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너 말이야. 형사가 멋있는 거 같지? 가죽점퍼 근사하게 빼입고 범죄자 새끼들 막 잡아다가 조지니까 그럴싸하잖아. 안 그래?”
단숨에 소주잔을 비운 황호범이 인서에게 툭 내뱉었다.
“그럴 리가요. 강력계 형사에 대한 환상 같은 거 전혀 없습니다.”
“진짜? 요만큼도?”
“네, 추호도 없습니다.”
“근데 왜 형사과에 지원했냐? 요즘 젊은 공채 순경들 사이에선 기피 대상 1호라던데?”
황호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원래 시류에 잘 편승 안 하는 성격이라서요.”
인서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호범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바로 돈 십 원어치도 안 되는 객기라는 거야. 생각해봐. 뺑이 겁나게 쳐도 승진 잘 안 돼, 툭하면 집에 못 들어가. 그래서 유부남은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고, 총각은 애인한테 걷어차이는 게 현실이야. 더 재수 없음 현장에서 칼빵 맞기 일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하겠다고?”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돌아보는 눈동자가 참으로 담백했다. 적어도 겉치레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유야 차고 넘쳤지. 일단 백 형사 넌 돈이 많잖아. 올림픽 2연패에다 세계선수권 4연패면 포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 아냐. 그뿐인가? 올림픽 끝나고 광고도 여러 편 찍었지? 그럼 이런 일 안 해도 먹고사는 덴 아무 지장 없을 거 아냐. 하다못해 태권도 코치를 해도 되고. 너 정도면 오라는 데 천지일 것 같은데.”
“옳은 일이니까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인서가 황호범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군더더기라곤 일체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어?”
“선배님은 아니었습니까?”
“나, 나야 뭐.”
도리어 말문이 막혀버린 황호범이 얼빠진 표정으로 우물쭈물 말을 더듬었다.
“야, 막내. 쟤한텐 그런 거창한 포부 같은 거 없어.”
팀장과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박성진 형사가 툭 끼어들었다.
“쟤야말로 폼 좀 난다 싶으니까 형사과에 지원한 장본인이거든. 뭐라 그랬더라? 자기 롤 모델이 영화 베테랑에 나오는 황정민이라고 했던가? 얼마나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던지.”
“에이, 선배님도.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이제 와서 다 늦게 썰을 풀고 그러십니까.”
황호범이 미간을 표나게 구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술이 당긴다며 제 손으로 직접 소주잔에 소주를 콸콸 붓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매번 본전도 못 찾을 말을 꺼내서 화를 자초하냐, 자초하길.”
박성진 형사가 말끝으로 피식 웃었다.
* * *
콜이 들어오자 이설은 책을 덮었다. 인턴시험을 위해 보고 있는 책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레지던트 1년 차 선배는 친히 그녀에게 기출문제집 ‘6회독’을 강력히 추천했다. 그렇게 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기출문제집을 6회독씩이나.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머릿속으로 물음표만 동동 떠다녔다.
다행히 인턴시험은 의사 국가고시처럼 기출문제 자체가 많지 않아 1회독을 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요구하진 않았다. 이설의 경우엔 레지던트 전공과를 일찌감치 정해둔 덕분에 6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한 덕도 조금은 있었고. 느지막이 시작하는 동기들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시작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다들 오며 가며 한마디씩 했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시험공부냐고.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의대 특성상 그녀의 주변엔 공부에 관해서라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애들이 화장실도 안 가고 겨우 서너 시간만 자면서 숨도 안 쉬고 공부를 해댔다. 불행하게도 이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노력한 만큼 얻어내는 스타일로, 타고난 수재나 영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업량이 많지 않은 중학교 때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인턴시험에서 떨어지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첫 번째 수능에서 한 차례 거하게 말아먹는 바람에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남들이 뭐라건 틈날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그나마 지금은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여유라는 게 나름 생겼으니까. 8월 들어 배정받은 과가 널널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처음 인턴 생활을 시작했던 3월 초엔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prn 처방이나 지침약 처방이 뭔지 몰라 헤매는 건 다반사에, abga(동맥혈가스검사)도 30분씩이나 걸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abga를 군소리 없이 하루에 열서너 개씩 해냈으니 다시금 곱씹어봐도 위대한 인간 승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바늘과 관을 넣어 복수를 제거하는 복수 천자는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는 해본 적도 없는 술기였는데, 하필 인턴 생활을 시작하던 첫날 실시하게 됐다. B형간염을 앓고 있는 환자가 대상이었다.
