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엄마가 없어서 외롭지 않냐고? 물론 외롭지. 근데 아빠랑 할머니가 계셔서 괜찮아.」
할머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백인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잘 먹는 음식을 기막히게 알아채시거든.」
「어떻게?」
「식당이든 어디든 가면, 무슨 음식으로 내 젓가락이 가장 많이 가나 유심히 보셨다가 꼭 그거 해주냐고 물어보셔. 그러니 안 좋아하고 싶어도 안 좋아할 수가 없지.」
그러면서 백인서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전복이 듬뿍 들어간 미역국과 달달한 LA 갈비, 사골국물을 넣은 섞박지와 고소한 감자전 등을 들먹였다. 입맛까지 다시며 아주 행복한 얼굴로.
“나, 전복 미역국하고 LA 갈비 해줘.”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사골국물 넣은 섞박지하고 감자전도 먹고 싶어.”
“……사골국물 넣은 섞박지하고 감자전?”
“나 좋아하는 거로 해준다며.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야.”
자식인데 그것도 못 해줘? 아빠랑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은 일부러 말 안 해도 척척 알아맞히면서.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사골국물을 넣은 섞박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맛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아빠가 즐겨 먹는 닭볶음탕과 굴전이 들먹여지는 순간 뭔가 모를 감정이 욱하고 치받았다.
내친김에 더 얘기해버릴 걸 그랬나? 구절판이나 신선로처럼 하기 어려운 음식들로만?
“그, 그러지 뭐. 우리 이설이가 먹고 싶다는데 그것쯤 못 해줄까.”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이 들고나선 한 번도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귀찮은 소릴 해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그럼 갔다 올게.”
이설은 엄마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지도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잠깐만 이설아.”
엄마가 다급하게 이설을 불렀다.
잠시 후에 나온 엄마의 손엔 이설이 평소 쓰고 다니는 하얀색 야구모자가 들려 있었다.
“너 직사광선 오래 쬐면 밤에 여기저기 따갑잖아. 꼭 쓰고 다녀.”
“…….”
이설은 엄마가 내미는 야구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무언가에 찔린 듯 콕콕 쑤셨다. 채가듯 야구모자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늦어도 6시까지는 들어와야 해.”
엄마가 등 뒤에서 또 한 번 다짐을 주었다. 일상적인 어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기저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잔뜩 깔려 있다. 혹시라도 그녀가 제시간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 뒤에 이어질 살얼음판 같은 집안 분위기가 벌써부터 염려되는 것일 테지.
“알았어. 시간 딱 맞춰 들어올게.”
이설은 현관문 밖까지 따라온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시선을 던진 후 곧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만 들어가도 되는데 엄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이설이 탈 때까지 계속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점점 좁아지다가 종국에는 얇은 선 하나로 사라지게 될 엄마의 얼굴이.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하자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이설은 미간을 좁히며 계기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심한 숫자들이 노란색 불을 밝힌 채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5, 4, 3, 2, 1,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설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안 하던 짓을 하고 나니 갑자기 죄책감이 확 몰려들었다.
안 그래도 오빠 때문에 정신없는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속이 시원해졌다기보다는 불편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딴 음식이 뭐라고 발끈해서는. 전복 미역국은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사골국물 넣은 섞박지? 먹어본 적이나 있으면서 해달라고 했으면 이렇게 우울하지나 않지.
이설은 한참을 그러고 섰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엄만 그새 목소리에 반가움이 함빡 묻어났다. 이러니 죄책감이 배가 된다.
“……있잖아. 미안해.”
「뭐가?」
“엄마한테 짜증 낸 거.”
「네가 무슨 짜증을 냈다고 그래.」
“괜히 귀찮게 음식 만들어달라고도 했잖아.”
「그럴 수도 있지.」
“어쨌거나.”
「그리고 엄마 하나도 안 귀찮아.」
엄만 도리어 미안한 기색이었다. 별일도 아닌 거로 짜증을 낸 사람은 바로 이설 자신인데.
「내일 기숙학원 들어가야 하잖아. 엄마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다 와.」
“…….”
「날 더우니까 되도록 바깥에서 만나지 말고. 알았지?」
“……어.”
아무튼, 엄마…… 미안해.
이설은 전화를 끊고 공동현관을 나섰다. 미친 여름 햇살이 정수리를 태울 듯 무섭게 쏟아졌다. 손에 들린 모자를 얼른 썼다.
