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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47화 (47/130)

47화

“뭐 하려고?”

“내가 벗고 있어서 그렇다며.”

“그래서?”

“옷을 입어야 가라앉을 거 아냐. ……거기가.”

이설은 말끝을 흐리며 백인서의 중심부를 흘끗거렸다. 뻔뻔하게 발기한 모습이 얼굴을 붉어지게 할 만큼 엄청났다.

저러니 들어왔을 때 숨이 콱 막혔지. 저러니 처음엔 무지막지하게 아팠어도 나중엔 앙앙대며 자지러지게 울었겠지. 저러니 조그만 방 안 천장이 빙글빙글 돌도록 정신을 못 차렸을 테지. 저러니…….

이설은 재빨리 다리를 오므렸다. 머릿속이 백인서와 나누었던 섹스 이미지로 가득 채워지자 아래가 움찔거리더니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건 정말 예상에 없던 반응이다. 이 방 안에 짐승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모양이다.

“너도 빨리 입어.”

“난 또 왜?”

백인서가 돌아봤다. 그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그는 지극히도 잘생겼다. 아래가 또 움찔거린다. 주룩. 이설은 반사적으로 질구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흘려대다간 시트가 다 젖을지도 모른다.

“빨리 입으라고. 기분 진짜 이상해진단 말이야.”

“나랑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슬쩍 상체를 들이대는 백인서의 눈동자가 어느새 검게 일렁였다. 위험신호였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흥분해서 피임도 제대로 안 하고 사고 칠 위험이 다분했다. 누구 때문이냐고? 백인서와 그녀 둘 다 때문에.

이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작 스무 살 재수생 주제에 임신? 안 그래도 오빠 하나만으로도 벅찬 엄말 아예 말려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거든? 사람이 다 너처럼 힘이 넘쳐나는 줄 아니?”

“난 또 그런 줄 알고.”

이설을 향해 씩 웃더니 백인서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옷을 찾아 입었다.

“그래도 참 예쁘다.”

처음 왔던 그대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나서 이설이 중얼거렸다.

“뭐가?”

“노을 말이야.”

“그런가? 커튼 때문에 난 잘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도 있잖아.”

“그럼 뭐가 전분데?”

“그 안에 숨은 거.”

이설의 말에 백인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숨어 있는 걸 봐야 하는 건가? 어차피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감춘 거잖아.”

“가끔은 안 보이는 게 궁금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넌 그런 적 없어?”

“나?”

“감추면 감출수록 더 궁금한 적 없었냐고.”

“있기야 있었지.”

“언제?”

이설이 쳐다보자 백인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딱 한 가지 경우에만 그런 적 있었어.”

“그게 뭐였는데?”

“정이설 네 마음.”

“어?”

“궁금해 미치겠더라고.”

“아…….”

예상과 아예 동떨어진 대답도 아닌데 심장이 콩닥댔다.

“그럼 지금은 안 보여도 궁금한 거 없겠네?”

내 마음은 이미 다 아니까.

“그럴 리가.”

“어째서?”

“속속들이 알아도 계속 궁금한 사람이 정이설이거든.”

“예를 들면?”

“음……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뭘 하는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을 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잠자기 전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밤에 잠은 잘 자는지. 생각하자면 끝이 없거든.”

“……그렇구나.”

이설은 기분 좋은 동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밤 부엉이가 부엉부엉 울어댈 때, 기숙사 침대 한구석에 누워 백인서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잠을 설치지 않았는가. 어쩌면 이렇게 하나씩 연결점을 찾아가는 걸지도.

“나한테 기댈래?”

백인서가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럴까?”

이설은 동그란 머리를 널찍한 어깨에 기댔다. 몸이 서로 가까워지자 익숙한 체향이 후각을 간지럽혔다.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기분이 나른해진다.

“노을 진짜 예쁘다.”

백인서가 중얼거렸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저녁노을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응. 지금까지 본 노을 중에서 제일 예뻐.”

이설은 나른해지는 눈꺼풀을 들어 파문처럼 넓게 번지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회색 암막 커튼을 가장자리로 한껏 밀어내고 그 사이를 차지한 시폰 재질의 속 커튼 때문에 유독 더 은은한 색조를 띠는 노을이었다. 어떻게 보면 판타지 영화의 배경화면과 흡사한 색조 같기도 했다. 오렌지색은 오렌지색인데 뭔가 어슴푸레하고 흐릿해서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매일 저녁 바라보는 해넘이가 오늘따라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백인서라는 존재 때문일 거다. 그렇지 않았으면, 스무 살 어느 여름 저녁에 마주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노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이 방에서 지냈어?”

