으로 다시 가서 사건 당일 김준열의 옷차림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알아 오고, 나머지는 인근 신발가게 다 뒤져서 족 흔적이랑 똑같은 신발이 있나 확인해 봐.”

김모동 팀장이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 * *

차에서 내리자 얼굴에 닿는 밤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벌써 9월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인서는 병원 건물을 한번 올려다본 후 근처 벤치에 앉았다. 문자를 보내 놓았으니 이제 할 일은 정이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지난달에 근무했던 과는 이 시간 즈음이면 한가하다고 했는데 9월이 되면서 바뀐 과는 사정이 어떨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바빠서 나오지 못할 수도.

괜히 문자를 했나?

바쁘게 뛰어다닐 정이설에게 부담을 준 건 아닌가 싶어 슬쩍 미안해졌다. 볼을 몇 번 문지른 다음 고개를 들었다. 날이 맑아서 그런가, 하늘에 별이 엄청나게 많았다.

여기가 별 구경하기엔 명당이구나.

한참 동안 별을 구경하다가 그것도 무료해져 버렸다. 인서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얼마 전에 찍은 정이설의 옆모습이다. 사진 속의 정이설은 대충 틀어 올린 당고 머리에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싱크대 앞에 서 있었는데 스물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어려 보였다. 특히 잔머리를 귀엽게 늘어뜨린 목선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멍하니 보았더랬다.

그때 몇 번이나 정이설의 목에 얼굴을 묻었더라. 강아지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은은하게 나는 향이 좋아 목에서 얼굴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겠다는 정이설을 돌려세우고 그 자리에서 섹스로까지 이어졌지만.

“좀 피곤해 보이네?”

자박자박 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온 정이설이 작게 속살거렸다.

“그렇게 보였어?”

인서는 멋쩍게 웃었다. 요 며칠 팀원들과 김준열 사건을 조사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긴 했다. 눈썰미가 좋은 탓에 사건 현장 인근의 CCTV는 죄다 그의 몫이었다.

특별한 건 나오지 않았다. 근무를 끝마치고 나갔다는 피시방에서부터 범행 장소인 공터에 도착하기까지 군데군데 걸어가는 장면이 찍힌 김준열과 피해자 윤민진은 얼핏 다정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CCTV 상으로는 딱히 문제점이 없어 보였다.

안타까운 건 제일 중요한 CCTV 2대가 무용지물이라는 점이었다. 김준열에 의해 성관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되는 공터 앞 CCTV는 아예 벤치 쪽을 비추지도 않았고, 피해자가 변사체로 발견된 쪽 CCTV는 껌껌한 밤인 데다 화소마저 극히 불량해 식별이 도저히 불가능했다.

족 흔적과 똑같은 신발을 찾으러 나갔던 팀원들 역시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오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신발가게는 물론이고, 지역을 넓혀 조사에 들어간 대형매장에서도 비슷한 신발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강력한 용의자는 있는데 증거 확보가 어려우니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김모동 팀장은 연일 미간을 찌푸렸고 황호범은 이에 질세라 틈만 나면 구시렁댔다.

“자, 마셔.”

정이설이 머그잔 하나를 건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하얀 머그잔 안에 담겨 있다.

“웬 거야?”

“환아 보호자가 우리 마시라고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오셨더라고. 맛이 제법 괜찮아서.”

인서는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때?”

“괜찮아. 맛있어.”

“그치? 이 커피 가져오신 분이 카페를 운영하신다더라고.”

“어쩐지. 전문가 솜씨는 확실히 다르구나.”

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맛도 잘 모르면서.

“원두 이름이 뭐라더라? 맞다. 케냐 AA. 혹시 들어봤어? 산미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커피라는데.”

“설마 들어봤겠냐? 커피엔 완전히 문외한인데.”

인서는 픽 웃었다. 예전부터 커피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저 남들과 어울리려니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다.

“그래도 맛은 있지?”

“어. 네 말처럼 약간 신맛도 느껴지는 것 같고.”

“그리고?”

“음…… 계속 마시다 보니까 뭔가 과일 비슷한 향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인서는 머리를 쥐어 짜내서 대답했다. 지금처럼 정이설이 코앞에서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쳐다보면 어쩐지 대충 대답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면 언제 이분이 운영한다는 카페로 커피 마시러 갈까?”

