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되어 줄게, 기꺼이-35화 (35/130)

35화

인서는 지하철에서부터 내내 쓰고 있던 야구모자를 과감히 벗어 빈 옆 좌석에 던져놓았다. 팝콘 또한 걸리적거리지 않게 모자 옆으로 치워버렸다. 왜 그러나 싶어 정이설이 흘끔 돌아보았다.

그대로 입술을 맞물렸다. 정이설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나 몸을 뒤로 물리거나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인서는 잠깐 입술을 뗀 다음 이설의 가는 목덜미를 손으로 감쌌다. 순간적으로 밝아진 스크린 덕에 커다래진 눈동자가 그대로 보였다. 환한 햇살 아래에선 초록색이 점점이 박힌 연갈색 눈동자가 지금은 마냥 새까맣기만 했다.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더욱 깊숙이 맞물렸다. 츕, 소리가 났다. 그 상태로 입술을 빨았다. 방금 먹은 캐러멜 팝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의 입술에서도 분명 똑같은 팝콘 냄새가 날 테지? 속이 대번에 찌르르 울렸다. 비록 그것이 한갓 팝콘의 잔향일지라도 정이설과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었다. 서슴없이 핥아 올리는 혀끝으로 정이설의 매끈한 입술이 느껴졌다. 밤새도록 핥고 빨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억눌린 신음과 함께 연신 핥아대자 정이설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도 밀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맞붙은 입술 틈으로 가쁜 호흡이 새어 나오며, 그가 들어가기 좋게 입술이 벌어졌다.

거침없이 열에 들뜬 혀를 달콤한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촉촉하게 젖은 혀가 조급한 혀에 서툴게, 그러나 매우 적극적으로 감겨들었다. 내색은 안 했으나 정이설도 속으로는 키스를 원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에 등허리로 저릿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혹시라도 다른 관객들이 그들의 키스 소리를 들을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제법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고, 마침 화면에선 최후의 발악을 하는 빌런과 그를 저지하려는 히어로들이 온갖 굉음을 내며 마지막 격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키스는 믿을 수 없이 오래 지속되었다. 악에 받친 빌런이 괴성을 지르며 폭주하고, 결국에는 그런 극악한 빌런을 제압한 히어로가 영웅적인 훈계를 늘어놓을 때까지 계속. 그래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첫 키스를 나눈 이후 무려 다섯 달 만에 나누게 된 키스였다. 이걸 하고 싶어 아침이고 저녁이고 얼마나 몸이 달았었는지 모른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땐 스크린 위에서의 격투 장면도 서서히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인서는 정이설과 제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진 타액을 혀로 말끔하게 핥아 올린 후 마무리 삼아 다시 한번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정이설이 작게 웃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그가 혀를 얽고 진하게 키스할 때보다 지금의 행동을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순전한 착각인가?

* * *

쿠키 영상을 본다고 엔딩 크레딧까지 전부 감상하고 영화관을 나왔을 땐 어디고 할 것 없이 저녁놀이 새빨갛게 내려앉아 있었다. 원하는 만큼의 키스를 하고 난 후라 인서는 극히 만족스러운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바라보는 여름 노을은 수식어가 불필요한 정도로 장관이었다.

“도암시는 노을이 참 예뻐, 그치?”

정이설이 중얼거렸다. 영화관 주변으로 길게 걸린 노을이 그녀의 얼굴과 목에 불그스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것 또한 인서에겐 노을빛 못지않게 장관이었다. 입안이 불쑥 말라올 만큼.

“……어, 세상에서 제일 근사해.”

인서는 지하철에서처럼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상태로 이설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또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글쎄…… 넌?”

정이설이 부드럽게 올려다보았다. 저녁노을에 알맞게 버무려진 정이설의 눈동자는 뭐랄까…… 신기했다. 잘 익은 감을 곳곳에 박아놓은 것처럼 진한 주홍빛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시시때때로 색을 달리하는 눈동자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속에 있던 생각이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뭐가?”

“네 눈.”

“내 눈이 왜?”

“총천연색이잖아.”

“……어떻게?”

얌전하게 되묻는 입술 위로도 감색 노을이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다.

“음……, 검은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갈색도 아니란 말이지. 어떨 때 보면 황금색 같기도 하고. 딱 지금이 그래.”

“좀 이상하긴 하지?”

정이설이 낮게 웃었다.

“다들 그러더라고. 눈 색깔 진짜 특이하다고. 조상 중에 외국인 있냐고 묻는 애들도 가끔 있었어.”

“이상하긴. 내 눈엔 되게 예쁘기만 한데.”

“진짜?”

“응, 진짜.”

인서는 무슨 엄중한 서약이라도 하듯 자못 비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정이설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깊게 접혔다. 그럴 때면 오른쪽 볼에만 희미하게 볼우물이 생겨났다.

