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다음 사진도 배경이 똑같은 놀이공원이었다. 백인서는 하얀색 반소매 셔츠에 남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벌써 키가 껑충했다.
“이때도 되게 컸구나. 지금이랑 이미지가 흡사해.”
이설은 뭔가 그리운 것이라도 만난 듯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있잖아, 엄마하고 굉장히 많이 닮은 거 알아? 특히 눈매랑 코, 이런 데가.”
“네가 보기에도 그래?”
“응. 따로따로 떼어놓고 봐도 모자지간인 줄 알겠어.”
백인서의 손을 꼭 잡고 놀이기구 앞에 서 있는 엄만 백인서와 얼굴만 닮은 게 아니었다. 분위기도 무척 비슷했다. 그래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분이지만 더 정감이 갔다.
“우리 아빠 서운하시겠네.”
“왜?”
“맨날 그러시거든. 내 얼굴이 본인 얼굴을 빼다 박았다고.”
“음…… 누가 봐도 그건 좀 아닌 듯.”
정직한 대답에 백인서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지금 한 말, 나중에 우리 아빠 앞에서도 되풀이할 수 있지?”
“어떻게 그래.”
“서운해하실까 봐?”
“네가 그랬잖아. 항상 너랑 아빠 얼굴이 똑 닮았다고 말씀하신다며.”
“생각해보니 안 하는 게 낫겠다. 우리 아빠, 덩치는 엄청나게 커도 은근 소심하거든. 상처도 무지하게 잘 받고. 겉보기하고 완전 달라.”
피식 웃으며 백인서가 휴대폰 사진을 넘겼다. 이번엔 아빠도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여긴 어디야?”
“아마 제주도일걸?”
“그때는 안 바쁘셨나 보네?”
“아무리 강력계 형사라도 맨날 바쁘면 안 되지.”
“그러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설은 사진 속의 가족 구성원들을 찬찬히 살폈다. 가만 보니 백인서는 수려한 이목구비와 전체적으로 서늘한 분위기는 엄마를 닮았지만, 체격만큼은 아빠 쪽을 닮은 것 같았다. 일단 남다른 신장과 떡 벌어진 어깨부터가 그랬다.
“아빠는 키가 몇이셔?”
“아마 180 후반일걸? 나보다 몇 센티 작으시니까.”
“혹시 아빠도 운동하셨어?”
“그렇게 보여?”
“일반인 피지컬로는 안 보여서.”
“고등학교 때까지 유도하셨대. 부상으로 포기하셨지만.”
“속상하셨겠다.”
“좀 그렇지 뭐.”
백인서가 사진을 쓱 넘겼다. 제주도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지 장소는 조금씩 달라졌으나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같았다.
“이게 마지막 가족여행이야.”
백인서가 담담히 말했다.
“그해 여름에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
“……그래?”
이설은 사진 속의 백인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과 얼굴 윤곽은 엇비슷했으나 누가 봐도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이때가 몇 살이었어?”
“초등학교 1학년.”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어봐도 돼?”
“그냥 교통사고.”
“어쩌다가?”
“비가 많이 와서 운전자가 우리 엄마를 못 봤대. 운이 없었던 거지.”
“…….”
단순히 운이 없었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백인서는 차분했다. 그게 더 심장 한가운데를 콕콕 찔렀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엄마가 곁에서 사라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이설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다른 사진도 볼래?”
“……응.”
시간 순서대로 사진을 저장해놓은 건 아닌지, 백인서의 엄만 사진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떨 땐 백인서와 사이좋게 나란히, 어떨 땐 백인서만 혼자 덩그러니 떼어두기도 하면서.
백인서의 기억 속에서도 엄만 그랬겠지. 어느 날인가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다가, 또 어느 날인가는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흐릿하게 잊히기도 했다가,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백인서는 어떻게 했을까. 지금처럼 속마음을 묻어둔 채 담담히 버텨냈을까?
어느새 사진이 끝났다. 방 안엔 침묵만이 남았다.
이설은 사진을 보느라 잠시 떨어뜨렸던 머리를 다시 백인서의 어깨에 기댔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엄마 냄새 다음으로 좋아하는 냄새였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오늘은 백인서의 체향 사이로 익숙하지 않은 다른 냄새들도 희미하게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백인서에게 아래를 빨리면서, 뒤이어 흉흉한 것에 쉼 없이 박히면서 그녀가 흘렸던 질액 냄새, 끝도 없이 백인서가 토해낸 정액 냄새,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을 하던 도중에 두 사람이 흘렸을 땀 냄새 등등이. 그럼에도 난잡하거나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좋겠다.”
백인서가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들어 이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숨결이 정수리와 귓불에 흩어졌다.
“그렇게 하면 되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으면 좋겠다고.”
“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고.”