“좋지. 너 한가할 때 가자.”

“뭐야. 맨날 거절하는 법이 없어.”

“너랑 가면 어디든 다 좋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건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정이설과 함께 있으면 장소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너도 참.”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쑥스럽게 미소짓던 정이설이 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었다.

“참, 다음 달이 아저씨 기일이지?”

“어, 시간 진짜 빨리 가.”

인서는 담담히 대꾸했다.

“춘천 갈 때 나랑 같이 가는 거 잊지 마.”

“시간 돼?”

“친구랑 미리 당직 바꾸면 되지.”

“바쁜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

“아무리 바빠도 아저씨 기일을 잊으면 되나.”

“나야 너 신경 쓰는 게 미안해서 그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인서는 고마웠다. 스물한 살에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정이설은 해마다 기일이 되면 먼저 연락을 해서 춘천에 있는 추모공원까지 동행을 해줬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정이설은 알고나 있을까. 초록색 반점이 군데군데 박힌 커다란 갈색 눈으로 자신을 지그시 응시할 때면 세상 모든 일이 별거 아니게 느껴질 만큼 스스로가 대단하게 느껴진다는 걸.

“이번 달에 옮긴 과는 어때? 안 바빠?”

심장 언저리가 무지근하게 조이는 기분이 들어 화제를 바꿨다.

“지난번 과보다 조금 더 바쁘긴 한데 이젠 적응이 돼서 그러려니 해. 나름 짬밥이라는 게 생겼거든.”

“긍정적인 관점 좋은데?”

부드럽게 바라보자 정이설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사실은…….”

정이설이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는데 콜이 들어왔다.

“어떡하지? 가봐야 할 것 같아. 긴급콜이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이설은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안 써도 돼. 너 얼굴 본 거로 됐어.”

“그래도.”

“빨리 들어가. 긴급콜이라며. 늦으면 또 싫은 소리 들을 거 아냐.”

“……알았어. 춘천 갈 때 만나.”

정이설은 두어 번 정도 뒤를 돌아본 다음 병동 건물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밤공기 속으로 달콤한 잔향만을 남긴 채.

인서는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더 같은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 * *

김준열은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도 거부하며 모든 수사 요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증언거부는 당연했고 출석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배 째라는 태도였다. 이에 김모동 팀장은 정식으로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김준열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경찰 입장에서도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알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석요구에 불응하면 나중에 체포영장 신청 사유 된다는 거.”

황호범이 인서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개새끼가 오리발 까고 버티면 우리도 우리 식대로 하는 거지 뭐. 체포영장 신청 사유가 될 때까지 줄기차게 출석요구서를 보낸 다음에, 압수수색영장 발부받아서 집이고 뭐고 싹 다 뒤지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그때도 저따위로 나오나 한번 보자.”

황호범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김준열은 막상 압수수색영장이 나오자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는지 추가 조사에 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석요구에 응하는 건 응하는 거였고, 증거 확보는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었다.

“아, 이거 되게 안 풀리네.”

김모동 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김준열 친구 양동민을 불러들여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는 건 어떨까요.”

인서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누구, 피시방에서 알바 한다는 친구?”

“네. 뭔가 더 알고 있는데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 진해서요.”

“그래?”

“분명합니다.”

인서는 힘을 실어 대답했다. 황호범과 탐문을 나갔을 때 양동민에게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뭔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는 있는데, 친구를 배신하기 뭣하니까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도 뭔가 더 캐내려 하면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는 지레 입을 조가비처럼 봉하기 일쑤였다.

“둘이 초등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친구로 지냈다니 쉽게 입을 열긴 어려울 겁니다. 여기서 더 다그쳤다가는 입을 꾹 다물어버릴 가능성도 있고요. 이런 경우엔 본인한테 익숙한 공간에서 탐문을 진행하기보다는, 아예 경찰서로 불러들여 정식으로 조사하는 게 더 효과적일 듯합니다.”

“이유는?”

“양동민처럼 마음이 여리고 양심의 가책을 쉽게 느끼는 친구들은 경찰서라는 유형의 공간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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