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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38화 (38/130)

38화

한번은 그런 엄마에게 진지하게 선언했다.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어른이 되면 오빠는 내가 돌볼 거야.」

중학교 1학년 땐가 그랬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수군거리는 소릴 들은 날이기도 했다.

「쟤네 오빠 자폐라며?」

「너 그거 인제 알았냐?」

「난 경서 초등학교 안 나왔으니까 몰랐지. 왜, 어땠는데?」

「몰라. 그때 무슨 통합교육인가 뭔가 해서 이상한 애들하고 같이 수업했거든?」

「근데?」

「완전 끝장났지 뭐.」

「그렇게 이상했어?」

「이상하다 뿐이겠냐? 난 3학년 때 딱 한 번 같은 반이었는데, 쟤네 오빠 존나 웃겼잖아.」

「어떻게?」

「큰소리만 나면 아주 지랄발광을 떨더라고. 의자 밑에 숨어서 돌고래 비슷한 소리도 내고. 우리 담임 보다못해 울어버렸잖아. 그뿐이냐? 오줌도 툭하면 싸서 1년 내내 기저귀 차고 다녔어.」

「헐, 초등학교 3학년이? 믿어도 되는 얘기야?」

「제발 믿어. 100 퍼센트 실화니까.」

그 뒤로는 길이 갈라지는 바람에 더 듣지 못했다. 그래도 키득대는 웃음소리와 그 웃음소리 뒤로 자연스럽게 따라붙던 욕설만은 또렷하게 귓전에 머물렀다.

좀 안 들리게나 떠들지.

이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얘기를 중학교에 와서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오빤 일반학교에서 고작 3년을 버티다가 결국 집에서 차로 40분이나 걸리는 정신지체 특수학교로 전학을 갔으므로.

물론 자폐학생은 특수교육법에 따라 원하는 학교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게 특수학교든 일반학교든 상관없이. 정책이 그랬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애, 비장애학생들이 함께 교육받을 수 있는 통합교육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이 받쳐주지 않아서 문제였지.

오빠가 특수학교로 전학 간 지 여러 해가 지났으므로 이제는 저런 뒷담화를 안 들으려나 했는데 복병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리고 아무런 죄의식이나 배려 없이 떠들어대는 그 복병들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다.

「네가 왜?」

어른이 되면 오빠를 돌보겠다고 선언한 이설에게 엄만 처음으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부모가 버젓이 있는데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그러면서 엄만 덧붙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런 말은 엄마를 정말 슬프게 하는 거라고.

하지만 엄마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열네 살 이설이 보기에 엄만 지나치게 말랐고, 때론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그래서 이설은 가끔씩 꿈을 꾸었다. 예고도 없이 엄마가 죽어버리는 꿈을. 그 바람에 오빠와 이 세상에 단둘만 남는 그런 끔찍한 꿈을.

입술을 달싹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는 동안, 오빤 옆에 앉아서 삶은 밤을 먹고 있었다. 아니, 먹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을 때 오빤 음식물을 입안에 넣기만 하고 절대 삼키지 않았다.

지금이 딱 그 상태였다. 양 볼을 햄스터처럼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는 모양새가.

* * *

전화는 엄마와 오빠가 집을 나서고 10분인가 지나서 왔다. 윤송아에게서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같은 과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떠난다더니 그새 돌아왔나 보다. 이설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행은 잘 다녀왔어?”

「당연하지. 내가 또 노는 거 하난 전문이잖냐.」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는 윤송아에게서 한여름의 싱그러움이 물씬 풍겼다.

“어디 어디 갔었는데?”

「일단 프랑스.」

“우와, 나도 항상 거기 가고 싶었는데. 어땠어?”

「먼저 베르사유 궁전하고 루브르 박물관을 섭렵한 다음에.」

윤송아가 본격적으로 말을 늘어놓기 전 에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괜히 다 듣고 싶다고 했나?

이설은 은근슬쩍 후회가 됐다. 윤송아는 한번 전화통화를 하면 기본이 1시간인 친구였다. 그런데 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안 봐도 이후가 훤했다. 기숙학원에만 있다 보니 잠깐 그 중요한 사실을 깜박했나 보다.

예상대로 윤송아는 장장 1시간 20분에 걸쳐서 자신의 유럽 여행기를 펼쳐 놓았다. 그러더니 말 끝머리에 생각난 듯 물었다.

「그래서 넌 지금 어딘데?」

“빨리도 물어본다. 이렇게 전화 통화하는 거 보면 몰라?”

이설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설마 집?」

“어, 집이야.”

「뭐야, 휴가받았구나? 잘됐다. 마침 선물도 줄 겸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

「왜, 안 돼?」

“그게…… 약속이 있는데 어쩌지?”

「혹시 백인서?」

“……어떻게 알았어?”

이설은 조금 당황했다. 윤송아의 입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백인서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걸 듣고.

「야, 고등학교 동창들 사이에 소문 쫙 퍼졌어. 백인서랑 정이설 사귄다고.」

“……그래?”

