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곧 온다더니 좀 늦었네?”
백인서는 퇴근한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처럼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금방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손에 그건 다 뭐야?”
“아, 이거? 너랑 같이 먹으려고.”
“무거워 보이는데 이리 줘.”
백인서가 얼른 짐을 받아들었다.
“많이도 샀다.”
이설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현관문 옆에 붙어서며 백인서가 픽 웃는다.
“그렇게 많지도 않아. 밀키트 몇 개하고 복숭아, 초밥이 전부야.”
“그게 적어?”
“밀키트는 당장 먹을 게 아니고, 복숭아는 밥이 아니니까 절대 많은 건 아니지.”
“듣고 보니 그러네.”
백인서는 곧바로 수긍했다. 이설의 뒤를 바짝 쫓아오면서.
“앞치마는 왜 하고 있어?”
“너 카레 만들어주려고.”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이설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 둘만 사는데 그 정도도 못 만들면 굶어 죽어야지. 안 그래?”
“카레 말고 또 뭐 만들 줄 아는데?”
“어지간한 건 다 해. 김치찌개는 기본이고 활화산 계란찜에 라볶이, 낚지볶음도 할 수 있어.”
귀에 익숙한 음식명을 줄줄이 읊으며 백인서가 능숙한 동작으로 밀키트를 꺼냈다. 이설이 고심해서 고른 물건들이 하나하나 식탁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음…… 차돌박이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춘천닭갈비.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
“나중에 먹을 거 없을 때 먹어.”
“그러려고.”
씩 웃고는 백인서가 밀키트 용기들을 냉장고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집어넣었다.
“복숭아는 디저트로 먹으면 될 테고 문제는 초밥인데.”
“초밥도 나중에 먹으면 되지 않을까?”
이설이 묻자 백인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밥은 만들자마자 바로 먹어야 제맛이지.”
“카레 만들던 중이라며.”
“할 수 없지 뭐. 같이 먹어야지.”
간단히 고민을 끝낸 백인서가 싱크대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이미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흘끗 쳐다보더니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불을 한 단계 줄였다. 그러고는 황금색 카레 가루를 그릇에 붓고 물을 약간 첨가했다.
“어떻게 하는지 나도 봐도 돼?”
이설은 백인서의 옆에 나란히 섰다.
“별로 볼 것도 없을 텐데?”
“그래도 궁금해서.”
“네가 한번 저어볼래?”
백인서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이설에게 건넸다.
“원래 이렇게 가루를 물에 개서 쓰는 거야?”
“그냥 하는 사람도 많은데, 난 물에 풀어서 넣으니까 더 좋더라고.”
“카레 가루가 잘 풀어지게만 저으면 되는 거지?”
“응.”
“그런 다음엔?”
“여기로.”
백인서가 손가락으로 약불에서 끓고 있는 냄비를 가리켰다. 이설은 손으로는 카레 가루를 저으면서 눈으로는 냄비 속을 들여다보았다. 보기에도 양이 제법 많아 보이는 재료들이 큼직큼직한 모양새로 잘린 채 끓는 물 속에서 알맞게 익어가고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어림잡아봐도 5인분은 너끈히 될 것 같았다.
저걸 우리 둘이서 먹는다고? 초밥도 3인분이나 있는데? 약간은 뜨악해 있던 참에 백인서가 눈짓을 했다.
“이제 넣어도 돼.”
“그냥 한꺼번에 다 넣어?”
“아니, 조금씩 저어가면서 넣어야지. 안 그랬다간 떡처럼 뭉쳐져서 풀기 힘들어진다고.”
“오오, 좀 하는데?”
“이 정도 가지고 뭘.”
백인서가 겸연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쓱 문질렀다. 쑥스러운가 보다.
“근데 우리 둘이 이걸 다 어떻게 먹어?”
이설은 식탁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을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와 초밥 도시락을 메인으로 그 옆에는 가쓰오부시 장국과 양배추 샐러드 등이 놓였다. 가짓수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아도, 일단 초밥 도시락만 세 개인 데다 무엇보다 카레 양이 어마어마했다.
“설마 누구 또 오는 건 아니지?”
이설은 널찍한 그릇에 수북이 담긴 카레를 보고 물었다.
“아니?”
백인서가 그건 왜 물어보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럼 왜 이렇게 많이 떴어?”
“먹으려고.”
“이걸 다?”
“많은 건가?”
백인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돌이켜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백인서와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그는 뭐든지 잘 먹었고 또 많이 먹었다. 그래서 매번 만날 때면 이설이 남긴 음식까지 싹싹 비우곤 했다.
“벌써부터 이런 걱정하는 건 좀 웃기지만, 누가 부인이 될지 심히 걱정된다.”
“왜?”
“식비 엄청날 거 아냐. 딱 봐도 엥겔지수 되게 높겠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시집오든가.”
