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
뜻 모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모로 살짝 기울이고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새삼 청순하니 예뻤다.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건네야 하는데 심장만 대책 없이 쿵쿵 뛰어댔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건만 이 정도면 진심 중증이다. 헤어나올 수가 없다. 너무 좋아서.
선배 황호범은 짐작이나 했을까. 왜 도암서로 자원했냐는 질문에, 가능하면 가까운 데 있고 싶어서 그랬다는 그의 대답이 사실은 지금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정이설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는 걸.
“많이 기다렸지?”
다정히 저를 응시하는 헤이즐 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심장 한가운데가 곧장 반응을 보인다.
“그렇지 뭐.”
인서는 멋쩍게 웃었다. 항상 그랬다. 남들에겐 냉정하게 비칠 만큼 건조한 성격이 정이설 앞에만 서면 나사 하나 빠진 듯 몽글몽글하게 풀어졌다. 꼭 지금처럼.
“진짜 미안. 내가 방금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
“아니야. 무작정 보고 싶다고 찾아온 내가 더 미안하지 네가 뭘 미안하냐?”
“그래도.”
정이설이 동그랗게 잘빠진 크록스 앞코로 보도블록 경계석을 톡톡 건드렸다. 인턴 시작할 무렵 그가 선물했던 파란색 크록스였다. 분홍색 꽃 두 송이가 신발 양쪽에 나란히 포인트로 장식되어 있는.
“지금은 안 바빠?”
“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우리 과는 보통 밤 11시 넘으면 한가한 편이야. 평일 밤엔 대부분 그렇더라고. 거짓말처럼 콜이 뚝 끊어지거든. 처음엔 믿어지지 않았잖아. 동료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서 계속 왜 콜이 안 오지? 설마 우리 잘 수 있는 건가? 당직실 침대에 사이좋게 드러누운 상태로 우리끼리 농담도 주고받았잖아. 환자들이 인턴 불쌍해서 단체로 쉬게 해주자는 약속이라도 한 거 아니냐고. 덕분에 이 시간대면 앞다퉈 당직실에서 쪽잠 자는 게 일과야. 안 그랬다간 날밤 꼴딱 샐 수 있거든. 물론 언제 콜이 들어올지 몰라 불안한 감이 없진 않지만.”
“매일 그러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
인서는 무심코 손을 들어 정이설의 머리며 어깨 등을 쓰다듬어주려다 꾹 참았다. 여긴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공공장소였고, 무엇보다 정이설의 첫 번째 직장이었다. 내킨다고 스스럼없이 만지는 행동을 하는 건 절대 금물이었다. 비록 흉곽은 물색없이 부풀어 오르고, 입술은 키스하고 싶은 욕구로 절박하게 타올랐지만.
“인턴 생활이 원래 다 그래. 자고 싶은 거 다 잘 만큼 한가하면 그게 인턴인가? 우스갯소리도 있잖아. 한숨 못 자고 날밤을 꼴딱 새울 만큼 바쁜 인턴도 드물지만, 그렇다고 대여섯 시간씩 푹 잘 수 있는 인턴은 더더욱 드물다고. 근데도 선배들은 툭하면 우리한테 이렇게 말한다?”
“뭐라고?”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라고.”
“왜?”
“레지던트 1년 차 되면 그런 엄살도 끝이라나 뭐라나. 진정한 헬 게이트는 그때부터 열리는 거래.”
정이설이 작게 웃었다. 입술 끄트머리만 살짝 끌어올린 채.
인서는 저를 향해 우아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붉고 도톰한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주변 공기가 급격히 달아올랐다.
예전엔 저 미소를 마주하면 언제고 정신을 못 차렸었다. 넋이 나간다는 말을 수시로 체감하던 때였으니까. 스물일곱이 된 지금이라고 딱히 사정이 나아진 것 같지도 않지만.
급히 화제를 바꿨다.
“저녁은 먹었어? 지난번엔 하도 바빠서 몇 숟가락 떠먹지도 못했다며.”
“아아 그때? 알고 보니 급한 콜도 아니었더라고. 오늘은 원 없이 먹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이설의 미소가 한층 더 커졌다. 그 바람에 동그랗고 넓은 이마 아래 자리한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웃음기가 함초롬하게 번져나갔고, 단정한 입술 사이로는 새하얀 앞니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심장이 곧바로 펄떡대며 반응을 보이더니 단전 부위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뻐근해졌다. 공공장소고 뭐고 그대로 입술을 내려 함빡 베어 물고 싶을 만큼 예쁜 미소였다.
“뭐 먹었는데?”
불순한 속내를 힘겹게 욱여넣으며 최대한 일상적인 톤으로 물었다.
“불고기랑 과일 샐러드.”
“맛있었나 보네?”
“어, 완전. 식판이 다 드러날 정도로 싹싹 비웠어.”
“진짜?”
인서는 대견하다는 듯 정이설을 내려다보았다.
“안 믿기지? 근데 사실이야. 나 인턴 시작하고부터 먹성 엄청나게 좋아졌잖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거 있지. 이러다 뚱뚱해질까 봐 걱정이야.”