전화는 몇 걸음 못 가서 걸려왔다
「언제 올 거야?」
항상 느끼는 거지만, 백인서는 목소리가 일품이다. 태권도선수가 아니라 성우를 했어도 크게 성공했을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곧 가야지.”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지만 불편함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재빠르게 희석됐다. 기분이 단숨에 좋아졌다. 어느새 백인서는 그런 존재가 돼버렸다.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기대감이 몽글몽글 샘솟게 하는 그런 존재.
101동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이설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젠 아무것도 못 사 갔는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오늘은 뭐라도 들고 가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이설은 목적지를 바꿔 아파트 단지 내 상가로 향했다. 죽 늘어선 가게들 중에, 밀키트 전문점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아저씨도 그렇고 백인서도 그렇고, 서로 음식 할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밀키트나 사 가지고 갈까? 그럼 아무 때고 편하게 먹을 수 있잖아.
무인 점포라 밀키트 전문점 내부엔 직원이 따로 없었다. 그냥 물건을 고른 다음 설치된 키오스크에서 바코드로 계산을 하면 끝이었다.
이설은 진열된 상품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불행하게도 백인서가 좋아한다는 전복미역국이나 LA 갈비는 가게 안에 없었다. 혹시 종류가 많아 못 봤나 싶어 두 번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밀키트 전문점이므로 섞박지 같은 김치 종류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차돌박이 된장찌개와 순두부찌개, 춘천닭갈비를 골라 키오스크 앞에 섰다. 금액은 걱정 없었다. 기숙학원에 들어온 이후에도 아빤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줬는데, 심지어 스무 살이라고 용돈 액수를 고등학교 때의 두 배로 올려주었다.
제법 호기롭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밀키트 전문점 바로 옆에 과일가게와 초밥집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어떡하지? 두 가지 다 사고 싶은데.
이설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먼저 과일가게의 문을 밀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과일들이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와 윤기 나는 생김새를 뽐내며 진열대 위에 조르르 앉아 있었다. 안 사주면 토라지기라도 할 기세로.
백인서는 복숭아를 좋아한다고 했지?
다른 과일은 볼 것도 없이 곧장 연분홍색 복숭아가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크기가 거짓말 안 하고 백인서의 주먹만 했다.
총 여섯 개가 들어 있는 박스를 하나 사서 밖으로 나왔다. 팔이 제법 무거워졌으나 개의치 않고 초밥집 문을 열었다. 주문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와 백인서는 서로 좋아하는 초밥 종류가 뚜렷했기에.
“밖이 무진장 덥죠?”
사람 좋게 생긴 초밥집 사장이 조리대 너머로 말을 걸어왔다. 손으로는 부지런히 연어초밥을 만들면서.
“네, 완전 더워요.”
“그럼 더위 타지 마시라고 특별히 더 맛있게 만들어드릴게요.”
“진짜요? 우와, 감사합니다.”
예전엔 자신에게 이런 종류의 실없는 농담이 건네지면 보일 듯 말 듯 최소한의 반응만 보이는 게 전부였다. 오늘은 달랐다. 백인서를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전에 없이 너그러워졌다. 이설은 초밥집 사장의 연이은 농담에 커다란 눈매가 깊은 반달 모양이 되도록 환하게 웃었다.
십여 분 정도가 지나자 그녀의 손엔 예쁜 일회용 초밥 도시락 3개가 쥐어졌다. 하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연어초밥 도시락이었고, 또 하나는 백인서가 좋아하는 폭신폭신한 계란초밥과 새우초밥이 반반씩 들어 있는 도시락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초밥집 사장이 특별추천해준 황새치뱃살초밥 도시락이었다.
이설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초밥 도시락을 들고 아파트 상가를 빠져나왔다. 그 사이 바깥 온도는 한층 더 올라가 지글지글한 열기가 모자챙을 뚫고 들어올 기세였다. 이설은 양손 가득 먹을 걸 들고 있어서 팔이 묵직했지만 백인서와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니 그저 기쁜 마음만 들었다.
* * *
101동 앞에 도착하자 기대감은 이미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무더위와 두근거림이 한데 뭉쳐져 발그레한 얼굴을 한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 2, 3, 4, 5…….
집에서 내려올 때와는 반대로 노란색 숫자가 하나씩, 하나씩 몸집을 키웠다. 그에 비례해 기대감 역시 차곡차곡 커져 나가는 경험은 뭔가 신기하면서 현실 속이 아닌 듯 사람 마음을 끝 간 데 없이 붕 뜨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6, 7, 8, 9, 땡.
느릿한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설은 짧게 심호흡한 후 걸음을 옮겼다. 현관 벨을 누르기 무섭게 백인서가 나왔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지 앞치마 차림이었다. 저 큰 덩치에도 딱 맞는 앞치마가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