백인서가 식탁 너머로 씩 웃었다.
“농담도 진지하게 하면 농담 아닌 거 알지?”
“난 농담 아닌데?”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스무 살에 웬 결혼? 그리고 나 결혼할 생각 추호도 없거든? 꿈 깨.”
“우와, 생각도 안 해보고 단칼에 거절이냐?”
“생각해보고 말고가 뭐 있어. 결혼해서 좋은 게 뭐가 있다고.”
이설은 진심으로 끔찍해서 도리질까지 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빠와 그런 아빠를 낳고 기른 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고 사느라 사고방식마저 이상한 쪽으로 비뚤어져 버린 할머니에, 겉으로는 우아하게 웃으며 사람 속을 교묘하게 긁어대는 작은엄마까지.
그리고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뎌내느라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밭이 전부 망가졌을 엄마. 거기에다 오빤…….
이설은 자기도 모르게 툭 비어져 나오는 생각을 얼른 차단하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쨌든,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엄만 아빠를 사랑한다고 했다. 대체 어느 부분 때문에 아직까지 그런 감정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건지 이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지금 무지하게 상처받은 거 안 보이냐?”
속도 모르는 백인서가 한껏 투정을 부렸다. 일순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지어낼 수는 없었다.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게 비록 백인서일지라도.
“그러니까 함부로 결혼 얘기하지 마. 내가 별로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란 말이야. 알았어?”
“그래도 혹시 마음이 바뀌면, 그 결혼 나하고 하는 거다?”
백인서는 끈질겼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너한테 1순위는 줄게. 됐지?”
이설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깟 결혼이 뭐라고 저렇게 목을 매는 건지.
“약속한 거다?”
“어, 완전 약속.”
누가 봐도 무성의한 대답이건만, 백인서는 정말 감동한 표정이다.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어서 먹기나 해. 카레 다 식겠어.”
이설은 고개를 숙이고 백인서가 만들어준 카레라이스를 크게 한 숟가락 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비주얼과 냄새만큼은 제대로다. 두어 번 입김을 호호 불어준 다음, 입에 넣었다.
“어때?”
꼭꼭 씹어 목으로 넘기는 것까지 보고 난 후에야 백인서가 물었다.
“맛있어. 너 태권도가 아니라 요리사 해도 되겠다. 진심.”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백인서는 영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이설은 빈말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연속해서 카레라이스를 떠먹었다.
“자, 이제 알겠지? 내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오케이. 인정.”
양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도록 먹고 나서야 백인서는 입꼬리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이후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먹방 촬영이라도 하듯 먹는 데만 열중했다. 수저가 초밥에서 카레라이스로, 카레라이스에서 양배추 샐러드로 쉼 없이 오갔다. 연어초밥은 부드러워서, 계란초밥은 폭신폭신해서, 카레라이스는 카레라이스대로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서.
그중에서도 두 사람의 입맛을 동시에 만족시킨 건 단연코 황새치뱃살초밥이었다.
“뭐야, 이거 완전 쫀득쫀득해. 꼬들꼬들하기도 하고.”
첫입에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너도 먹어볼래?”
이설은 혼자 먹기 너무 아까워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황새치뱃살초밥 하나를 손수 백인서에게 건네주었다. 그런 다음엔 ‘괜찮지?’ 하고 확인까지 했다.
백인서는 그저 고개만 크게 끄덕일 뿐이었다. 오물거리는 이설의 입술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어쩐지 그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도 같아 이설은 서둘러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사람 민망하게.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백인서는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 그녀를 뜨겁게 바라보았었냐는 듯이.
“더는 못 먹겠어.”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들이 바닥을 보였다. 이설은 포만감을 드러내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것도 엄청나게 먹은 거야. 더 먹었다간 배탈 날걸?”
“그럼 남은 건 내가 다 먹어야겠네.”
백인서는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이설의 앞에 놓인 그릇들을 제 앞으로 끌어당겨서는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3분의 1가량 남은 카레라이스와 4개 남은 연어초밥이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야, 너무 무리하지 마. 우리 엄마가 남은 음식 억지로 먹는 게 제일 미련한 거랬어.”
“무리하는 거 아닌데? 아직 배 덜 찼어.”
백인서는 이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은 음식을 전부 먹어치웠다. ‘위대’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근데 넌 왜 살이 안 쪄?”
이설은 정말 신기해서 물었다. 심지어 백인서는 그렇게 먹고도 배 부분이 판판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전에도 살이 찐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체질인 것 같아.”
“그래?”
“친가고 외가고 살찐 사람이 하나도 없어.”
“되게 부러운 집안이구나. 그렇게 먹어도 살이 안 찐다니.”
“너네도 살찐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잖아.”
“뭐래, 우리집 식구들은 너처럼 많이 안 먹거든? 비교할 걸 비교해.”
이설이 톡 쏘아붙이자 백인서는 고개까지 젖히며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