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어디야?」
목적지를 서너 정거장 앞두고 전화가 왔다. 정이설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너는?”
「난 지금 약속 장소.」
“벌써?”
「조금 일찍 도착했거든.」
“……어, 미안.”
인서는 얼굴이 홧홧해졌다. 뭇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도중에 지하철에서 내려 모자를 사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돼버렸다.
「아니야, 내가 일찍 온 건데 뭘.」
“그래도.”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와.」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역사를 빠져나왔다. 어서 이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것도 간절히.
덥네.
몇 걸음 걷지 않아 드는 생각이었다. 쨍한 여름 햇살이 야구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과 목 주변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침 빨간불이라 인서는 신호등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익숙한 도암시 공기를 폐부 깊숙이까지 들이마시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약속 장소가 어디더라?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휘 살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간판들 사이로 정이설이 말한 카페가 유독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지하철역 근처로 잡았어. 너 오기 편하게.」
약속 장소를 정하던 순간이 불쑥 떠올랐다.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정이설의 목소리는 참 나긋나긋하고 달콤했다.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정이설과 데이트 약속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하, 두근거려서 미치겠네.
인서는 카페가 가까워질수록 정신없이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제발 그만 나대라.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애꿎은 심장을 한번 탓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이었다. 얼핏 바라본 카페 창가에 정이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마자 심장이 다시 정신 나간 것처럼 뛰어댔으므로.
얼마 만에 보는 거더라?
인서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정이설과 아파트 계단에서 얼떨결에 첫 키스를 하고, 함박눈을 펑펑 맞으며 첫 데이트를 한 뒤, 실제로 얼굴을 맞댄 건 고작 서너 번뿐이었다. 정이설은 기숙학원에 묶여 있어서, 자신은 올림픽 출전을 앞둔 시점이라 선수촌에 묶여 있어서. 이래저래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키스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만나는 장소가 대부분 탁 트인 카페나 식당이기도 했지만, 한 달에 겨우 한 번 만나는 처지에 다짜고짜 키스부터 하자고 달려들 수는 없었다. 사실 정이설이 키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첫 키스도 자신이 우겨서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끌어안게 된 걸 핑계 삼아.
그래도 진짜 좋았는데.
정이설은 그의 품에 쏙 들어왔고 체향은 뭐라 말할 수 없이 향긋했다. 비누 냄새 같기도 했고, 보들보들한 아기 냄새 같기도 했고.
그게 무엇이 됐든, 인서는 그 순간 정이설과 그녀가 은은히 내뿜는 향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8년 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튀어나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키스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감정이었다.
오늘은 참을 수 있을까? 키스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인서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조급해진 혀끝으로 언젠가 맛보았던 정이설의 입술이 느껴졌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촉촉해서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게끔 만들던 입술이.
그 안에 숨어 있던 혀는 또 어떻고. 깔끔한 선홍색이었지, 아마? 감촉은 어땠더라. 혀끝으로 슬쩍 건드렸을 때 느껴지던 말캉함을 떠올리자 중요 부위가 급속도로 단단해졌다.
「혀 넣어도 돼?」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뻔뻔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심지어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럼 혀를 빠는 건?」
우와, 진심 제정신이었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미친 드립을 허락해 준 정이설도 대단했다. 아니면…… 그만큼 나를 좋아하고 있던 거였나? 그러니까 키스하자는 말에도, 한발 더 나아가 사귀자는 말에도 딱히 큰 거부반응 없이 좋다고 했겠지.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인서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뭐야,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잖아.
* * *
“여기.”
풍경소리를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정이설이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 인서는 관자놀이까지 단번에 후끈해졌다. 창가에 앉은 정이설은 눈이 부셨다. 한창 뜨거운 여름 햇살보다 훨씬 더 많이.
“미안, 오래 기다렸지?”
정이설이 먼저 반갑게 알은체를 했으니 뭐라고 근사하게 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바보처럼 말이 엉켜서 나왔다. 인서는 조금 멍청한 기분이 되어 손바닥으로 목 뒷덜미를 쓱 문질렀다.
“아니야. 사과는 무슨. 내가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온 거잖아.”
“어쨌든 너를 기다리게 한 건 맞으니까.”
“모자는 새로 샀어?”
정이설의 시선이 새까만 모자에 멎었다. 예쁜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거? ……어, 오다가.”
“잘 어울린다.”
정이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마실 건 시켰어?”