그걸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 체육대회에서였다. 정이설은 반 대표로 계주를 뛰었는데, 역전까지 해가며 우승을 차지했었다. 악바리 근성이라는 게 뭔지를 제대로 보여준 후, 정이설은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오른쪽 볼에 작고 앙증맞은 볼우물을 새기면서.

얼마나 예뻤는지 그날 밤엔 꿈도 꾸었더랬다. 정이설이 자신에게만 볼우물이 깊게 파이도록 웃는 꿈을.

그러고 보니 꿈이 이루어진 건가?

인서는 뭔가 굉장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한테 예쁘면 됐어.”

“……어? 뭐가?”

“백인서 너한테만 예쁘게 보이면 됐다고. 내 눈동자 말이야.”

감동이 연타로 심장 한복판을 두들겨댔다. 이게 뭐지? 복이 한꺼번에 터지는 날인가?

“그, 그렇지. 나한테만 예쁘면 됐지.”

“너도 동의하는구나?”

“당연한 거 아냐? 굳이 다른 녀석들한테까지 예뻐 보일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도 안 되는 거고.

인서는 뒤따라 나오려는 말을 기분 좋게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하지만 얼굴 가득 웃음기가 고이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흘러넘치는 미소로 눈가를 선명하게 접으며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꼬마김밥과 떡볶이, 양꼬치, 손만두 전골, 육회비빔밥, 회전초밥, 등등의 간판이 한꺼번에 시야를 어지럽혔다.

문득 배가 고파졌다. 생각해 보니 먹은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음료수 한 잔과 캐러멜 팝콘이 다였다. 그것도 키스에 열중하느라 반도 먹지 못하고 남겨버린. 아침은 또 어떻고. 정이설과 데이트 한다는 기대감에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때우지 않았는가. 이러니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배 안 고파? 아까 딸기 스무디하고 영화관에서 팝콘 먹은 게 전부잖아.”

“넌?”

정이설이 되물었다. 그에게만 예쁘면 상관없다는 총천연색 눈동자를 하고서.

시선이 부딪치기 무섭게 심장이 뛰었다. 방금 전 대화에선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으나 사실은 진심이었다. 저 예쁜 눈동자가 오직 그에게만 유의미한 모습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말했던 건.

그 아래 입술도 다르지 않았다. 저곳에 입술을 맞대고 혀로 핥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이어야 했다.

근데, 좀 부은 것 같은데. 생각 탓인가?

인서는 상체를 숙이고 이설의 입술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왜?”

당황한 정이설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아니, 좀 부은 것 같아서.”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런가?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정이설의 입술은 어딘가 모르게 부어오른 듯도 했다.

“너무 많이 빨았나 보다.”

“뭐래. 그런 거 아냐.”

노골적인 표현에 정이설은 질색하며 입술을 가렸다. 그러고는 잘 들리지도 않게 웅얼거렸다.

“그것 때문 아니라고.”

“그럼?”

“나 원래 입술 도톰해. 그게 다야.”

“혹시 또 모르지.”

“뭘?”

“내가 핥고 빨아서 더 도톰해진 건지.”

“그렇다는 얘길 듣고 싶은 거야, 설마?”

정이설이 눈을 가늘고 뜨고 쳐다보았다. 입술 위로는 그가 만들어놓은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인서는 뭔지 모르게 심히 뿌듯해져서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면 말고.”

“이제 보니 너 굉장히 유치하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걸로 막 우기는 걸 보니.”

“그런 거라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인서는 말끝으로 씩 웃으며 이설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힘주어 꾹 눌렀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그의 손가락 힘에 의해 보기 좋게 눌렸다가 금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짓궂은 마음에 한 번 더 눌렀다. 같은 과정이 빠른 속도로 반복됐다.

“그만하지, 백인서?”

핀잔을 주려고 정이설이 입술을 벌렸다. 그 바람에 아랫입술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안으로 쑥 밀려 들어갔다. 예상에 없는 행동이었다.

정이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런 경우엔 뭔가 자연스럽게 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정작 반응을 보인 건 입술이 아니라 눈치 없는 아랫도리였다. 인서는 당황해서 얼른 손가락을 빼냈다. 관자놀이가 순식간에 확 달아올랐다.

“맞다, 우리 밥 먹자는 얘기하고 있었지? 뭐 먹을래? 내가 살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또?”

“……또라니?”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항상 네가 사잖아. 돈 못 써서 안달 난 사람처럼.”

인서는 그게 대체 무슨 문제가 되나 싶었다.

“아까도 음료수, 영화표, 하다못해 팝콘까지 다 네 돈으로 샀잖아. 그러니까 저녁값은 내가 낼 거야. 맨날 얻어먹는 거 양심에 찔린다고.”

“너 모르는구나.”

“내가 뭘?”

“나 은근 부자야.”

인서는 제 말을 정이설이 허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저를 올려다보는 정이설의 눈초리엔 의구심이 한가득 차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