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해봐라. 나한텐 중요한 문제거든.」
백인서가 말끝으로 피식 웃었다. 이설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그만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알았어. 내가 긍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고민해 볼게.”
「약속한 거다?」
“어, 약속.”
「그럼 얼른 들어가. 밖에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아무리 그늘이라도 한여름 낮엔 별로 안 좋아.」
“……응.”
이설은 마지못해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전화를 끊으면 또 한 달 동안 백인서의 목소릴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없던 기운도 쭉 빠지는 느낌이다.
누가 봐도 축 처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여러 동으로 나뉘어 있는 기숙학원 건물이 눈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이설은 그중에서 여학생 기숙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이를 보이며 텅 빈 복도가 따끈해진 몸을 향해 서늘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무사히 잘 다녀왔느냐고. 이제 공부할 준비는 되어 있느냐고. 우습게도 끄덕끄덕 고개까지 움직이며 긴 복도를 걸어가다 문득 생각이 났다.
강라희는 도착했을까? 아침 먹고 출발한다고 했는데.
같은 경기도권이어서 편도 1시간 정도 걸리는 이설과 달리 강라희는 경남 양산이 본가라 차가 안 막혀도 기본 4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주말 끝물에는 항상 차가 밀린다고 했는데.
역시나 기숙사 방문을 열었을 때 강라희가 돌아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쯤이야?」
궁금해서 문자를 보냈다.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득달같이 답장이 왔다.
「여기 영동고속도로 여주 JC 부근인데 차 겁나 막힘. 아주 상습정체 구간이야.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어. 넌?」
「난 방금 도착했어.」
「완전 부럽다. 나중에 인서울 의대 성공하면 KTX나 비행기 타고 다닐 거임. 올 때마다 개짜증 나.」
왜 안 그렇겠는가. 한 번 오고 갈 때마다 한나절을 다 소비해야 하는데.
조심해서 오라는 문자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반납했다. 더 있다가 반납해도 상관은 없지만, 딱히 그럴 필요성을 찾지 못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어 봐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기르는 고양이나 강아지 영상만 주야장천 들여다보고 있을 게 뻔했다. 눈에는 하트를 그려 넣은 채 ‘귀엽다, 귀여워.’를 연발하면서. 그렇다고 반려동물을 기를 처지도 못 되는데. 이설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수학 교재를 펼쳐 들었다.
* * *
그해 11월은 유독 포근했다. 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포근함이었다. 백인서는 그게 모두 정이설을 위한 전 우주의 지극한 배려라고 했다. 암말 없이 픽 웃었다. 제발 그런 이유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자 백인서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시험장 앞에서 기다려도 되냐고.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내려다보는 눈빛이 더없이 다정하고 깊어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았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다른 누구보다 백인서의 응원을 받고 싶은 바람도 있었고.
수능시험 당일 역시 봄처럼 따뜻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설은 저보다 훨씬 더 긴장한 티가 역력한 아빠의 차를 타고 시험장으로 갔다. 손에는 엄마가 아침부터 준비해준 도시락을 얌전하게 들고.
교문 앞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들어가려는 수험생과 그들을 응원하러 나온 각 학교의 재학생들은 물론, 함께 나온 수험생 부모와 지인들로 인해 흡사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아빤 교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경직된 얼굴을 풀지 않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아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가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얼굴 표정만은 꼭 격전지에 뛰어드는 선봉장 같아서 이설은 그게 독설을 퍼붓는 것보다 한층 더 신경이 쓰였다.
백인서는 교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서 있다가 아빠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이설에게로 걸어왔다. 언젠가 여름날처럼 검은색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서.
그는 이설의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견고한 시선으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겨우 한마디 했다. ‘내일 밥 사줄게, 만나자.’라고.
그게 두 번째 수능시험을 치르던 날 백인서가 정이설에게 건넨 말의 전부였다. 힘내라거나, 잘 볼 수 있을 거야, 같은 응원의 말은 전혀 없었다. 조금 싱겁기도 해서, 기껏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냐고 했더니 백인서는 담담히 웃기만 했다.
눈빛을 서너 번 교환한 후에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열 걸음 정도 걸어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백인서는 여전히 같은 자리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머리 하나는 훌쩍 더 큰 키로.
