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런 게 섹스였구나.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그 생각만은 머릿속으로 선명했다.
축 늘어져 있는 정이설의 볼을 잡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잔뜩 흐무러진 동공과 열기에 잠식된 볼,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 모르는 도톰한 입술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정이설도 자신과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음을.
심장이 곧장 반응했다. 인서는 어깨를 숙이고 정이설의 입술에 키스했다. 깊게는 아니었다. 달래주듯 혀로 슬쩍 문지른 다음 가만히 물었다가 놓아주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사정의 여파로 잔뜩 뭉쳐 있던 몸의 근육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다시 입술을 맞물렸다. 이번엔 조금 더 깊게 키스했다. 입술을 열고 혀를 집어넣은 다음 척척한 소리가 나도록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으으응.”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도 정이설은 착실하게 달아올랐다. 내벽에 파묻혀 있는 성기가 움찔거릴 정도로 점점 빠듯하게 조이는 걸 보니. 숨이 채 죽지 않은 좆이 그에 부응이라도 하듯 또다시 꺼떡대기 시작했다.
인서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의 입술과 정이설의 입술 사이로 은색 타액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습관처럼 혀를 내밀어 빨아들이고는 성기에서 콘돔을 빼냈다.
새 콘돔을 씌우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이설이 달뜬 얼굴로 눈을 맞춰온다. 커다란 눈동자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동그란 턱 아래로 유독 선이 가늘고 우아한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 아래로는 섬세한 빗장뼈와 새하얀 젖가슴이, 더 아래엔 납작한 배와 앙증맞은 배꼽이 보였다. 그리고…….
인서는 낮게 숨을 토해냈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정이설은 다리를 오므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까지 저를 품었던 질구가 희멀건 액체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불현듯 목이 타면서 극심한 갈증이 몰려왔다. 손을 내려 꺼떡대는 자지를 그러쥐었다. 엄지로 요도 구멍을 지그시 문지르자 저릿한 쾌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또 해도 되지?”
상체를 낮추며 물었다. 정이설은 거부하지 않았다. 동공이 흐무러진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응시하며 그대로 삽입했다.
“흐윽!”
밭은 신음이 예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여러 번 박아댔건만 정이설은 지독히도 뻑뻑했다. 질액으로 내부가 흠뻑 젖은 상태여도 그랬다. 인서는 이마에 굵은 힘줄을 세우고 느릿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쫀득하게 달라붙는 내벽의 감촉이 그럴 수 없이 좋았다. 최대한 음미를 하며 삽입을 이어갔다.
“하아, 응, 으으응.”
때론 가늘게 신음을 쏟아내는 입술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혀는 집어넣지 않고 입술 겉면만 부드럽게 맞물리고 끝내려 했지만, 입술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 정이설의 입술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벌어졌다. 달콤한 숨결을 토해내며.
뭔가에 이끌리듯 혀를 안쪽으로 미끄러뜨렸다. 그러고는 허기진 사람처럼 빨아들였다. 제 혀에 스스로 밀착해서 비벼지고 문대지는 말캉한 재질의 혀를 빨지 않고 버틸 능력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츕, 츄릅, 찌걱찌걱.
위로는 연신 빨아대고 아래로는 쉼 없이 들락거렸다. 그럼에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빨아도, 빨아도, 박아도, 박아도 허기가 몰아쳤다.
대단한 건 정이설이었다. 그녀는 인서의 무지막지한 욕망에도 거부라는 걸 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받아주었다. 버려지는 콘돔이 한 개가 되고, 두 개를 넘어, 세 개가 될 때까지.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 * *
여섯 시가 거의 다 돼가는 시각인데도 햇살은 여지없이 뜨거웠다. 이설은 늦은 오후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꺾기 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미치겠더라고. 뒷베란다로 나가서 계속 쳐다봤어. 너는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는데.」
백인서가 어젯밤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들었다. 101동 910호 뒷베란다에 백인서가 서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확실히 느껴졌다. 그녀에게로만 향하고 있는 백인서의 시선을.
어젯밤에도 그런 모습으로 서 있었던 거구나?
이설은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 몸을 돌렸다. 계속 서 있다간 또 어제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까 봐. 물론 그렇게 되면 백인서는 무척 좋아할 테지만.
