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칼에 찔렸는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중상도 아니었는데 뭘.”
“너도 참.”
“상처도 잘 안 보이잖아.”
“안 보이긴 뭐가 안 보여.”
“어차피 시간 지나면 옅어진다니까?”
백인서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상처를 보듬고 있는 손을 끌어다가 제 입술로 가져갔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이어 가운뎃손가락과 약손가락, 그리고 새끼손가락이 차례차례 그의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손가락 끝으로 뜨끈한 혀가 닿는 게 느껴진다. 잠자코 있었더니 말캉한 혀가 이설의 손가락을 천천히 빨아들였다. 질척한 키스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담백하게 키스한 것도 아니었지만. 적당히 야하면서 적당히 예의를 차린 키스였다.
이설은 좋았다. 백인서의 이런 유난하지 않음이.
“아직 대답 안 했는데?”
마지막 새끼손가락까지 빨아들이고 나서 백인서가 말했다.
“……뭘?”
“같이 씻자고 했잖아.”
“그럼 또 다 씻겨줄 거면서.”
“그래서 싫어?”
“너 피곤할까 봐 그러지.”
“전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설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엄청난 높이에 이설은 반사적으로 넓은 어깨에 매달렸다. 욕실에 도착하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백인서는 몇 번이고 이설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때론 혀를 내밀어 입안을 질척하게 훑기도 했다. 도저히 그냥은 못 가겠다는 듯이. 뻣뻣하게 치솟은 성기로는 노골적으로 이설의 엉덩이골을 비벼대면서.
……어떡하지, 인서야? 네가 너무 좋은데.
* * *
신고가 들어온 건 오전 10시 38분경이었다. 사체가 발견된 장소는 주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였다. 변사자는 신원확인 결과 스무 살의 피시방 알바생으로 사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원룸에서 친구와 둘이 살고 있었다.
최초 발견자는 근처 아파트로 배달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동네마트 직원이었다. 발견 당시 사망자는 엎어진 자세로 하의와 속옷이 벗겨져 있었으며, 외음부와 항문에서 0.3센티미터 정도의 열상과 목 부분에서는 피하출혈이 발견되었다. 신발은 신지 않은 상태였고 손톱과 발에 흙이 묻어 있었다. 그 외의 소지품은 현장에서 사라진 채였고 변사자의 다리 주변으로 가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족 흔적 3개가 남아 있었다.
정황상, 성폭행 후 액살이 의심되는 사건이었다.
“방어흔이 없다는 건 신체적 폭력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닐까요?”
박성진 형사가 김모동 팀장을 향해 말했다.
“그건 아니야. 변사자 체격을 봐. 150 후반에 깡마른 체격이잖아. 그럼 제압하기 쉬운 조건이라는 뜻이거든. 만약 가해자가 어느 정도 덩치가 있다면 한 방에도 잠재울 수 있어. 그런 경우엔 악 소리도 못 내고 제압당하기 딱 좋지. 안면부와 입 쪽에 흙이 들어갔다거나, 우측 광대뼈에 작은 찰과상이 있는 건 피해자가 엎어져 있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고, 문제는 설 돌출인데.”
김모동 팀장이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변사자의 입 밖으로 혀가 나와 있는 경우는 대부분 경부압박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목을 매거나 손으로 조를 때 나오는 대표적인 현상이거든. 주변 상황은 어때? 발견 장소가 주택가 근처면 최초 신고자 말고도 분명 목격자가 더 있었을 텐데.”
김모동 팀장이 현장 탐문을 나갔던 황호범과 백인서를 쳐다보았다.
“여기가 주택가긴 한데 나름 외진 곳이라 밤 9시 넘어서는 통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황호범이 대답했다.
“한 집도 안 빼먹고 죄다 탐문했어?”
“그럼요. 공터 인근 주택가는 물론이고, 다세대 주택을 포함해서 일대 상점이란 상점은 이 잡듯이 싹 훑었습니다.”
“근데 비명을 들은 사람도, 다투는 소리를 들은 사람도 발견 못 했다 이거지?”
김모동 팀장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공터 인근 주민 중에 마당에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아저씨가 있는데, 그 개가 귀가 여간 밝은 게 아니랍니다. 그래서 소리가 잘 들리는 밤엔 조그만 부스럭 소리에도 짖어대고 난리인데,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는 그런 거 전혀 없었답니다.”
“그럼 이건 뭐지? 사람을 강간해서 죽일 정도의 사건인데 조용한 주택가에서 아무도 못 들었다는 게 말이 돼? 혹시 딴 데서 범행을 저지른 다음 여기에다 유기한 거 아닌가?”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원도협 형사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입맛을 쩝 다셨다.
“아니면 그 집 개랑 친한 놈이 저지른 걸 수도 있죠. 개는 원래 아는 사람한텐 잘 안 짖어대잖아요.”
