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너 우리 백 형사 처음 들어온 날 뭐라 그랬어. 무도 특채면 까막눈이나 다름없는데 진술서나 제대로 작성할 줄 아느냐고 물었지?”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고 그러십니까.”
뜨끔해진 황호범이 지레 방어적으로 되물었다.
“그랬어, 안 그랬어.”
“……그, 그러기야 했죠.”
“대답은 뻔뻔스럽게 잘하네.”
“안 하면 안 한다고 또 윽박지르실 거 아니에요. 기억력이 3초네, 붕어 대가리 저리 가라네, 하면서요.”
황호범이 대번에 억울한 얼굴을 했다.
“아우, 말을 말자. 이러니 내가 복장이 안 터지고 배겨.”
“그러게 누가 지나간 얘기 하시랍니까?”
“그래 너한테 말을 건 내가 잘못이다.”
김모동 팀장이 혀를 내두르며 황호범을 노려보았다.
“근데 인마 너 말이야. 앞으로는 공부란 걸 좀 하고 살아. 백 형사 앞에서 선배랍시고 거들먹거리지만 말고.”
“이 나이에 공부는 무슨 공부예요. 경찰시험 보느라 노량진에서 3년 동안 공부한 것도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앓느니 죽지. 너 생각을 좀 해봐라. 이렇게 앞뒤 하나도 안 맞는 진술서를 받아놓고 뭐? 아무리 봐도 익사 사고 같다고? 대체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이딴 걸 단순 변사사건으로 치부할 수가 있냐, 어?”
흥분한 김모동 팀장이 황호범의 책상 위로 진술서를 홱 집어 던졌다.
“경찰은 말이야. 직급이고 나발이고 진짜 코피 터지게 공부해야 해. 사건이 떨어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조사하고 또 조사해야 하는 거라고. 그래야 억울한 피해자가 안 생길 거 아냐. 너처럼 이렇게 슬렁슬렁 해봐. 가뜩이나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가 눈이나 감겠어? 그러라고 나라에서 우리한테 월급 따박따박 주는 줄 알아? 그거 다 국민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피 같은 세금이야. 눈먼 돈 아니라고.”
“……예, 주의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 하나 없는지라 황호범은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막내 데리고 당장 나가서 남편 쪽 경제 상황 좀 파악해봐. 특히 보험 관련 쪽으로. 분명 무슨 연관성이 있을 거야. 박 형사하고 김 형사는 사망자 거주지역으로 가서 부부 사이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 자세히 탐문해 오고.”
김모동 팀장의 예상은 정확했다.
피해자와 남편은 대학가 근처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편의 연이은 주식 투자 실패와 음식점 매출 부진 등으로 가계사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자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수억 원대의 빚을 지고 폐업한 상태였다.
현재는 궁여지책으로, 남편은 택배 상하차 일을, 피해자인 아내는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가정경제를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보험을 6개나 가입해놓고, 매달 들어가는 보험금만 126만 원이라고? 이거 완전 제정신 아니네.”
황호범이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흔들고는 인서를 쳐다보았다.
“야, 막내. 피해자 사망보험금이 총 얼마라고?”
“6억 5천만 원이랍니다.”
“이건 뭐, 냄새가 나도 너무 진하게 난다. 강력사건 냄새가 말이야.”
“일단 의심은 가는 상황이죠.”
“의심은 무슨, 완전 빼박이구만.”
아직 정확한 조사결과가 나온 것도 아닌데 황호범이 단정적으로 내뱉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순 익사 사고를 주장하던 사람치고는 참으로 빠른 태세전환이었다.
“더구나 그 두 사람 재혼 부부라면서요? 각자 딸 하나씩 데리고 온.”
황호범이 박성진 형사를 향해 물었다.
“정식으로 부부가 된 지는 만 2년 조금 넘었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평범한 부부 사이였단다. 동네 주민들하고의 트러블도 전혀 없었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박성진 형사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이러니 사람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속속들이 까뒤집기 전에는 말이야.”
황호범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내가 연애를 안 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이유가 뭔데.”
“사람 무서워서요.”
“못 하는 건 아니고?”
박성진 형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안 하는 거라니까요. 하루가 멀다고 부부, 연인 사이에 살인사건, 폭력사건이 난무하니 어디 연애할 맛이 나겠습니까?”
과격하게 반응하는 황호범을 보면서 인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정이설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제 속도를 잃고 뛰었다.
“가게?”
황호범이 요란하게 눈을 끔벅였다.