“응.”

“거실도 그렇더니, 여기도 되게 깔끔하다. 성격인가 봐.”

“이것저것 가져다 놓는 습관들이 없어서 그래. 아빠도 나도.”

“그래 보여.”

이설은 방 안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곁가지 없이 깔끔한 가구와 침구가 원래 색에 오렌지색 노을빛을 덧입은 채 노곤한 모양새로 들어앉아 있었다.

백인서가 공부하는 책상, 백인서가 집에 올 때마다 잠이 드는 침대, 백인서의 옷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단출한 붙박이 옷장, 백인서의 손때가 켜켜이 묻은 소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 서랍장…….

그 옆으로는 평소 백인서가 읽었을 법한 책들이 열을 지어 사이좋게 꽂혀 있는 책장이 얌전하게 서 있었다.

미적분으로 바라본 하루, 부분과 전체, 이기적 유전자, 기후 다이어트, 녹색 시민 구보 씨의 하루, 양철북, 엔트로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호밀밭의 파수꾼.

눈에 익은 제목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제목들도 있었다. 도서명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이설의 눈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이상한 정상 가족? 특이한 제목의 책이구나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엄마 사진 볼래?”

백인서가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설은 당황해서 몸을 바로 했다.

“지금이 어때서?”

“침대에 눕다시피 앉아 있잖아. 좀 예의 없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그래도 처음 뵙는 건데.”

이설은 ‘비록 돌아가신 분이지만’이라는 표현은 입안에서만 살짝 굴렸다.

“우리 엄마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럼?”

“사람 하나만 봐.”

“그래도 이왕이면 단정한 게 좋지. 안 그래?”

이설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대충 빗어 내린 다음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침대 위에 앉았다. 나름 반듯하게 꾸민 모습을 보고 백인서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된다니까.”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이제 우리 엄마 만날 준비됐어?”

“응.”

눈이 마주치자 백인서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예의 하난 무척 바른 여자친구네, 휴대폰 사진첩을 휙휙 넘기며 백인서가 중얼거렸다.

“인사해. 우리 엄마야.”

휴대폰 액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설은 사진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기존 인화지에 있던 사진을 휴대폰으로 다시 찍어 저장해 뒀는지 약간 뿌연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더 아련하면서 정감이 갔다.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도 같았고.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약간 잠겨서 나왔다.

이렇게 백인서의 엄마와 인사를 하는구나.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름도 대야지.”

“……정이설이라고 합니다.”

“설마 그게 끝이야?”

“……어, 백인서랑 동갑이고요. 현재는 아쉽게도…… 재수생입니다.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고요, 그리고…….”

백인서는 엄마를 닮았구나.

사진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언젠가 본 백인서의 아빤 커다란 덩치에 전체적으로 무뚝뚝하면서 거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엄마에게선 그런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눈코입을 포함한 얼굴선이 깎은 것처럼 수려하면서도 우아했다.

그렇다고 마냥 섬세한 부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우라가 있다고나 할까?

차분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깊었고, 오뚝하게 솟은 콧대는 곧고 높았으며,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은 선이 분명했다. 어디를 보나 백인서와 흡사한 외모였다.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말은 이런 데서나 쓰라고 예시를 보여주는 듯했다.

“더 할 말 없어?”

“음…… 제가 백인서를 꽤 많이 좋아해요.”

“그리고?”

“백인서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고요.”

“엄마, 그거 아냐. 내가 훨씬 더 많이 좋아해. 하루 종일 생각나서 미치겠을 정도로.”

백인서는 마치 살아 있는 엄마와 대화하듯 여상한 목소리였다.

“뭐야.”

“맞잖아. 내가 백만 배는 더 좋아하는 거.”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어쨌든 내가 더 좋아한다는 말은 인정하는 거네?”

“그건 인정.”

이설은 별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백인서를 좋아하는 것보단 백인서가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으므로. 그리고 백인서는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는 것에 대해 딱히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정이설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음번 사진은 등장인물이 둘이었다. 첫 번째 사진처럼 엄마 혼자만 나오는 단독 샷이 아니라.

“이건 몇 살 때 찍은 거야?”

“일곱 살 때.”

“놀이공원 같은데, 맞아?”

눈에 익은 배경을 보고 이설이 물었다.

“어, 맞아. 어린이날에 갔어.”

“아빤 이때도 바쁘셨나 보네?”

“강력범죄는 휴일이고 뭐고 없거든.”

백인서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렇지. 범죄자들은 그런 거 안 따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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