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포악한 짐승이 떠난 자리엔 초식동물 둘과 어쩌면 그 포악한 짐승의 못된 성질머리를 그대로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초식동물만 오롯이 남았다.
“우리도 어서 마저 밥 먹자.”
엄만 괜히 기운이 넘쳤다. 아빠가 식사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머지 식구들도 죄다 식사를 중단한 상태였다.
“이런, 찌개 다 식었겠다. 엄마가 다시 데워줄게.”
엄마가 종종걸음으로 인덕션 앞으로 갔다.
“됐어, 그냥 먹어.”
이설은 엄마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맛없잖아.”
“여름이라서 괜찮아. 냉국도 먹는데 뭘.”
“그거랑은 다르지. 한여름에도 찌개는 따끈해야 맛있는 법이야.”
“그럼 엄마는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데워올게.”
이설은 엄마를 반강제적으로 자리에 앉힌 뒤 직접 인덕션으로 갔다. 화력을 키우고 찌개를 다시 데우는 동안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귀 뒤로 넘기지 못하고 옆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엄만 더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마음이 또 한 번 찌르르 우는 순간이다.
* * *
“우리 지금 승마장 갈 건데 이설이 너도 시간 되면 같이 갈래?”
점심으로 오빠가 좋아하는 참치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먹고 한두 시간 정도가 흐르자 엄만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난 약속 있다고 했잖아.”
“맞다. 누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
“친구 누구? 송아?”
“송아 말고 다른 친구.”
엄만 그게 누굴까 잠시 탐색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러더니 이내 친구의 실체를 알아내긴 글렀다는 걸 파악하고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럼 우리 둘만 가야겠네.”
엄만 이설에 관해선 참 포기가 빨랐다.
엄마와 오빠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607호 아주머니와 맞닥뜨렸다.
“어머, 이설이 왔구나?”
607호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들어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하이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설은 조금 쭈뼛거렸다. 607호 아주머니를 보면 자연스럽게 공동현관과 접해 있는 계단이 떠올랐고, 그 계단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 백인서와 나누었던 첫 번째 키스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들킨 것도 아닌데 목덜미가 지레 발그레해졌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607호 아주머니가 이설의 얼굴이며 드러난 목과 팔 언저리를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저 시선을 피하느라 백인서에게 안겼었는데. 그러다 키스까지 이어졌고.
생각해보니 607호 아주머니는 나름 엄청난 역할이었다. 그녀와 백인서의 관계발전에 있어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이설은 피식 웃었다.
“힘들어도 꾹 참아. 여름 지나면 금방 가을이고, 그러다 보면 수능 치르는 거야. 우리 애들 보니까 그렇더라고.”
607호 아주머니는 아들만 둘이었다. 큰아들은 서른 가까이 됐고, 둘째 아들은 터울이 조금 있어서 스물넷인가 그랬다. 공부를 열심히 한 건지,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지만, 두 형제가 전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대학에 진학했다. 큰아들은 취업까지 잘해서 지금 관광공사인가 도로공사인가에 다닌다고 들었다. 그래서 607호 아주머니는 자식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아파트 전체를 통틀어 최고였다.
“분명 이설이도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좋을 리가 있겠어?”
607호 아주머니가 살가운 손길로 이설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었다. 그러더니 엄마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형설이는 오늘도 승마장 가는 거야? 일주일에 두 번이라고 했지? 화요일하고 금요일.”
607호 아주머니는 모르는 게 없는 모양이다. 이설의 집을 포함해 온 동네 가정사를 두루두루 다 꿰고 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냥 호기심이 많은 거지.」
언젠가 이설이 투덜대는 말투로, 607호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으냐고 한마디 했더니 엄마가 웃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바깥 날씨 엄청나게 더운데 조심해서 다녀와. 에어컨 팍팍 트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엄마에게 607호 아주머니가 손까지 흔들어주며 당부했다.
“그럴게요.”
작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이설은 607호 아주머니가 무슨 말이라도 걸까 싶어 얼른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잘 가고 있나 확인 겸 베란다로 향했다. 눈에 익은 빨간색 소형차가 후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를 픽업하는 데 사용하라고 아빠가 오래전에 사준 차였다.
이젠 완전 프로 레이서네. 처음엔 진짜 불안, 불안하게 운전했는데. 특히 주차할 땐 선 안에 집어넣질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집어넣다, 뺐다 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설은 베란다에 팔을 괴고 엄마가 모는 빨간색 자동차가 좁은 아파트 단지 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후문을 나서자마자 속도를 내기 시작한 차는 금방 다른 차들 속에 섞여 시야에서 사라졌다.