“설마.”
“우는소리 아니라고. 고기든 뭐든 태어나서 올해처럼 많이 먹기는 처음이란 말이야.”
예쁜 입술 사이로 종알종알 흘러나오는 푸념을 들으면서 인서는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오뚜기처럼 전신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정이설을. 역시나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랬던 정이설을 언제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가 알고 있는 정이설은 항상 가냘팠다. 그러면서도 제법 강단은 있어서 함부로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그랬다.
“넌 어때? 오늘이 강력팀 정식 첫 출근이었잖아. 힘든 점은 없었어?”
정이설이 묻는다. 별빛과 달빛을 한데 버무려놓은 듯 오묘하고 말간 눈빛으로. 새까만 동공 주변에 총천연색으로 확장되어 있는 작고 아름다운 우주를 보고 있노라니 천지 분간 못 하는 심장이 또 움찔댄다. 아랫도리 역시 상황 파악 못 하고 단단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정이설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가 지금 얼마나 저질스러운 상태인지를.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팀원들 소개받고 다 같이 모여서 회식한 게 전부라.”
목을 가다듬고 간신히 대답했다. 어쨌거나 대답은 해야 했으므로.
“팀원들은 괜찮아?”
“어, 다들 좋아.”
순간적으로 선배 황호범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치게 말이 많은 데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툴툴대는 구석은 있었지만, 딱히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면 된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전혀 없다.
“다행이다. 내가 일해보니까 업무도 업무지만 사람과의 불화가 제일 힘들더라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정이설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어느 집단에나 맞춰주기 힘든 사람 한둘쯤은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어. 신경 쓰지 마.”
“네가 그렇다면야 뭐.”
인서는 빙그레 웃었다. 정이설이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다. 너무 깊게 파고들면 안 된다. 섣불리 그랬다간 정이설이 애써 쓰고 있는 저 아슬아슬한 가면이 조각조각 깨져버릴 테니까.
“내일은 당직 끝나는 날이라 피곤해서 안 될 테고, 금요일 어때?”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이설을 내려다보았다.
“금요일?”
잠깐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정수리만 새까맣게 보이던 정이설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도 정확히 그려낼 수 있는 섬세한 이목구비가 동공 속으로 콕콕 박혀 들었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워낙 덩치 차이가 큰 폭으로 있는지라 근거리에선 이렇게 상체를 숙여주지 않으면 정이설의 예쁜 이목구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조급증이 몸집을 부풀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스치듯 만나는 거로는 영 성에 차지 않았다. 더 오래, 더 은밀히 정이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사랑스러운 외피까지 속속들이 안을 수 있도록.
“간만에 우리집 올래?”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럴까?”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쉽게 승낙한다고?”
“그럼 안 돼?”
“너랑 할 거라서.”
“어?”
“못 들었어? 너랑 할 거라고.”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에 대고 짐승처럼 덧붙였다.
“음…… 그러면 나야 더 좋고.”
물기가 배인 함초롬한 이목구비나 평소의 고고한 분위기만 보면 섹스는커녕 손가락조차 대지 못하게 할 것 같은데 정이설은 대답도 참 쿨하게 했다. 내숭 따윈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조명을 환하게 밝힌 침대 위에서 다리가 잔뜩 벌어진 채 아래를 빨릴 때는 못내 부끄러워했다. 때론 양 볼을 만개한 벚꽃색으로 물들이고서 제발 그렇게 자세히 보지 말아달라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할 수도 있는데?”
짐승은 한층 더 뻔뻔해졌다. 멀쩡한 사회인으로서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정이설에게 좆을 깊숙이 박아넣은 채 정신없이 입술을 물고 빠는 중이었으므로.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네?”
새침하게 되받아치는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더 붉고 도톰해 보였다.
미치겠네.
인서는 가까이 다가서는 대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 그랬다간 공공장소고 뭐고 정이설을 그대로 덮칠 것만 같아서.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갈게.”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차는?”
정이설이 주차장 쪽을 쳐다보았다. 제 불순한 속내는 감히 짐작도 못 하고 병동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이 사뭇 청아하기만 했다.
“걸어왔어.”
“왜?”
“오늘 회식했잖아. 소주 몇 잔 마셨거든.”
대답을 들은 정이설의 눈이 동그래진다.
“너 술 별로 안 좋아하잖아. 특히 소주는 더. 근데 몇 잔씩이나 마셨다고?”
“어쩔 수 없었어.”
“못 마시는 척 거절하지. 요즘은 억지로 권하는 분위기도 아니잖아. 혹시라도 그랬다간 후배들한테 진상 취급받기 딱 좋아. 솔직히 바람직한 매너도 아니고.”
정이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큰 눈엔 걱정이 담뿍 배이고 입술은 아래로 처졌다. 그게 뭐라고 인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기분마저 우쭐해졌다. 어린아이도 비웃고 갈 유치한 반응이긴 한데, 정이설에게서 이런 눈빛을 받고 있으면 도리가 없다. 그녀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로만 쏠리는 지금 상황이 퍽 만족스러웠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