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정말이라고. 대회 나가서 메달 딸 때마다 포상금 들어온 거 하나도 안 쓰고 모아놨단 말이야. 액수도 제법 될걸? 거기다 이번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포상금도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들어올 거고.”
“그 귀한 돈을 나 밥 사주는 데 쓰겠다는 거야?”
“물론 할머니랑 아빠한테도 한턱 거하게 쏴야지. 내가 또 그렇게 막돼먹은 자식은 아니거든.”
“아무튼 오늘은 내가 살래.”
정이설은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설명을 해줬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오늘만 먹어주라. 나 여유 있다고 했잖아.”
“그러고는 싶은데, 너 힘들게 훈련해서 번 돈이잖아. 잘 모아놨다가 의미 있는 데 써.”
“나한텐 정이설 너랑 밥 먹는 게 제일 의미 있는 일이야. 그것만 생각하면서 훈련했다고. 안 그랬으면 진작에 선수촌 뛰쳐나왔을걸?”
“거짓말. 너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 아니잖아.”
정이설이 새침하게 받아쳤다.
“잘 아네. 나 쉽게 포기하는 사람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제발 내가 밥 사주게 해줘라.”
“하, 이걸 또 그렇게 써먹는다고?”
“그 정도로 너한테 밥 사주고 싶다는 거잖아.”
“지금은 이래놓고, 나중에 뒤돌아서 돈 아깝다는 둥 막 그러는 거 아냐?”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짓은 하래도 못 하거든?”
“진심이지?”
“어, 완전. 하늘에 있는 우리 엄마 걸고.”
인서는 고개까지 맹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속으로 티 안 나게 중얼거리기는 했다.
‘엄마,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엄마를 들먹여서. 그래도 용서는 해주실 거죠?’라고.
아니나 다를까, 밥 하나 먹는데 무슨 엄마까지 들먹이냐며 정이설이 웃는다. 볼우물이 살짝 파인 걸 보니 절대 비웃는 건 아니다. 정이설은 진심으로 기분 좋을 때만 저 볼우물이 환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니까. 인서에겐 그 짧은 순간조차 심장 떨리는 마법이었다.
“근데 너도 참 이상해. 왜 그렇게까지 사주려는 거야? 밥이 뭐 중요하다고.”
“네가 너무 좋으니까.”
“……어?”
무방비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정이설은 뒤늦게 알아들은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색 노을로 구석구석까지 버무려진 눈동자가 숨 막힐 듯 매혹적이었다.
“너 좋아한다고.”
“…….”
어렵게 말을 잇는 동안에도 쿵쿵 뛰어대는 심장이 여실히 느껴졌다.
정이설은 가타부타 입을 다문 채였다. 꼬박꼬박 그의 말을 받아치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너무 느닷없는 고백이었나?
인서는 멋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목 뒷덜미를 쓱 문질렀다.
“그러니까 밥 좀 얻어먹어 줘라. 이렇게 부탁할게.”
인서는 뻣뻣하게 잠긴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숫제 애걸복걸에 가까웠다. 그래도 상관없다. 정이설이 허락만 해 준다면.
“……알았어.”
드디어 포기한 건가?
정이설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색이 한층 더 진해진 노을 속에서 그녀의 앞머리가 살랑 흔들렸다. 연한 눈동자 색과는 달리 푸른 빛이 도는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인서는 내친김에 더 나아갔다.
“메뉴도 네가 골라.”
“그건 사주는 사람이 고르는 거 아냐?”
“얻어먹는 사람이 골라야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있어.”
“여기.”
인서는 짓궂게 웃으며 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그러다 못된 여자 만나면 완전 호구 된다. 빈털터리 되는 거 순식간이라고.”
“그런 걸 두고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 거다.”
“왜?”
“난 정이설 아니면 다른 어떤 여자도 안 만날 거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거.”
인서는 상체를 깊숙이 숙이고 정이설과 눈을 맞추었다.
“내가 아는 정이설은 절대 못된 여자가 아니거든.”
“야, 백인서.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오글거려 죽겠다고.”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는데, 정이설은 아주 칠색 팔색을 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더는 못 들어주겠다며.
5장. 혀가 아리도록 달콤한 (1)
이설이 기숙학원에 있는 동안 그녀의 오빤 승마를 시작했다. 정식 교육은 3월부터 5월까지였다. 치료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환우 보호자 중 한 사람이 추천해 준 건 아니었을까 이설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승마장엔 일주일에 두 번씩 가야 하는데 위치가 시 외곽 지역에 있는 관계로, 오고 가는 시간에 승마교육까지 전부 합치면 거의 서너 시간이 소요되는 긴 일정이었다.
아빤 엄마에게 그 얘기를 듣고는 평일 오후를 전부 잡아먹는 스케줄이라며 못마땅해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는 아빠를 오랜 시간이 걸려 설득한 사람은 엄마였다. 평소엔 자기 주관 하나 없이 조용조용한 것 같아도 그녀의 엄만 아들에 한해서라면 못 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거의 한 달 동안 부탁을 했단다. 아빠가 기분 좋아 보이는 날만 골라서. 이설보다는 오빠에게, 오빠보다는 엄마에게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 아빤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히면서도 결국엔 허락을 해줬다.