걸음이 또 멈춰진 건 아파트 광장을 지날 때 즈음이었다. 이설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광장 건너편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이나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백인서가 사는 101동은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선 보이지 않았다. 알면서도 서운했다.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톡 걷어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뜨끈한 오후 햇살이 모자챙을 달군다. 습관처럼 벚나무 아래로 걸으며 생각했다.
「너 그때부터 나 좋아한 거야?」
얌전히 옷을 입고 나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아 물었다.
「언제?」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백인서가 오히려 되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도암산으로 등반 갔던 날 말이야. 그때부터 나 좋아했던 거 아니냐고.」
질문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었지만, 틀림없이 그날이라고 생각했다. 백인서와 직접적인 접촉을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으니까.
미처 거절할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백인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업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과장된 감탄사가 쏟아져나왔다.
이설은 그만 움찔했다. 업히고 보니 굉장한 높이였다. 잘못 바르작거렸다간 떨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 어마어마한 통증이 접질려진 발목에 가해질 테지. 지금도 슬쩍 바닥에 딛기만 해도 아픈데.
이설은 당황함을 뒤로하고 백인서의 목을 바투 끌어안았다. 또다시 주변에서 ‘오오오오’ 하는 놀림성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번엔 먼젓번보다 훨씬 더 길고 컸다.
못 들은 척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잘린 머리카락과 탄탄한 목이 먼저 보였다. 그 밑으로는 끝을 모르게 널따란 어깨와 등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렇게나 넓었다고?
이설은 놀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도 백인서의 어깨나 등이 좁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워낙 덩치가 남달랐으므로. 하지만 이렇게 업히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깨와 등이 넓었으며,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허벅지를 감고 있는 팔뚝과 손 역시 힘줄이 툭툭 불거진 것이 단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백인서가 운동선수라는 걸.
「왜 이렇게 빨리 가?」
널찍한 등에 바짝 붙은 채로 물었다. 등산로가 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백인서는 유독 빨랐다. 오죽하면 주변 친구들로부터 ‘거대 날다람쥐’의 출현이라는 놀림을 받았을까.
「너 아프잖아. 빨리 병원에 가야지.」
성격만큼이나 담백한 대답이었다.
「안 힘들어?」
「어.」
「나 좀 무거울 텐데.」
「전혀. 완전 가벼워.」
백인서는 이설을 업고 등산로를 걷는 데 진심이었다. 하지만 말이 걷는 거지, 실상은 뛰는 거와 다름없었다. 등산로에 있던 그 많은 학생들을 휙휙 지나쳐가면서 걸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이설이 불편해할까 봐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힘들면 좀 쉬었다 갈까?」
「내가 뭘. 힘든 건 너잖아.」
「전혀 아니라니까?」
「아무튼.」
미안해서 웅얼거리자 백인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넓은 어깨가 웃음소리에 맞춰 살짝 위로 들렸다가 내려가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기만 했다. 장시간 그녀를 업고 걸어서인지 희미하게 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고. 아니면 그냥 백인서의 체향인 건가? 그도 아니면 등산로 주변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 냄새?
그게 뭐든,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이설은 뻣뻣하던 제 입술이 어느샌가 부드럽게 풀린 줄도 모르고 백인서의 목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인서는 참 다정했다. 병원에 데려다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걸음 속도는 빠르게 하면서도, 이설을 배려해 이따금 팔에 힘을 풀었다가 조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나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등에 업힌 것이 처음임에도 이설은 안정감을 느끼며 산을 내려왔다.
고맙다는 말을 건넨 건 등산로 입구에서였다. 백인서는 별거 아니라며 그저 씩 웃기만 했다. 이설을 업고 거의 산 정상에서부터 걸어 내려왔으면서. 10여 분이나 지난 뒤에 겨우 따라 내려온 담임선생님도 옆에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백인서나 되니까 군말 없이 그 긴 거리를 업어준 거라고.
「……맞아요.」
양심도 없이 가만히 있기가 뭣해 작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백인서와. 그리고 봐버렸다. 내내 멀쩡하던 백인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목 언저리까지 벌게지는 것을.
그러니 그날부터 백인서가 저에게 마음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