손은 덜덜 떨리고, 숨소리는 마냥 쌕쌕거리는 것이, 마치 기도가 막힌 사람처럼 호흡 조절이 안 됐었다. 손바닥에 땀은 또 어찌나 배어 나오던지. 수능 1교시 때의 악몽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리 서른여섯 시간 동안 근무를 했다. 잠은 몇 시간이나 잤더라? 다섯 시간은 잤으려나?
이설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피식 웃으면서 당직실을 나섰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머리는 깨질 것 같았고,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느라 근육이 뭉친 어깨와 종아리는 뻐근했다. 팔을 뻗어 단단히 뭉친 어깨 부위를 꾹꾹 눌러주었다. 조금 낫다. 허리를 구부리고 뻣뻣해진 종아리 부위도 야무지게 주물러주었다.
이런 건 백인서가 참 잘하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수면 부족과 피로는 이제 일상이 됐다. 그 와중에 틈틈이 시험공부까지.
유일한 일탈이 있다면 백인서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땐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그에게만 몰두했다. 애틋한 눈빛 교환이며, 서로를 탐하는 행동까지 전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질식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복도를 걸으며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병동 건물을 환히 비춰주고 있는 유리창 위로 백인서의 얼굴이 겹쳐서 보인다.
오늘이 경찰서 첫 출근인데 잘했으려나 모르겠네.
무심코 생각하다 이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잘했을 거다. 그녀가 익히 보아온 백인서는 뭘 하든 잘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성격이니까.
연달아 울리는 콜을 모두 처리하고 드디어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백인서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심전심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안 그래도 첫날 근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던 참이다.
「바빠?」
백인서는 본인 성격답게 문자도 참 담백하고 간결하다.
「조금. 넌 어디야? 집?」
이설은 문자를 보내면서 휴대폰 액정 상단을 쳐다보았다. 밤 9시 50분이었다.
「환영회 겸 회식 중.」
「그럼 늦게 끝나겠네?」
「나야 모르지.」
휴대폰 너머로 백인서가 빙그레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
「오늘 회식 끝나고 잠깐 보러 갈까?」
백인서가 물었다. 안 된다고 하면 분명 실망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글쎄…… 11시 넘으면 다른 때보다 덜 바쁘기는 한데, 그래도 언제 짬이 날지 몰라서. 마냥 기다리라고는 할 수 없잖아.」
「요즘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져서 괜찮아.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있지 뭐.」
「진짜 괜찮겠어?」
「너를 못 보는 게 나한텐 더 안 괜찮아.」
「그럼…… 와줘.」
마지막 문자를 입력하는데 가슴 한편이 설핏 떨렸다. 백인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항상 이렇다. 15년이나 알고 지낸 사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 * *
회식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황호범은 얼마 만에 가지는 귀한 회식 자리인데 이대로 헤어지는 거냐며 징징댔다.
「야, 야. 요즘 젊은 애들 2차니 3차니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우리 때 같은 줄 아냐? 딱 1차로 끝내는 게 서로 깔끔하고 편해.」
그런 말을 하며 안 가려고 버티는 황호범을 데리고 나가준 건 박성진 형사였다. 인서에겐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제법 시원해진 밤공기를 벗 삼아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병원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도 그에 비례해서 높아진다.
인서는 멈춰서서 볼을 한번 쓱 문질렀다. 얼굴 전체로 열이 뜨끈하게 올라왔다. 몇 잔 마신 술기운 때문은 아니다. 평소와 다르게 커다란 몸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부산스럽게 뛰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정이설이 당직을 서고 있다는 병동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두근거림이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문자를 보낸 다음, 잎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는 조경수 아래 서서 언제 나올지도 모를 정이설을 기다렸다.
별 되게 많네.
이팝나무 꽃처럼 하얗게 무리 지어 있는 별들을 보며 무심코 중얼거리는데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발소리도 없이 어느새 정이설이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 입술이 닿을 거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