시험 결과는 대박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첫 번째 수능 때처럼 엉망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설은 시험 당일 저녁, 안광이 시퍼런 아빠를 앞에 두고 가채점을 하면서 숨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첫 수능을 망치게 만들었던 수학에서 만점을 받아 모처럼 아빠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는 진귀한 광경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수학이 상대적으로 쉬워 표준점수가 낮았던 데다, 다른 과목에서 전부 한두 개씩 틀리는 바람에 아빠가 원하는 서울대 의대는 고사하고, 다른 메이저 의대마저 간당간당한 점수였다.
이설은 주변의 의견을 겸손하게 수렴한 후 도암대 의대를 선택했다. 메이저 의대까지는 못 되더라도 나름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의대였기에 아빠는 절반의 만족감을 드러냈고, 할아버지는 두어 번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세뱃돈으로 5백만 원을 건넸다. 사촌 정유주가 받았던 세뱃돈의 정확히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설날이라고 한자리에 모인 가족과 친척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평소 이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할머니는 그것도 많다 하셨고, 엄만 늘 그렇듯 별다른 내색을 안 했으며, 아빤 할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보이지 않게 미간을 구겼다.
작은집 식구들은 어땠는가 하면, 작은엄만 우아하게 감춘 표정 뒤로 드러나지 않게 흡족해했으며, 작은아빠와 유주는 할아버지의 노골적인 차별에 진심으로 당황스러워했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작은아빤 그다음 날 이설의 계좌로 대학입학선물이라며 작은엄마 몰래 거금 천만 원을 입금해주셨다. 꼭 필요할 때 쓰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이설은 스물한 살을 맞았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경계에 있다가 정말로 어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맞이한 새해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삐걱대는 부분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아빠의 눈꼬리가 표나게 휘어지는 진귀한 광경도 목격했고,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엄마의 눈동자에 잠시나마 행복감이 깃드는 걸 지켜보았으므로.
무엇보다 그녀의 곁엔 백인서가 있었다. 사적으로 더없이 친밀한 관계가 되어버린. 이설에겐 그게 가장 큰 새해 선물이었다.
명절을 무사히 보내고 할아버지 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입학식까진 시간이 있는데 백인서랑 뭐 하지? 영화 볼까? 아님,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1박 2일 여행이라도 가자고 해볼까?
여행지는 어디가 좋지? 동해안? 제주도? 좀 더 인심 써서 일본도 괜찮지 않을까? 동남아는? 유럽은 당연히 무리겠지?
돈도 돈이지만 엄마가 허락해주시려나 몰라. 아빤 아마도 말을 꺼내기 무섭게 펄쩍 뛸 게 틀림없어. 보나마나 이렇게 말하겠지? 고작 스물한 살 주제에 겁도 없이 무슨 1박 2일 여행이냐고. 대학생이면 뭐든 허락되는 나이인 줄 아냐고. 그러면서 덧붙일 거야. 헛바람 들지 말고 얌전히 공부할 생각이나 하라고.
뭐, 그래도 상관없어. 백인서가 있으니까.
모처럼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는 새해 분위기 속에서 이설은 홀로 달콤한 꿈을 꾸었더랬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백인서와의 미래에 대해.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되어 그려보는 미래는 꽤나 바람직한 이미지들을 선사해주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고, 가능성 있는 바람이라면 어떻게든 이루고 싶을 만큼 간절한 이미지들의 집합체라고나 할까.
음…… 정말로 원하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면 되지 않을까? 못할 것도 없잖아. 백인서가 함께 있는데.
옆에서 오빠가 흘끗거리는 줄도 모르고 이설은 살포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했다. 이제 갓 스물한 살을 맞이한 이설의 미래는 그토록 달콤했다. 꼭 입안에서 살살 녹아 없어지는 밀크초콜릿 같았다.
7장. 마른기침
경찰청은 지난 11일, 올해 경찰 무도 요원 특별채용시험 최종합격자를 발표했다. 최종합격자는 50명으로 종목별 합격자는 태권도 25명, 유도 10명, 복싱, 레슬링, 검도 각 5명이다.
그동안 무도 특채시험은 형평성 논란과 특혜 시비로 그 유지에 있어 당위성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경찰 일선 현장에서의 ‘연약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경찰청은 2015년 “조직폭력·강력사범 검거 등 강인하고 당당한 공권력 집행으로 현장 경찰관의 사건 대응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달리스트를 경찰관(순경)으로 특별 채용한다.”며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순경으로 특별채용할 뜻을 밝혔다.
이에 따른 후속 조치로 경찰청은 사상 최대 규모의 무도 특채 채용 공고를 내고 강력범죄 등에 투입될 경찰 모집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