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 *
이설은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됐다고. 괜히 백인서와 도암시 번화가를 돌아다니다가 사람들 눈에 띄어 불필요한 구설에 오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집에서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집을 나오기 전 모자도 하나 챙겼다. 그녀가 사는 105동과 백인서가 사는 101동은 같은 아파트라 해도 정반대 선상에 위치하기 때문에 걸어가자면 제법 시간이 걸렸다. 괜한 호기를 부리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직사광선을 피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진심 너무 덥잖아?
해가 서쪽으로 슬쩍 기울었는데도 밖은 여전히 한증막이었다.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다웠다.
모자 쓰고 나오길 정말 잘했네.
이설은 투창처럼 따가운 햇살이 눈과 볼을 찌르지 않도록 모자를 최대한 눌러썼다. 타박타박 걸어가는 몸 뒤로 홀쭉한 그림자가 총총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오늘 보니 너 좀 귀엽다?
이설은 제 그림자를 보고 씩 웃었다. 백인서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것들마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앞이 보이겠어?”
아파트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101동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가로막혔다. 이설은 눈을 깜박였다. 시선이 닿는 곳에 정확히 백인서의 너른 가슴이 있었다.
“뭐야. 안 나와도 된다고 했잖아.”
“혹시 못 찾을까 봐.”
기어이 공동현관 밖까지 마중 나온 핑계치곤 참으로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나 여기 산다고 했거든?”
이설은 능청스럽게 구는 백인서를 새침하게 쏘아보았다.
“그건 그거고.”
싱글거리며 웃는 백인서의 얼굴 위로 한여름 햇살이 맹렬하게 내려앉았다.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린 낯이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백인서는 편안해 보이는 하얀색 면 티셔츠에 그보다 더 편안해 보이는 회색 운동복 하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너무 근사해서 시선 도둑 역할을 톡톡히 했다.
“들어가자.”
백인서가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다. 이설은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얌전히 잡힌 채로 백인서를 따라 공동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외부 열기가 완전히 차단된 터라 내부는 시원했다. 바깥보다 온도가 몇 도는 더 낮은 것 같았다.
“나 오기 전까지 뭐 하고 있었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는 백인서에게 물었다.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서부터 계속?”
“계속한 건 따로 있고.”
“그게 뭔데?”
“정이설 네 생각.”
“…….”
“왜?”
“은근 뻔뻔한 것 같아서.”
“솔직하면 뻔뻔한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내려다보는 백인서의 관자놀이 부근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 말은 천연덕스럽게 해도 속으로는 전혀 아닌가 보다. 괜히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너는 뭐 했는데?”
“나?”
“너도 하루 종일 내 생각했어?”
기대감에 찬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자기 전에도 내 생각하고, 일어나서도 바로 내 생각하고, 밥을 먹다가도 문득문득 내 생각하고, 막 그랬냐고.”
“그렇게까지 막 생각한 건 아니거든?”
이설은 단박에 부인했다. 맹세코 일어나서 숨 쉬는 모든 순간마다 백인서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아무 때고 튀어나오는 유튜브 광고처럼 불쑥불쑥 백인서가 생각난 건 맞지만.
“어쨌거나 내 생각을 하긴 했다는 얘기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백인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싱글벙글했다. 이설은 그저 손이 축축해졌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려서. 그에 반해 백인서의 손바닥은 태평양처럼 넓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뽀송뽀송했다. 민망함은 온전히 그녀만의 몫이었다.
“저기…….”
도저히 못 참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만 놓아줘.”
“뭘?”
“손 말이야.”
“왜?”
“긴장하면 손바닥에 땀 난단 말이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털어놓았다.
백인서는 모르겠지? 다른 사람이랑 손을 잡고 있는데 자기 손만 축축해지는 일이 얼마나 창피한 현상인지.
“그게 왜?”
“너 불쾌할 거 아냐. 그러니까 그만 놔줘.”
이설은 다시 한번 손을 꼼지락거렸다. 백인서는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더니 아예 깍지까지 껴버렸다. 이제 빠져나갈 방법은 전무했다.
“……야, 그만 놓아달라고 했는데 이게 뭐야.”
“나랑 손깍지 끼는 거 별로야?”
“그게 아니라…….”
“그럼 난 무조건 상관없어. 오히려 좋다고.”
백인서는 뜻 모를 소리만 해댔다.
“뭐가 좋다는 건데?”
“나 때문이라는 거잖아. 손바닥에 땀 나는 거. 그럼 책임도 내가 져야지.”
이상한 논리였지만 이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백인서와 반강제로 손깍지를 낀 채 그의 집 현관문 앞에 섰다.
“아빠는 집에 안 계셔?”