인서는 화제를 돌리면서 이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헛기침을 했다. 목은 왜 자꾸만 잠기는지 모르겠다.
“너도 안 왔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시켜.”
“그런가?”
“당연하지.”
그렇게 말해놓고 정이설은 작게 웃었다. 이렇게 미소가 후한 사람이라는 걸 왜 사귀고 나서야 알게 됐을까. 입술 끝이 양쪽으로 살짝 말려 올라간 정이설은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하긴, 어디는 사랑스럽지 않겠냐마는.
“가서 주문하고 올까?”
시선을 맞추며 정이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기분 좋은 향이 넘실거렸다. 인서는 체면 불고하고 향기가 나는 부위에 코를 박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너부터 골라.”
감각적으로 꾸며진 계산대 앞에서 정이설이 말했다.
“……음, 넌?”
인서는 뭘 골라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카페 음료는 잘 모른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냐고 선수촌이나 학교 체육관에서 훈련하는 일이 전부인 데다, 어쩌다 가끔 시간이 나더라도 시커먼 남자들끼리 카페로 몰려가서 뭔가를 주문해 먹을 일은 더더욱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난 딸기 스무디.”
그래도 방금 정이설이 말한 스무디가 뭔가를 갈아 넣은 음료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다, 너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치아는 건강하겠네?”
정이설이 확신 같은 질문을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그가 첫 키스 때 겁도 없이 혀로 핥아 올렸던 치아였다. 그러고는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아, 진짜 뭐 하는 거냐.
인서는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첫 키스의 잔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도 건강한 것 같은데?”
겨우 말을 이었다.
“……어?”
“치아 말이야. 너도 건치라고. 방금 웃을 때 봤어.”
“아아.”
정이설은 금방 수줍은 얼굴이 됐다. 치아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벌어져 있던 입술이 해 질 무렵 나팔꽃처럼 금세 오므라졌다. 괜히 말했나? 인서는 멋쩍어져서 애꿎은 진동벨만 만지작거렸다.
“경기 봤어.”
음료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이설이 먼저 올림픽 얘기를 꺼냈다.
“진짜 잘하더라.”
“봤어?”
“응. 점심시간에 우연히. 마침 나오더라고.”
“점심시간이었으면 16강전이었겠네?”
기억을 더듬으며 인서는 이설을 건너다보았다. 창가 자리라 비스듬히 쳐진 블라인드 사이로 여름 햇살이 조각조각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빛이 곧장 들이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이 부셨다.
“상대가 네덜란드 선수였었지?”
정이설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걸 아직까지도 기억해?”
“8강전은 우크라이나, 4강전은 대만, 그리고 결승전은 영국, 맞지?”
“어, 다 맞아. 기억력 되게 좋은데?”
“이 정도 가지고 뭘.”
정이설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웃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만났을 땐 이렇게 자주 웃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땐 그도, 그녀도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갈 정도로 어색했고, 무엇보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웃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럼 지금은 좀 편안해진 건가? 그래서 정이설이 틈날 때마다 웃어주는 건가?
인서는 심장 한가운데가 찜기에서 막 꺼낸 연두부처럼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이설, 너 원래 이렇게 잘 웃었니? 아니면, 혹시…… 나랑 있어서 그런 거야? 라는 질문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쏙 들어갔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묻는다면 푼수도 그런 푼수가 없을 테니까.
때마침 테이블 위에 있던 진동벨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넌 여기 있어. 내가 가지고 올게.”
인서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앉아 있다간 방금 전의 질문을 자기도 모르게 내뱉을 것 같았다.
직사각형의 트레이에 음료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정이설은 두 팔을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시선은 휴대폰 액정에 두고, 양 엄지손가락으로는 열심히 카톡에 답장을 하면서.
인서는 홀린 듯 하얗고 가는 팔을 쳐다보았다. 그다음엔 능숙하게 휴대폰 자판을 누르고 있는 섬세한 손가락들을. 첫 키스 때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던 손가락들이었다.
그때 인서는 발갛게 달아오른 정이설의 두 뺨을 제 큰 손으로 소중히 감싸고 있었더랬다. 울어서 눈언저리가 발갛게 변한 정이설은 예상에 없는 키스로 인해 볼까지 발그레하게 물들인 모습으로 숨을 가쁘게 할딱였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이설은 유독 더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입술이나 혀를 빨아대면 고양이처럼 가르랑대는 신음을 흘렸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