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서너 잔 정도는 상관없어. 딱히 취할 일도 없고.”
“그래도.”
“나 때문에 하는 회식인데 취향 아니라며 빼는 건 좀 아니지. 술을 아예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오오, 우리 백인서 형사님 사회생활 좀 할 줄 아시는데?”
정이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른쪽 볼 위로 조그맣게 볼우물이 파인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볼우물이었다.
처음 저 볼우물을 발견했던 날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에게 차갑게 철벽을 치며 접근을 허락하지 않던 정이설이었기에 인서는 그저 멍했다. 체육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학교 운동장에 서서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도 있는 거구나. 되게 예쁘네.」
겨우 정신을 차린 건 같은 태권도부원이자 친구인 주호영이 뭘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냐며 뒤통수를 가격한 직후였다. 이 자식이. 반격을 위해 재빨리 주먹을 치켜들었을 때 주호영은 이미 저 멀리 도망간 뒤였다.
“……어, 진짜 가야겠다.”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정이설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작년 생일에 그가 선물로 사준 시계였다.
“벌써 11시야. 너도 이제 한숨 자야지.”
“하루 정도 안 잔다고 어떻게 안 돼.”
“그렇지만 네 동료들은 지금 당직실에서 쪽잠 자고 있다며.”
“괜찮대도?”
“내가 미안해서 안 되겠어.”
단번에 등을 돌리기는 아쉬워서 뒷걸음질 쳤다. 서너 발자국 정도를.
“알았어. 조심해서 가.”
오른쪽 볼에 여전히 사람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볼우물을 담고서 정이설이 손을 흔들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들 사이사이로 은색 달빛이 경쟁하듯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 제 손가락을 단단히 감아 손깍지를 끼고 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다.
“어, 너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겨우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더 내딛다가 영 아쉬워 뒤를 돌아보았다. 정이설은 같은 자리였다. 한 번 더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이설이 곧바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비슷한 패턴의 행동이 서너 번이나 더 반복되고 난 후에야 정이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 같이 살고 싶다, 정이설하고.
텅 빈 허공에 대고 간절한 바람을 담아 중얼거려보았다. 기울어가는 여름 밤하늘이 그런 그를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다. 되지도 않는 생각 말고 정신 좀 차리라는 듯이. 별 효과는 없다. 정신이 돌아오기는커녕 총총하게 빛나는 별 무리 속으로 상냥하기 그지없는 정이설의 총천연색 눈동자와 귀하디귀한 볼우물만 두서없이 얼굴을 쏙 내민다.
* * *
아침부터 익사 사건 처리로 사무실이 시끌시끌했다.
“용천사 계곡이 원래 이맘때쯤이면 익사 사고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올여름만 해도 벌써 세 건이나 발생했고요. 그러니까 흉흉한 괴담도 생겨나는 거 아닙니까. 어떤 젊은 여자가 거기 계곡에서 빠져 죽은 다음에 물놀이 온 사람들을 차례차례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거라고요.”
익사자 남편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아낸 황호범이 김모동 팀장에게 말했다.
“이 자식이 최첨단 21세기에 무슨 괴담 같은 얘길 하고 있어.”
“아, 진짜라니까요? 재작년에 그것 때문에 굿도 했잖아요.”
“인마 그거야 여름만 되면 하도 익사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답답한 마음에 그런 일 발생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한 거지, 설마 진짜 괴담 같은 걸 믿어서 그랬겠냐?”
“그거나 그거나요.”
황호범이 두툼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어쨌든 제가 보기에 진술서 상으로는 별 큰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어디 이리 줘봐.”
김모동 팀장이 황호범으로부터 진술서를 낚아채듯 빼앗아갔다.
“휴가를 일주일이나 갔다고?”
미간을 좁히며 진술서를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가던 김모동 팀장이 고개를 들고 황호범을 쳐다보았다.
“예, 왜요?”
“누가 인마 계곡에서 일주일씩이나 야영을 해. 길어야 대부분 사나흘이지.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생각 안 드냐?”
“원래 4일 예정이었는데, 있다 보니까 재밌어서 3일 더 연장했다잖아요.”
“일주일 동안 둘이서 뭘 하고 있었다는데.”
“다슬기 잡았다는데요?”
황호범이 눈을 끔벅였다.
“사건 당일 밤에도 둘이 그러고 있었고?”
“예. 거기가 팀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용천사 계곡 중에서도 익사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지점이잖아요. 유속도 빠르고 강바닥도 진흙인 데다 들쭉날쭉해서, 정신 안 차리면 빠져 죽기 십상이라니까요? 몇 년 전에도 수영강사 한 명이 물살에 휩쓸려서 그대로 익사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런데 일반 가정주부야 말해 뭐합니까. 발 헛디뎌서 물에 빠지면 그거로 끝이지. 더군다나 불빛도 별로 없는 시꺼먼 밤인데.”
