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설은 홀린 듯 제 눈앞에 드러난 백인서의 상체를 쳐다보았다. 널찍한 가슴은 열기로 붉은 기운을 띠었고, 군살 하나 없는 복부는 판판한 근육이 여러 개로 나뉘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전형적인 역삼각형의 몸매였다.
그 아래로는 유명 스포츠 의류 브랜드명이 살짝 내비치는 속옷과 민망하게 불룩 튀어나와 있는 회색 운동복 하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설은 어쩐지 다 벗은 백인서보다 지금 모습의 백인서가 훨씬 더 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꼴린다는 말을 내뱉는데, 이런 모습을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회색 운동복 하의 앞섶을 노골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저 불룩한 것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이내 눈앞에서 그 하의마저 벗겨져 나갔다. 처음도 아닌데 백인서는 숨소리가 못내 거칠었다. 이설의 옷을 벗길 때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해져서 저러다 과호흡으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될 정도였다.
“되게 떨리네.”
백인서가 중얼거렸다. 이설의 마지막 남은 속옷을 아래로 끌어 내리면서.
그러나 떨린다는 말과 달리 행동엔 주저함이 없다. 한 번의 동작으로 손바닥만 한 팬티가 발목까지 내려왔다.
거추장스러운 옷가지가 모두 벗겨져 나가자 백인서가 그녀의 얼굴 양옆으로 팔을 짚은 채 내려다본다. 어느새 검붉게 변한 노을이 그의 벗은 어깨 뒤로 일렁였다. 촘촘하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눈동자가 해넘이 직전의 산등성이처럼 검고 진했다. 백인서는 심지어 눈을 깜박이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제 아래 누워 있는 이설을 집어삼킬 듯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인서는 이미 눈빛으로, 마음으로, 그녀와 섹스를 하고 있다는 걸. 머릿속으론 진작에 무섭게 일어선 것을 그녀의 속으로 집어넣었다는 걸.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심장이 두서없이 두근거리고 호흡은 점점 다급해졌다.
이윽고 커다란 몸이 그녀의 몸 위로 정확히 포개졌을 때, 짙어진 숨결로 그녀의 바짝 마른 입술을 달래주며 달콤한 키스가 시작되었을 때, 이설은 깨달았다.
어쩌면…… 백인서를 정말로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이렇게 멋진 남자와 늦은 여름날 오후에 섹스를 하게 된 건, 온 우주가 가여운 그녀를 위해 깜짝 준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돌이킬 수 없이 사랑에 빠진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일지도 모른다고.
* * *
백인서의 집을 나선 건 아파트 주변으로 온통 깜깜하게 밤이 내려앉은 시각이었다. 달빛에 비치는 긴 그림자를 벗 삼아 걸으면서 이설은 생각했다. 뭔가 혼자서만 무도회장을 빠져나온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라고.
무더기로 달빛이 쏟아지는 밤 가운데를 걷는다는 건 그런 기분이었다. 죽 늘어선 가로등과 벚나무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백인서는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씩 더 멀어졌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이설은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이러지? 백인서가 배웅해준다고 우길 때 그러라고 할 걸 그랬나?
손을 들어 뜨끈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뭉클한 속내가 가시질 않았다. 눈언저리가 자꾸만 시큰거렸다.
기숙학원에 너무 오래 틀어박혀 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좋은 일만 있었던 날인데 뜬금없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멍하니 서서 하루를 더듬어보았다.
아빠도 딱히 시비를 걸지 않았고, 오빠 역시 승마장에 간다는 기대감으로 이른 아침부터 방방 떠서 그렇지 나름 무난하게 오전, 오후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별문제가 없는 날은 결과적으로 엄마가 행복한 날이었으므로, 자신이 이렇게 뜬금없이 눈시울을 붉히면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오늘 그녀는 백인서와 영원히 기억될 근사한 하루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설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백인서가 사는 101동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붓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걸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백인서의 영역 밖으로 멀어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러기 싫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싫었다. 아주아주 끔찍할 정도로.
이설은 몸을 돌려 백인서가 사는 101동 쪽으로 걸어갔다.
한 번만 더 보고 와야지.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싶다는데 잘못된 건 없잖아? 오히려 백인서라면 시시콜콜 이유를 묻는 법 없이 좋다고 할 거야. 백인서는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그녀에 한해선, 담백하고, 맹목적이고, 또…….