“부산 가셨어. 한동안 못 올라오실 거야.”
“일 때문에?”
“그런 셈이지. 살인 용의자 검거 때문에 가셨다니까. 못해도 일주일은 걸리신다던데?”
백인서는 마치 일상을 이야기하듯 무덤덤했다. 이설은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화가 끊어진 공간에 짧은 침묵이 자리를 차지했다.
“들어와.”
백인서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이설은 백인서를 따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101동은 처음이야.”
“그래?”
“참 신기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한 번도 안 와봤다는 게.”
“그럴 수도 있지 뭐.”
백인서는 뭐든 담백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꼬아서 생각하는 습성은 없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어딘가 모르게 편안해졌다.
“집 되게 깔끔하다.”
이설은 거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만 둘이 사는 집이라 조금 어수선하지는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정리정돈이 잘된 집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단출했다. 어느 집에서나 흔히 자리를 차지할 법한 그림이나 장식용 소품 같은 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 흔한 화분조차 없었다. 정말 딱 있을 것만 있는 인테리어였다.
“시원한 것 좀 마실래?”
이설을 소파에 앉힌 후 백인서가 물었다.
“뭐 있는데? 혹시 오렌지 주스 있음 그거로 줘.”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백인서가 멈칫한다.
“왜?”
“어, 그게…… 오렌지 주스는 없고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유자청하고 라임청뿐인데.”
“그것도 괜찮아.”
이설은 얼른 대답했다.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보통 가정이면 으레 있을 법한 오렌지 주스를 얘기한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오렌지 주스를 들먹였다. 백인서가 주는 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만들어줄게.”
백인서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투명한 유리병 두 개가 금세 밖으로 꺼내졌다. 하나는 온통 샛노란 색이었고 또 하나는 온통 초록색이었다.
“나도 구경해 봐도 돼?”
이설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백인서가 있는 부엌으로 다가갔다.
“그럴래?”
방금 꺼낸 유리병 옆으로 손잡이가 달린 연푸른색 유리잔 두 개를 사이좋게 놓던 백인서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노란 건 틀림없이 유자일 테고, 이 초록색은 라임인가 보다. 그치?”
“맞아.”
“내가 뚜껑 열어볼까?”
“잘 안 열릴걸? 저번에 쓰고 나서 꽉 닫았거든.”
이설은 백인서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는 병을 끌어당겼다. 정말 잘 안 열렸다. 있는 힘껏 비틀어도 꿈쩍도 안 했다.
“진짜네?”
“내가 안 열릴 거라고 했잖아.”
백인서가 씩 웃고는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설이 비틀었을 땐 꿈쩍도 안 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빙그르르 돌아갔다.
“참 쉽지?”
“뭐야, 그 거들먹거리는 태도는. 밥 아저씨라도 되냐?”
“밥 아저씨?”
“몰라? 풍경화 그리면서 꼭 말끄트머리에 ‘참 쉽죠?’ 하고 묻는 아저씨 말이야. 왜 그 머리 뽀글뽀글하고 인상 되게 좋아 보이는.”
이설의 설명에도 백인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있어, 그런 아저씨.”
이설은 픽 웃고는 고개를 숙여 라임청을 들여다보았다. 뚜껑을 열어놓은 덕에 시트러스 계열 과일 특유의 청량한 냄새가 주방 안으로 확 퍼져나갔다.
“향 정말 좋다. 어떻게 먹는 거야?”
“우린 그냥 여기에 탄산수나 사이다 같은 거 타서 먹어.”
“맛있겠다.”
이설은 눈앞에 놓인 유자청과 라임청의 동그란 단면을 마냥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집에선 흔하게 먹는 과일청을 이설의 엄만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설탕이 너무 과하게 들어간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덜어내는 건 네가 해볼래?”
백인서가 유리잔과 집게를 내밀었다.
“잠깐만, 뭐 먹을지부터 고르고. 넌 주로 어떤 거 먹어?”
이설은 사이좋게 뚜껑이 열린 유자청과 라임청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줄어든 양이 거의 엇비슷해서 백인서가 뭐를 더 좋아하는지 가늠이 어려웠다.
“난 보통 라임청 먹어.”
“근데 왜 줄어든 양이 비슷해?”
“우리 아빤 유자청을 더 좋아하니까.”
“음…… 그럼 나도 라임청 먹을래.”
이설은 나란히 놓인 유리병 중에 유자청 뚜껑을 제 손으로 직접 닫았다.
“어느 정도 넣어야 적당해? 세 개? 아님, 네 개?”
손에 집게를 든 채 백인서를 올려보다가 이설은 움찔했다.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백인서가 너무 가까이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붙어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