“아 씨, 그럼 개새끼랑 친한 인간까지 찾아야 하는 겁니까?”
황호범이 대놓고 툴툴거렸다.
“탐문이 중요하긴 한데 신빙성도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서가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말하자 황호범이 뭔 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구대에서 근무할 때 보면, 잘못된 목격자 증언이나 탐문 조사 때문에 형사들이 고생하는 걸 종종 본 적 있어서요.”
“근데 난 걸리는 게 있어.”
박성진 형사가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뭐가요?”
황호범이 물었다.
“열상이 항문에도 있었잖아. 보통 아무리 그 짓을 하고 싶어도 변태가 아닌 이상 항문에까지 강간하고 싶냐?”
박성진이 하고 많은 형사들 중에 인서를 쳐다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막내.”
“상식선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드문 일은 아니니까요.”
“너도 가능하다는 뜻이냐?”
황호범이 쓱 얼굴을 디밀고 물었다.
“선배님은 어떠신데요?”
서늘한 표정으로 되묻자 황호범이 눈을 찔끔 내리깔았다.
“피시방 주인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 윤민진은 사건 발생 전날 22시까지 근무를 했었답니다. 나갈 때는 어깨에 가방을 걸치고 있었고요. 아, 그리고 남자친구 준다고 선물 포장된 디퓨저 하나를 가지고 나갔답니다.”
“디퓨저? 그게 뭔데?”
인서의 말에 황호범이 요란스럽게 눈을 끔적였다.
“방향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방향제는 또 뭐고.”
“네?”
농담 하나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정말 모르나 보다.
피해자가 들고 나갔다던 디퓨저는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하던 인근 빌라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공터 근처에서 차량 뒷바퀴에 으깨진 상태로.
“그렇다면 사체 발견 장소가 범행 장소라는 건데.”
김모동 팀장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투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가 안 들린 것으로 보아 면식범일 확률이 높고. 비명 한번 없었다면 피해자가 완벽하게 제압된 상태에서 강간을 당했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는데 말이야.”
김모동 팀장은 사건 추정을 함에 있어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 용의자 특정과 그에 따른 동선추적 자체가 완전히 꼬여버리기 때문에 열두 번을 고치는 한이 있더라도 제대로 해야 했다.
“남자친구 행적은 파악해봤어?”
김모동 팀장이 차준섭 형사에게 물었다.
“진술한 대로 사건 전날과 당일엔 피해자를 안 만났더라고요. 중학교 동창 모임 때문에 새벽 두 시까지 친구들하고 술집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휴대폰 통화 내역과 기지국 추적에서도 그렇게 나오고 있고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통화는 딱 두 번 했더라고요. 사건 전날 저녁 18시 30분에 한 번 하고, 두 번째는 23시 50분경에요.”
“적어도 그때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얘기네?”
“그런 셈이죠.”
김모동 팀장의 물음에 차준섭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 나이와 하는 일은.”
“현재 스물여섯인데 피해자와는 1년째 사귀는 중이랍니다.”
차준섭 형사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황호범이 끼어들었다.
“1년째요? 그럼 작년이면 스물다섯이라는 얘긴데, 나잇살이나 처먹은 새끼가 양심도 없이 미성년자와 연애질을 했다는 거잖아. 우와, 이런 것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다 잡아 쳐넣어야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건데. 안 그래요, 팀장님?”
요란스럽게 이를 부드득 가는 황호범을 무시하며 차준섭 형사가 말을 이었다.
“2년 전부터 자동차 정비업체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건 당일 알리바이도 확실하고요.”
“알았어. 황 형사하고 백 형사는 오늘 오후에 다시 피시방으로 가서 더 알아낼 점 없나 확인해 봐.”
김모동 팀장의 말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 * *
며칠에 걸쳐 피시방을 찾아가자 처음엔 긴장한 얼굴로 고분고분 탐문에 응하던 사장이 어느 순간부터는 드러내놓고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자기는 그 시간에 피시방에 없어서 모른다, 다른 알바생 두 명도 전부 모른다지 않느냐, 이렇게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형사들이 들락거리면 손님들 다 끊어진다며 미간이 우그러지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언뜻 이해가 되다가도, 하는 일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계속 찾아가는 수밖에.
그런데 오늘은 한 시간 가까이 손님들에게 탐문을 하고 돌아서는 인서와 호범의 등에 대고 아예 소금을 좍좍 뿌려댔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는 노골적인 시위였다. 이쯤 되니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자고 마음먹었던 인서조차도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참다못한 황호범이 눈을 부라리며 몸을 홱 돌렸다.
“아 씨. 너 방금 우리한테 소금 뿌리는 소리 들었냐?”
조폭과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유사한 황호범의 퉁방울눈과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피시방 사장이 냅다 출입문 안쪽으로 꼬리를 감췄다.
“어이, 아저씨.”
황호범이 피시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렸을 인서였지만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