아, 뭐야. 지금 세기말 영화라도 찍어?
불현듯 현실 감각이 돌아온 건 발끝에 조그만 돌멩이가 걸린 순간이었다. 이설은 101동 쪽으로 꺾어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부분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스무 발자국 정도만 더 걸으면 바로 백인서가 사는 아파트 공동현관 입구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생생히 인식되었다.
천만다행이다. 충동적인 마음으로 정말 백인서를 찾아갔으면 어쩔 뻔했을까. 무안함도 그런 무안함이 없었을 테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이설아.”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은근하고 다정해서. 그러나 또 한 번, “이설아.” 하고 그녀의 이름이 불렸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인서가 서 있었다.
은색 달빛이 정교한 얼굴 윤곽 위로 드리워져 음영이 한껏 짙어진 백인서는 함께 시간을 보냈던 오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더 어른스러우면서, 한층 더 묘한 분위기였다.
이설은 눈을 깜박였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서.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잖아. 바란다고 된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최대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가 떠도 백인서는 같은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환영도 아니었고 환시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가쁜 호흡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쩐 일이야?”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러는 넌?”
되묻는 얼굴 위로 여전히 은색 달빛이 섬세한 모양새로 드리워져 있다.
“난 뭐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도 그래.”
“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미치겠더라고. 뒷베란다로 나가서 계속 쳐다봤어. 너는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냥은 도저히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으니까.”
백인서가 멋쩍게 웃었다. 그 모습이 실없어 보이면서도 심장 끄트머리를 계속해서 간질였다.
“그랬는데 정이설 네가 다시 오더라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뺨이며 볼을 마구 어루만졌다.
“정신없이 달려왔더니 바로 여기였어. 정이설 네 앞.”
“아아…….”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이게 바로 마음이 통한다는 거 맞지?”
백인서가 빙그레 웃었다.
“어, 맞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밤 나들이를 나온 가족은커녕, 하다못해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적막이 깊숙이 내려앉은 공간엔 두 사람이 내뿜는 다정한 호흡과 그 사이로 촘촘히 들어선 감정의 덩어리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설은 온 우주에 백인서와 그녀, 단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6장. 혀가 아리도록 달콤한 (2)
“오늘도 나가?”
외출준비를 하는 이설에게 엄마가 물었다.
“어. 친구가 좀 보자고 해서.”
“어제랑은 다른 친구야?”
“……아니, 같은 친구야.”
“근데 왜 엄마한텐 누구인지 말 안 해줘?”
“다음에 말해줄게.”
“그렇게 말하니까 더 수상해지는데?”
눈치 빠른 엄마가 탐색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할 것도 많다. 의심은 자고로 망국병이래.”
“점점.”
“나 나갔다 올게.”
“점심은?”
“친구 만나서 먹어야지.”
무심한 척 대답했지만, 뒤통수로, 등허리로 엄마의 시선이 따갑게 달라붙었다.
“일찍 들어와. 오늘은 다 같이 저녁 먹게.”
“왜?”
“너 내일 기숙학원 들어가는 날이잖아. 아빠랑 저녁 한번 같이 먹어야지.”
이설은 선뜻 그러겠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빠라는 말에 벌써부터 숨이 턱 막혔다. 밥상을 앞에 두고 또 무슨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어서. 한여름 불볕더위가 순식간에 거실 안으로 몰려온 듯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굳이 그래야 해?”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빠가 그러고 싶으시다잖아. 우리 가족 모두 모여서 저녁 먹은 지도 오래됐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최소한 먹어야지.”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엄마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서 이설은 불퉁한 속마음을 꾹꾹 눌러 놓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적어도 엄마가 다음 말을 꺼내놓기 전까지는.
“너 좋아하는 닭볶음탕하고 굴전 해놓을게.”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닭볶음탕하고 굴전이라니.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 두 가지 음식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엄마, 그건 내가 아니라 아빠가 좋아하는 거잖아. 여태 몰랐어?”
뭔가 욱해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도 잘 먹었잖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있으니까 먹었던 거지. 엄마가 자꾸 먹으라며 권하기도 했고.”
“……그럼 뭐 해줄까?”
엄만 금방 풀이 죽었다. 제 아빠를 닮아 파르르한 성질머리의 딸내미 앞에서 마냥 죄인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눈동자는 대체 왜 흔들리는 건데.
“그냥 아무거나…….”
이설은 대충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