오빤 승마장에 가는 걸 정말 좋아했다. 프로그램 구성이 어떻길래 그렇게 좋아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엄만 기다렸다는 듯 설명에 들어갔다.
도암시에서 지원을 받아 3개월 과정으로 진행하는 승마 교실인데, 관내 특수학교 재학생들과 정신지체나 발달장애가 있는 대학생 및 성인이 그 대상이란다.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같은 조에 속한 조원들과 짝을 이뤄 ‘말과 친해지기’, ‘말에게 먹이 주기’, ‘말과 걷기’, ‘보조 승마’ 같은 것들이었다. 일종의 재활 승마인 셈이다.
프로그램 신청자가 정원을 초과할 정도로 많아서 엄만 혹시라도 오빠가 교육에 참가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다행히 오빠에겐 교육기회가 주어졌고, 한번 그곳에 다녀온 이후 오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승마장 가는 걸 좋아하게 됐다. 그만두는 건 아예 선택지에 없을 정도로 푹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그래서 엄만 정식 교육 기간이 끝나고도 마음에 맞는 부모들 몇몇과 개인적으로 승마장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었다.
마침 이설이 기숙학원에서 휴가를 받아 집에 머무르고 있던 날에도 승마장이 예약되어 있었다. 백인서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오빤 아침부터 기분이 고양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는 세수를 하네, 옷을 갈아입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가족들 정신을 쏙 빼놓았다. 아빤 이른 아침부터 오빠가 방방 뜬 상태로 옷을 차려입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자,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오빠의 고양된 기분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의자에서 들썩들썩, 먹으라는 음식엔 손도 안 대고 두리번, 두리번. 이건 앉아 있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보다 못한 아빠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뭐 한다고 벌써 이 난리야. 승마장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잖아.”
신경질적인 말투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빤 고양된 기분을 풀지 않았다. 한번 뭐에 빠지면 아무리 아빠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오빠였다. 그땐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니까.
혹시라도 강제로 못하게 하면 하루 종일 자기 뺨을 때리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을 온 식구가 지켜봐야 했다. 그걸 익히 알고 있는 아빤 몇 번을 더 나무라다가 잔뜩 경직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를 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엄마와 이설뿐이다.
“……밥 더 안 먹어요?”
아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엄마가 물었다. 거의 남기다시피 한 밥공기를 흘끗 내려다본 후에.
“다 먹었어.”
더없이 냉정한 목소리였다. 더불어 지긋지긋하다는 속내를 감추지도 않는 말투였다.
“몇 시에 나갈 거야?”
현관 앞에서 아빠가 뒤따라 나온 엄마에게 물었다.
“점심 먹고 조금 쉬었다 가려고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승마 시간이 뒤로 많이 미뤄졌어요.”
“그럼 오늘 저녁도 혼자 먹어야 하는 거야? 이설이도 약속 있다며.”
“밥이랑 반찬이랑 전부 다 해놓고 갈 거예요. 그냥 꺼내서 먹으면…….”
“누가 지금 그런 걸 따지는 거냐고.”
“……미안해요.”
엄마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꾸만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야 아빠의 경직된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역시나 아빠가 누그러진 표정으로 엄마를 내려다본다. 심지어는 잠깐이나마 애틋한 눈빛을 보이기까지 했다.
“날 더우니까 승마장 갈 때 운전 조심하고.”
“알았어요.”
“이거야 애고 어른이고 마음이 안 놓이니 원.”
아빠가 엄마의 볼이라도 쓰다듬으려는 건지 손을 살짝 들었다가는 이설과 눈이 마주치자 도로 홱 내렸다.
“애가 세상모르고 방방 뜬다고 당신까지 방방 뜨면 안 되는 거 알지?”
그 말을 끝으로 아빤 현관문을 열었다. 이설은 오빠와 나란히 엄마 뒤에 서 있다가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려는 차에 아빠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너도 일찍 일찍 다녀. 재수생 주제에 친구 만나고 돌아다녀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그런 것도 다 유주처럼 번듯한 대학에 다녀야 재미있는 거야. 꼴랑 재수나 하는 처지에 눈치도 없이 이곳저곳에 끼는 거, 앞에선 다들 웃어줘도 뒤에선 비웃음거리밖에 안 돼. 알았어?”
“……네.”
이설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저기에 감히 토를 달았다간 오만 성질을 다 받아줘야 끝이 날 테니까.
만약 휴가 때마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백인서를 만났다는 걸 알면 아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거품이라도 물겠지? 이설은 씁쓸히 생각했다.
“하여간에 대답 소리하고는.”
아빠가 혀를 한번 쯧 차고는 현관문을 나갔다. 이내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