이설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아홉 시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
아빠에겐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까 서너 시간 정도는 상관없겠지. 물론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전부터 생각한 건데, 정이설 넌 눈동자가 진짜 예뻐.”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와 말랑한 귓불을 조물거렸다.
“고마워.”
“진심인데.”
“나도 진심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백인서는 오글거리는 말도 참 잘했다. 전혀 안 그렇게 생겨서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정작 눈동자가 인상적인 건 백인서 본인이다.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자신의 눈동자가 얼마나 깊고, 서늘하며, 무게감이 있는지에 대해.
성격을 고려해보건대, 후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 백인서는 제 장점을 알고도 모른 척할 만큼 음흉한 성격은 절대 아닐뿐더러, 평소 언행으로 보아 제 외모에 대해서는 정말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게 확실하니까.
“그건 살짝 오버인 듯.”
이설은 곧바로 백인서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왜?”
“더 예쁜 눈을 네가 못 봐서 그래. 정 못 믿겠으면, 일단 눈알 요정 알렉시스 블레델하고 퇴폐미 최강자인 카야 코스델라리오 눈부터 검색해보고 와. 그럼 내 눈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말은 쏙 들어갈 테니까.”
“구체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양할래.”
“내 말이 맞을까 봐?”
“아니, 시간 낭비일까 봐.”
능청스러운 대꾸에 풋 웃음이 나왔다.
“칭찬도 자꾸 그럴듯하게 할래?”
“난 언제나 진심인데, 잊었어?”
“몸 둘 곳을 몰라서 그렇잖아. 너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버티겠어? 뻔뻔하게 수긍할 수 있겠냐고.”
“부끄러울 것도 많다. 그냥 진실을 받아들여.”
“그 진실이 뭔데?”
“정이설 눈동자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사실.”
황당한 이야기를 백인서는 참 진지하게도 했다. 실소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그런 백인서에게 동화라도 되었는지 이설은 자못 궁금해졌다. 그래서 덧붙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적어도 너랑 나 사이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지금처럼 쓸데없는 의구심도 갖지 말고.”
단호박도 이런 단호박이 없다.
“그건 너무 과도한 긍정 같은데?”
“생각해봐. 뭐든 가능하다고 믿어야 노력해볼 구실이라도 생기는 거야. 희망이라는 게 있거든. 근데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치부해버리면 노력 자체가 시들해지는 법이야. 왜? 어차피 불가능할 건데 피곤하게 뭐하러. 참 맥빠지는 심리 아냐?”
“음……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듯.”
이설은 순순히 인정했다. 무슨 사이비 교주도 아니건만, 백인서의 말엔 묘하게 사람을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서늘한 눈을 코앞에 들이대고 물으면 반대 의사가 폭 사그라든다. 이유가 뭐지? 인상적인 눈동자 때문인가? 아님…… 내가 마음을 빼앗겨버려서?
“그럼 나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앞으로 묻고 따지는 거 없기다?”
백인서는 이참에 아예 쐐기까지 박아버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저 말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노력은 해볼게.”
“살짝 약한데.”
그녀로서는 최대한 긍정적인 대답이었는데 백인서는 사뭇 못 미더운 눈치였다.
“이 정도면 진짜 긍정적인 거거든?”
“좋아, 봐줬다.”
“으스대긴.”
탁구공 튀듯 가볍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이설은 처음으로 깊은 편안함을 느꼈다. 연이은 섹스로 몸이 천근만근 나른해지는 바람에 발음은 부정확해지고, 눈꺼풀은 졸음을 덧입고서 자꾸자꾸 아래로 쳐졌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웠다. 살면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풀어진 적이 있었던가 싶다. 백인서의 말처럼 밤새도록이라도 이렇게 있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지금 백인서의 어깨에 기대어 보고 있는 노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었으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적어도 수천 번은 보았을 노을이 오늘따라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곁에 백인서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나눈다는 건 그래서 특별했다.
“이설아.”
오렌지색 노을을 여기저기 묻히고 있는 얼굴로 더운 숨결이 다가왔다.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백인서를 바라보았다.
“우리…… 한 번 더 할래?”
다정하게 시선을 얽어오며 백인서가 물었다. 눈빛으로, 달뜬 호흡으로, 마구마구 욕망을 발산하며.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아래는 이미 무섭게 일어나 있을 것이다.
“그럴까?”
“이렇게 바로 허락이 떨어진다고?”
“너만 하고 싶은 거 아니거든? 그리고.”
“그리고?”
“아직 콘돔도 2개나 남았고.”
“그럼 나야 너무 좋고.”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귀와 목을 간지럽혔다. 심장이 곧장 반응한다. 콩닥콩닥.
노을빛과 수줍은 두근거림이 한데 버무려진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백인서가 셔츠를 벗었다. 근육으로 촘촘히 엮인 흉곽이 흥분감을 이기지 못하고 가파르게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