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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70화 (70/130)

70화

“난 아무리 그래도 양다리는 아니라고 봐.”

“왜?”

정이설이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인간적으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정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현재 상대를 깔끔하게 정리한 후 만나는 게 옳다고 봐.”

“그럼 백인서 넌 내가 말한 두 부류 중 전자에 해당하는 거고.”

“넌 아니라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은데?”

“당연히 정이설 너도 나랑 같은 부류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뭐…… 그런 거겠지.”

담담히 대답하곤 정이설이 욕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경찰서로 불려온 김준열은 태연자약했다. 살인사건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상황인데 별달리 동요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피해자 윤민진을 아느냐는 박성진 형사의 질문에 다짜고짜 걔랑 성관계한 것 때문에 그러냐며 되묻기까지 했다. 조사실 밖에서 김준열이 진술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인서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대답이었다. 이 새끼 봐라? 옆에 있던 황호범도 어이가 없어 했다.

묻지도 않은 걸 왜 말하냐고 박성진 형사가 묻자 김준열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자신과 윤민진은 합의하에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가졌는데 혹시라도 경찰에서 일방적인 강간으로 보고 사건과 결부시킬까 봐 미리 털어놓는 거라고 했다.

“그때 윤민진이 뭐 들고 있었는지 기억나?”

“가방하고 무슨 선물쪼가리 하나 들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뭔지는 몰라요. 포장을 하도 야무지게 해놔서.”

“헤어진 시간은.”

“알바 끝난 시간이 10시니까, 그때부터 12시 30분까지 계속 함께 있었어요.”

박성진 형사의 동선 확인에도 김준열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일견 사건과는 무관해 보이는 태도였다.

“네가 주장하는 성관계는 어디서 했는데.”

“공터에 놓인 벤치에서요.”

김준열의 말에 따르면, 한 번은 음부에, 나머지 한 번은 항문에 직접 삽입을 했단다.

“보통 여자들은 항문 쪽으로 성관계하는 거 싫어하지 않나?”

“윤민진 걔는 그런 거 상관 안 하나 보죠, 뭐.”

“너는 어땠는데. 찝찝하거나 좀 꺼려지지 않았어?”

“그래야 합니까?”

김준열이 되물었다. 박성진 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좋아. 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자세는.”

“무슨 자세요?”

“성관계할 때 어떤 자세로 했냐고.”

“모텔 방도 아닌데 서서 하지 뭘 어떻게 해요.”

김준열이 툭 내뱉었다. 성의 없는 태도에 박성진 형사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자세 잡기 불편했을 텐데.”

“거기 벤치가 좀 지저분해서 민진이가 질색을 했거든요. 병균이라도 옮으면 책임질 거냐고 징징대더라고요.”

“삽입은 어떤 방식으로 했는데.”

“참나, 경찰관한테 이런 사적인 것까지 일일이 까발려야 되는 겁니까? 조사받는 사람은 인권도 없냐고요. 아님, 이상한 쪽에 관심이 있는 거야 뭐야.”

김준열이 의자에 상체를 비스듬히 기댄 채 실소를 머금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박성진 형사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내가 너랑 장난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지금 살인사건 조사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넌 피해자와 마지막까지 함께한 유력한 용의자인 거고. 근데 웃음이 나와?”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세요.”

“만약 어떤 놈이든 열아홉밖에 안 된 불쌍한 어린애를 강간한 다음에 목 졸라 죽인 거라면, 그 새낀 무슨 이유를 들먹이든 간에 돌로 쳐 죽일 개새끼인 거야. 재활용도 안 되는 폐기처분용 개새끼 말이야.”

“…….”

“알아들었으면 이제 각 잡고 진술할 마음이 드냐?”

“예, ……뭐.”

박성진 형사의 살벌한 기에 눌린 김준열이 일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그건 정말 아주 잠시뿐이었고.

“일단 앞으로 집어넣을 땐 팔을 이렇게 두른 다음에 다리를…….”

김준열은 박성진 형사의 질문에 미리 연습이라도 하고 온 듯 따박따박 대답을 한 후 여유롭게 돌아갔다. 이 정도로 자세하게 진술했는데 또 귀찮게 오라 가라 하지 않을 거죠? 라는 농담까지 천연덕스럽게 건넨 후에.

“아 씨, 이거 뭐지? 성관계한 놈 따로 있고, 죽인 놈 따로 있다는 건가? 게다가 딴 놈이랑 성관계하면서 남자친구 줄 디퓨저인가 뭔가를 끼고 있었다고? 만으로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몇 번 안 만난 남자랑 항문성교까지 하면서? 이게 도무지 말이 되나?”