황호범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내가 물에 빠지는 동안 남편은 뭐 하고 있었고.”
“물놀이에 지쳐서 한잠 자고 나왔다는데요? 근데 아내가 보이지 않아 불길한 생각이 들어 강 쪽을 봤더니 물에 둥둥 떠 있었답니다. 튜브 끈이 손에 매달린 상태로요. 남편 말로는 다슬기를 잡으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내가 다슬기 잡는 모습을 촬영한 휴대폰 동영상도 있고요.”
“야, 황호범. 너 익사 사건 처음이냐?”
김모동 팀장이 황호범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왜요?”
“이 진술에서 이상한 점 못 느꼈냐고.”
“뭐가요? 난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익사 사고 같은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호범이 팀장을 쳐다보았다.
“인마, 상식적으로 익사체가 어떻게 바로 물에 뜨냐!”
김모동 팀장이 미간을 와락 구기고 있다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복장이 터져도 한참 터지는 얼굴이었다.
“사망한 즉시 물에 뜨는 사체는 없어. 최소 이틀이나 사흘 정도 지나서 시체가 슬슬 부패가 시작될 때가 돼서야 물 위로 뜨는 거야. 근데 당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한 시간도 채 안 지났는데 물에 둥둥 떠올라서 곧바로 건져냈다고? 이게 도대체 말이야 방귀야. 그리고 손목에 튜브 끈도 있었다며.”
“그건 또 왜요.”
“너 머리라는 게 있음 생각해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면 하다못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인지상정인데 손목에 튜브 끈이 매달려 있었다며. 그럼 죽을힘을 다해 튜브를 붙잡았을 거 아냐. 맥없이 고대로 빠져 죽을 게 아니라. 너 같음 안 그렇게 하겠어?”
“그렇긴 하네요. 아니, 누가 봐도 그렇게 해야 말이 맞는 거지. 맥없이 빠져 죽을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도 아니고 겨우 수심 2미터밖에 안 되는 계곡물인데.”
황호범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중얼 제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바라보는 팀장은 그저 한심하고 또 한심할 뿐이다.
“게다가 밤이었다며.”
“……예, 사망 추정시간이 20시 40분 정도랍니다.”
황호범의 목소리가 점점 자신감을 잃고 기어들어 갔다.
“너 시골 안 살아봤어? 고향이 연천군 장남면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깡촌 아니냐고. 그럼 일몰 후 인가 없는 계곡 근처가 얼마나 깜깜한지도 잘 알 것 아냐.”
“두말하면 잔소리죠.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주위가 온통 새까매서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도시랑은 환경 자체가 아예 다르니까요.”
“근데 물에 둥둥 떠 있는 아내를 순식간에 발견했어? 초능력자냐? 사망자는 희끄무레하게라도 식별 가능한 흰색이 아니라, 위고 아래고 죄다 짙은 색 옷을 착용한 상태인데 말이야. 그뿐이야? 유속이 빠른 계곡 상류인데 발견지점이 바로 텐트 코앞이라고 진술했다며.”
“……그런데요?”
황호범의 목소리는 이제 기어들어 가다 못해 아예 모깃소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작아졌다. 퉁방울눈 또한 김모동 팀장을 제대로 쳐다보는 대신 제자리를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찾아 헤맨 시간이 최소 10분에서 20분이라고 치자. 그럼 네 생각에 사체의 위치가 어디쯤일 것 같냐.”
“그게…… 물이 흐르는 데다 유속이 빠르고 하니까 아무리 못해도…….”
머뭇머뭇 대답을 하려다가 황호범이 슬쩍 김모동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론상으로라면 하류 쪽으로 한참 더 떠내려갔어야 옳지 않을까요?”
“이제야 짱구가 좀 돌아가냐? 그리고 인마 첨언하자면, 다슬기는 깊은 물에 안 살아. 보통 수심이 낮은 곳에 산다고. 그 말인즉슨, 사망자가 그렇게 수심이 깊은 곳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거지. 백번 양보해서 수심이 2미터나 되는 곳에 다슬기가 드글드글 떼로 살고 있다 치자. 전문적인 다슬기 채취꾼도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새까만 밤에 잘 보이지도 않는 걸 무슨 수로 어떻게 잡냐.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말이 안 되는 소리만 진술이랍시고 씨불여놓고 갔는데 넌 그걸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믿었다 이 말이지, 응?”
김모동 팀장의 다그침에 황호범은 이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