「어제도 둘이 만났다며?」

“그렇긴 한데.”

「언제부터 사귄 거야?」

윤송아가 대뜸 물었다. 말투며 목소리가 꼭 옆에 붙어서 속삭이는 것 같다.

“얼마 안 됐어.”

「그래도 나한테는 귀띔 좀 해주지. 다른 애들한테 전해 듣고 완전 섭섭했다고.」

“미안.”

「농담이야, 농담. 내가 아는 정이설이 ‘나 백인서와 사귀고 있습니다.’ 하고 떠벌릴 성격이냐고. 다 이해한다, 이해해.」

방금까지 섭섭했다면서 윤송아는 금방 미안해할 필요 없단다.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어?”

「딱 봐도 알겠네. 백인서지?」

이설은 꼭 집어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어색해서 침묵을 지켰다. 윤송아가 알아서 먼저 말을 잇는다.

「백인서 걔가 오죽 널 쳐다봤어야지. 고등학교 때 말이야. 기억 안 나? 우리 저녁 먹고 운동장으로 산책하러 나가면 백인서 걔가 체육관 근처에 서서 너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거. 오죽하면 내가 물어봤었잖아. 둘이 무슨 사이냐고.」

“아아, 그때?”

「하도 쳐다봐서 내가 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고.」

전화선 너머로 윤송아가 키득댔다. 남의 연애사는 만인의 즐거움이라더니 틀린 말 하나 없다. 윤송아는 그 뒤로도 백인서와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더 꼬치꼬치 캐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여행 선물도 줄 겸 기숙학원 들어가기 전에 꼭 만나자는 말을 혹처럼 남기고서.

우리가 소문이 날 정도로 그렇게 요란하게 돌아다녔나? 겨우 한 달에 한 번 카페나 영화관 정도를 드나든 게 전부였는데? 아니면 올림픽 때문에 다들 백인서에게 관심이 많아진 건가?

이설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금방 수긍이 갔다.

백인서는 뭐를 어떻게 해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일단 피지컬부터 압도적이지 않은가. 아무리 요즘 이십 대가 예전보다 발육이 좋다고 해도 190이 넘는 사람은 드물었다. 게다가 백인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냥 키만 비쭉 큰 사람과는 체격 자체가 달랐다. 소문이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어쩌면 좋지? 난처하게 돼버렸잖아.

이설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건 걱정되지 않았다. 이런 얘기가 아빠의 귀에 들어갔을 때 몰려올 후폭풍이 걱정될 뿐.

“아, 맞다. 백인서하고 약속 장소 정해야 하는데.”

이설은 서둘러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4시 40분이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백인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아, 미안. 친구랑 수다 좀 떠느라고. 혹시 전화했었어?”

「응, 두 번이나.」

“왜?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내용은 참 로맨틱한데 목소리 톤은 백인서답게 무덤덤했다. 그런데도 설레는 건 뭔지.

“진짜 미안.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오늘 어디서 만날래?」

“그러게, 어디서 만나지?”

「별일 없으면 우리집에 놀러 올래?」

“너네 집? 밖으로 안 나가고?”

「오늘 되게 덥대. 37도인가 그럴걸?」

“어제도 그 정도였는데 뭘. 난 상관없어.”

「너 햇빛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니었나?」

전화기 너머로 백인서가 멋쩍게 웃었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

이설은 곧바로 수긍했다. 직사광선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래 쐬고 있으면 목 주변이 온통 가려워지다가 종국에는 울긋불긋 꽃을 피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설은, 햇빛이 강해지는 여름만 되면 본능적으로 그늘을 찾아 걷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거봐. 내가 제대로 봤다니까?」

“칭찬해줘야 하는 거야?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제법 겸손하네?”

「내가 또 한 겸손하지.」

“뭐야.”

마음을 여니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도 가슴이 설레면서 웃음꽃이 잔뜩 오고 갔다.

“동호수가 어떻게 돼?”

「101동 910호.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여. 혹시 못 찾겠으면 내가 마중 나가도 되고.」

“됐거든? 나 여기 산 지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그거 하나 못 찾을까 봐?

「그래도 마중 나가면 좋지.」

“귀찮게 그러지 마. 내가 알아서 갈게.”

「언제 올 거야?」

“……음.”

이설은 가족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빈 집 안을 훑어보았다.

“……지금 가도 돼?”

백인서는 뭐라고 할까. 만약 그녀가 통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가 보고 싶어 미치겠다는 걸 안다면. 마냥 담담하게 굴었던 어제저녁에도 사실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기숙학원에서 밤 부엉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습관처럼 그를 떠올렸다는 걸 털어놓는다면.

「그럼 나야 완전 좋고.」

백인서의 목소린 실제로 들어도 다정하지만, 지금처럼 전화선 너머로 들으면 더 근사했다. 목소리로 누군가를 어루만져준다면 꼭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알았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을 즈음에는 목이 콱 잠겨버렸다. 누군가를 이 정도로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놀라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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