“더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인서는 팀원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등 뒤로 황호범의 걸걸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래, 잘 가라. 우리 처지에 오늘처럼 때맞춰 퇴근하는 날이 자주 오겠냐? 할 수 있을 때 정시퇴근이란 걸 맘껏 즐겨라. 사건 하나 잘못 꼬이면 우리 팀장 서슬에 집밥이라곤 구경도 못 하게 될 테니까. 잠잘 시간은 있을까나 몰라.”
귓전으로 황호범이 들으라는 듯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구시렁대는 소리가 후렴구처럼 이어졌다. 인서는 그저 피식 웃었다.
경찰직에 입문하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일반 직장인처럼 근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조차 안 했다. 일주일도 부족해 열흘, 혹은 스무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든가, 예상치 못한 부상 따윈 운동선수였던 그의 일상에선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은퇴할 무렵까지는 늘 그랬으니까. 경찰이었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고. 그러므로 황호범의 저런 경고성 발언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더불어 인서는 선배 황호범이 못마땅해 마지않는 김모동 팀장의 수사방식을 좋아했다. 그는 작은 부분 하나까지 허투루 넘기지 않고 철저히 수사하는 동시에, 어떤 경우에든 피해자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수사방식이 이러니 초동수사 단계에서 엉뚱한 사람을 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우는 어지간해선 범하지 않았다. 경기도 내 강력범죄 검거율 1위라는 타이틀이 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신 선배 황호범의 말처럼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면 팀원들이 죽어 나가게 된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일반회사원들처럼 때맞춰 밥 먹고, 퇴근 시간 되면 제꺼덕 퇴근하는, 말 그대로 쉴 거 다 쉬면서 수사하는 태도로는 절대 범인을 검거할 수 없다는 게 김모동 팀장의 평소 지론이었기에 팀원들은 시시때때로 들볶여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실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휘하 팀원들에겐 대한민국 범인 검거는 혼자 다 하냐는 비아냥과 욕을 배 터지게 얻어먹어야 하는 수사지휘방식이었다.
선배 황호범의 말에 따르자면, 이번 익사 사건을 첫 사건으로 맡게 된 자신은 아주 운이 대박 난 경우라고 한다. 황호범 본인은 김모동 팀장 밑으로 들어와 맡게 된 첫 사건이 더럽게 꼬여버리는 바람에 CCTV를 천 대 이상 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엔 석 달 동안 두 번 들어갔다나 뭐라나. 그 바람에 가뭄에 콩 나듯 겨우 생긴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며 틈만 나면 투덜대기 일쑤였다.
* * *
정이설은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다.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아주 연한 베이지색이었는데, 시폰 소재의 치맛단이 걸을 때마다 무릎 언저리에서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인서의 눈길이 섬세한 얼굴선에서 우아한 목덜미로, 그다음엔 가는 허리와 유려하게 이어지는 종아리 선으로 차례차례 쏟아져 내렸다. 여름이 거의 다 지나도록 햇살은 구경도 못 했는지 겉으로 드러나는 살결이 마냥 눈부셨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매번 볼 때마다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른다. 발목은 또 왜 저렇게 가는 건지. 자꾸만 목이 탔다.
인서는 불현듯 치솟는 갈급증을 억누르며 시선을 다시 천천히 올렸다. 발걸음이 옮겨지는 속도에 맞춰 앙증맞은 무릎이 시폰 원피스 아래로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조금 더 시선을 올렸다. 세로로 셔링이 자잘하게 들어간 허리선과 그 주변으로 들꽃이 한 무더기 피어 있다. 노란색과 분홍색, 자주색 등을 다채롭게 뒤섞어가며.
하지만 인서는 안다. 들꽃 무더기가 한가득 인쇄되어 있는 시폰 원피스 자락을 걷어내고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오직 그에게만 허락되는 비밀스러운 습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달콤해서 한번 입을 대면 밤새도록이라도 빨아댈 수 있는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정이설을 안았더라?
생각해보니 벌써 열흘이 넘었다. 어떻게 그 오랜 기간 동안 참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선택권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인서가 이설을 안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계속되는 당직으로 그녀가 피곤할까 싶어서였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정이설은 인턴 생활 별거 아니라고, 자기가 체력 하나는 끝내준다고 틈날 때마다 강조하지만, 쪽잠을 자면서 당직을 서는 일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가를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당직이 아닌 날이라고 딱히 편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지난달엔 응급실 근무였는데, 인서의 기억으로는 그때가 처음 인턴 생활을 시작한 3월과 더불어 정이설을 가장 피곤하게 만들었던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