운전하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오늘은 날도 굉장히 덥고. 607호 아주머니의 말처럼 에어컨은 팍팍 틀고 가려나?
이설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엄만 웅크린 개구리 모양의 빨간색 소형차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몰고 다녔다. 귀찮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사실 운전은 엄마의 오랜 일상이기도 했다. 이설이 기억하기 훨씬 전부터 엄만 일주일 내내 운전을 했다. 오빠가 발달장애 1급 진단을 받기 전엔 알음알음 얻어낸 정보를 가지고 상담센터와 미술치료센터 같은 델 다니느라 여기저기를 전전했고, 다섯 살 무렵에 정확한 진단을 받고 난 후엔 담당병원과 치료센터를 오가느라 일주일을 빠듯하게 보냈다.
아빤 본인 혼자만 나랏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설이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엄마였다.
그것뿐이면 다행이다. 엄만 평생 눈물 마를 새 없는 데다 고달프기까지 했다. 아빤 그래도 정해진 퇴근 시간이라도 있지. 엄마에겐 그것조차 없었다. 오빠가 태어난 이후 장장 스물두 해나 이어지는 일이었다.
돌이 되기 전까진,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자지러지게 울어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턴 시도 때도 없이 괴성을 질러대며 울어서. 다른 아이들이 모두 말을 배운다고 하루가 다르게 어휘력이 늘어날 땐, 눈도 안 마주치고 뜻 모를 말만 웅얼대서.
말이 더디니 싫어도 꽥, 좋아도 꽥, 오빤 하루 온종일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목소리는 좀 커서 엄만 고막이 터지지는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했었더랬다. 그렇지만 그때까진 다들 애가 말이 늦되고 행동이 별나다고만 생각했을 뿐 그게 병이라곤 생각 못 했단다.
오빠가 태어난 이후 줄곧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빤 정식으로 발달장애 진단명이 나온 후부턴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서, 퇴근 후 집에 오면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는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는 아침부터 시작된 오빠의 꽥꽥 소리에 도저히 못 참고 폭발해버렸다. 집에 있는 키보드와 TV 등이 죄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졌으며, 박살이 난 수족관으로 인해 거실은 물난리라도 난 것처럼 흥건한 물바다가 되었다.
위태위태하던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공포스럽게 바뀌었고, 그날 저녁 오빤 저녁을 먹다가 예고도 없이 거품을 물며 발작을 일으켰다. 이설이 7살 때 일이었다.
한 번도 그때의 집안 공기를 잊어 본 적이 없다. 물바다가 된 거실 바닥에 누운 채 정신없이 퍼덕거리던 샛노란 열대어 서너 마리도.
원래도 마른 편이었던 엄만, 폭력적인 성격의 아빠와 통제 불가능한 오빠 때문에 한때 몸무게가 38킬로까지 빠진 적도 있었다.
「영은아, 너도 좀 쉬어야 하지 않겠니? 언제까지 형설이만 붙잡고 있을 건데. 그러다 너부터 죽겠다.」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거들고 나섰다. 물론 오빠를 돌본 지 석 달 만에 나가떨어지셨다.
엄만 할머니를 고향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궁여지책으로 국가에서 마련해주는 활동 보조 서비스를 받았다. 오빠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그제야 살 것 같았다고 한다.
하루 몇 시간이나마 오빠에게서 해방된 엄만 친한 아주머니 한 분과 동네 문화센터를 찾아갔다. 민화를 배워보고 싶다는 소박한 목적에서였다.
부지런히 실력을 키워 언젠가는 회원들과 전시회도 열겠다는 야무진 포부로 시작한 민화 수업은, 불행하게도 시작한 지 겨우 3주도 못 채우고 끝이 났다. 오빠가 활동 보조 도우미에게 상습적으로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이후 엄만 지금까지 모든 걸 혼자서 다 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늘 불안해했다. 오빠 때문에 동생인 그녀에게까지 발달장애가 올까 봐. 같은 치료센터에 다니는 어머니 한 분에게서 매일 소리 지르고 자지러지게 우는 형 때문에 동생 역시 스트레스성 발달지연 장애가 왔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다.
아빠는 뭐 했냐고?
엄마가 혼자 동동거리는 동안, 아빤 그냥 방관자였다. 저런 자식을 두고도 이혼 안 해주고 잘살고 있으니 아버지로서의 도리는 다했다는 주의였다. 뭣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그런 아빠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내와 자식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고.
엄만, 여기저기 오빠를 태우고 다니느라 운전실력은 나날이 늘어났지만, 그에 비례해 마음속 그림자 역시 손 쓸 수 없을 지경으로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