황호범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김모동 팀장의 기색을 살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김모동 팀장이 한참 동안 미간을 좁히고 섰다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뭐를요?”

황호범이 지레 몸을 사렸다. 혹시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킬까 봐.

“김준열이 말한 자세로 성관계를 하는 게 가능한지 아닌지 확인작업 들어가자고.”

“누가요?”

“누구긴, 당연히 너하고 막내지. 그럼 다 늙은 내가 하리?”

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호범의 얼굴이 와락 우그러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만약 안 되면요?”

“김준열 그 새끼가 진술이랍시고 떠들어댄 건 새빨간 거짓말이 되는 거지.”

“아니 대한민국 경찰이 왜 애먼 사람에게 욕을 하고 그러세요? 아직 혐의가 입증된 것도 아닌데.”

황호범이 바락 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내가 시킨 거 하기 싫어서 일부러 딴지 거는 중이냐?”

김모동 팀장이 황호범 앞으로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전직 유도선수답게 어깨가 떡 벌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평소보다 눈빛이 한층 더 형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위협적인 자세였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진짜 너무 하잖습니까. 이런 사건 날 때마다 꼭 저한테만.”

“아무리 억울한 표정 지어도 시킬 거니까 빨리 얼굴 펴라. 버틸수록 너만 손해인 거 알고 있지?”

김모동 팀장이 제대로 썩은 표정을 하고 있는 황호범을 건너다보며 씩 웃었다.

“아, 좋아요. 합니다, 해. 이런 거 한두 번 해보나. 대신, 막내가 피해자 역할이고 제가 김준열 그 새끼 역할 하는 거 맞죠?”

기 싸움에서 보기 좋게 진 황호범이 대번에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말아 넣었다.

“호범아, 정말 미안한데 말이야. 인간적으로 그건 좀 안 될 것 같다.”

김모동 팀장이 영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요.”

“너 인마 주변을 한번 둘러봐. 배구선수 김연경 말고 190 넘는 여자가 어디 있기나 한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네 눈으로 직접 백 형사 체격을 한번 보란 말이야. 피해자 역할이 가당키나 한가.”

김모동 팀장의 말에 황호범이 곁에 있는 인서를 훑어내렸다. 퉁방울눈으로 잡아먹을 듯. 그러더니 미간이 홱 구겨졌다. 막내의 키가 190이 넘다 보니 확실히 덩치 하난 어마어마하게 컸다. 게다가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어깨마저 떡 벌어져서 위압감 또한 장난이 아니다. 요리조리 깨알같이 돌려봐도 팀장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요만큼도 없었다.

“흠…… 키 차이도 그 정도면 얼추 들어맞는 것 같고.”

김모동 팀장이 김준열의 진술대로 자세를 잡고 선 인서와 황호범을 쓱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슷하긴 뭐가 비슷하다고 그러십니까. 제 키가 170이 넘는데.”

황호범이 발끈했다.

“어, 너 171이야. 됐지?”

김모동 팀장이 성의라고는 하나도 없이 대꾸했다.

“아, 진짜, 기분 되게 더럽네. 이게 극한직업이 아님 뭐냐고.”

구시렁거리던 황호범이 갑자기 인서를 올려다보며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야, 막내! 너 나한테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 품지 마라. 경고야.”

대체 뭐라는 건지. 인서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저도 눈이란 게 있습니다.”

무감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황호범의 눈썹이 꿈틀한다.

“너 그거 무슨 뜻이냐?”

“아무한테나 이상한 마음 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나냐?”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아우 이 자식이 한마디를 안 지네.”

구시렁대는 황호범을 보며 인서는 정이설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정이설 이외의 여자에겐 시선을 멈춘 적이 없었다. 하물며 떼도적같이 생겨버린 털북숭이 황호범이라니. 어떻게 착각도 저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이후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늘 정이설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그런 상태가 돼버렸으므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을 모두 정이설이 잠식한 상태였다. 사정이 이러니 다른 사람은 그의 영역에 발을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생기지 않는다.

하,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네.

“이 자식 봐라? 야, 막내. 정신 안 차리지, 어?”

잠시 생각이 샛길로 빠진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황호범이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이럴 때 보면 딱히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팀장하고만 있으면 유독 그 눈치들이 죄다 사라지고 만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들자 황호범이 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다. 인서는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후 황호범과 함께 김준열의 진술서에 나와 있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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