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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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은 유독 길었다. 매체에선 치솟는 수은주와 그로 인한 피해에 관한 기사를 연일 경쟁하듯 내보냈다. 몇십 년 만에 찾아온 불볕더위라는 둥,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둥, 끊임없이 위기감을 조성해댔다.
인서는 언론에서 매일같이 떠들어대는 이례적인 고온 현상과 상관없이 기분이 좋았다. 정이설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그녀의 눈동자가 초록색이 은은히 섞인 연갈색이라는 걸 알아냈으며, 입술은 틴트를 바르지 않아도 예쁜 빨간색이라는 걸 알아낸 여름이었기에.
무엇보다 정이설은 그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도 싫다 소리 없이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더없이 행복한 여름이었다. 그래서 고된 훈련으로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도 집으로 가는 길이 썩 흡족했다. 운이 좋으면 정이설과 마주칠 수 있을 테고, 거기서 더 운이 좋으면 그녀와 대화를 몇 마디 나누어 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정이설은 예의 바르고 친절했지만 보이지 않게 벽을 두르고 있었으며, 그는 정이설이 보여주는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한 성격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딱히 변한 건 없었다. 정이설은 여전히 고고하고 예뻤으며 동시에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차가웠다. 거리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나랑 사귈래?’ 따위의 어설픈 수작은 애초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견고한 막이 그녀의 주변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친절하되 사적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용납하지 않았고, 상냥하되 함부로 웃어주는 일도 없었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남자아이들은 이제나저제나 관심 좀 얻어볼까 하고 정이설의 바운더리 근처에서 끊임없이 얼쩡거렸다. 눈치껏 말도 걸어보고, 때론 도전적으로 대시도 해보면서.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관심과 열기에 정이설이 타버리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되었으나, 그런 우려가 무색할 만큼 정이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얼쩡대는 수컷 무리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므로.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아예 고립되어 살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이설은 담임교사를 포함, 모든 선생님들로부터 나무랄 데 없는 평가를 받았으며 교우 관계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어떻게 좀 해볼까 싶어 눈치 없이 질척거리는 무리에게만 선을 칼같이 그어댔을 뿐. 그래도 고위공직자인 아버지와 돈 잘 버는 작은아버지를 둔 빵빵한 집안에, 성적까지 우수해서 뭐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으니 누구 하나 함부로 구는 녀석은 없었다.
성적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정이설은 중학교 3년 내내 열에 아홉은 전교 1등, 어쩌다 조금 떨어지면 2, 3등이었다. 그래서 과학고나 외고에 지망할 거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인서는 홀로 고민이 많았다.
소문대로 정말 정이설이 과학고나 외고를 가버리면 어떡하지? 그럼 자신도 체고를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진로가 돼버리는 그쪽으로 가야 하는 건가?
정이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영 얼토당토않은 바람은 아니었다.
정이설은 다행히 과학고나 외고 대신 도암시 내에 있는 일반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내신을 따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유가 뭐든, 인서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선택이었다. 정이설이 입학하기로 결정한 고등학교엔 전국적으로 유명한 태권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체고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기, 꿩 먹고 알 먹기, 일거양득, 온갖 좋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중학교에서처럼 고등학교에서도 정이설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몸이 훌쩍 큰 만큼 마음의 크기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인서는 혼자 뜨겁게 속앓이를 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엔 항상 정이설이 있었다. 초능력이라도 생겼나 싶을 정도로 그녀만 눈에 쏙쏙 들어왔다. 전교생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도 예외는 없었다. 고성능 레이더라도 장착한 것처럼 정이설만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끝부분이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간 데다 근거리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총천연색의 커다란 눈과 휘어진 곳 하나 없이 반듯하게 뻗은 콧날, 마냥 둥글지는 않아서 나름 고집스럽게 보이는 턱과 색깔이며 모양이 기가 막히게 예쁜 입술 등은 언제나 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시간, 어느 곳에 가도 그녀의 섬세한 외모를 눈에 그린 듯 떠올릴 수 있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감히 사귀자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이설은 여전히 방어막을 철벽처럼 두른 채 누구든 그녀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일정한 거리에서 속을 끓이며 애를 태우는 건 인서 혼자였다.
서운했냐고? 그렇진 않았다. 살면서 온통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마주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리 7, 8년 가까이를. 그건 분명 유의미한 사건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래서 인서는 항상 바라고 소망했다. 도무지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 그 세계 속으로 반드시 발을 들여놓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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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라도 쓰고 나오는 건데.
인서는 낭패감에 얼굴을 굳혔다. 숙소를 나와 지하철 역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여기저기서 흘끗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혹시 백인서 선수 아냐?”
“대박!”
“사진 찍음 뭐라 할까?”
“그러지 말고 한번 같이 찍자고 해 봐. 혹시 알아? 흔쾌히 찍어줄지.”
지하철 역사 안이 웅성댔다. 모르는 척, 안 들리는 척, 묵묵히 걸어가고는 있지만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들로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지하철에 오르면 잠잠해지겠거니 했는데 순진한 착각이었다. 제한된 공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으니 관심이 더 집중되었다. 개중에는 인서에게 직접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경기 잘 봤다, 화면보다 실물이 더 낫다, 어쩜 그렇게 실력이 좋으냐, 같은 예상 가능한 칭찬과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인서는 정수리까지 벌게졌다. 꾸역꾸역 대답을 하고는 있지만, 원래부터 이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었다. 특히 면전에서 쏟아지는 칭찬이나 관심에는 도무지 면역력이 생겨나지 않았다. TV 인터뷰도 어색한 마당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할 수만 있다면 공간이동을 해서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겨우 서너 정거장을 버티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엉뚱한 역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상가 아무 곳에나 들어가 손에 집히는 대로 야구모자를 하나 샀다. 평범한 디자인의 검은색 야구모자였다.
최대한 푹 눌러 쓰고 심호흡까지 한 다음 지하철에 다시 올랐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야구모자 때문인지는 몰라도 웅성대는 소리가 한결 줄어들었다. 이왕이면 마스크도 쓰고 싶었지만, 너무 요란스러운 모양새로 비출까 싶어 겨우 참았다.
이 모든 소요의 중심에는 올림픽이 있었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딸 땐 그 분야에서나 알아주지 일반인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가 지나갈 때 흘끔흘끔 쳐다보는 건 인지도 때문이 아니라 워낙 그의 체격이 남다르다 보니 생겨난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식의 흘끔거림은 조금 성가시긴 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려서부터 익숙한 상황이기도 했고.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후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16강전부터 결승까지 죽 올라가 버린 데다, 결승전에서의 경기가 세간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되새김질하듯 다수의 채널에서 연일 보도가 되다 보니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횟수 자체가 달랐다. 아시안게임이나 세계선수권은 아예 비교 대상조차 될 수가 없었다. 한 번, 두 번, 경기에서 이길 때마다 SNS상에서의 조회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페북이나 인스타를 하지 않는 그를 위해 전부 주변에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올림픽을 끝마치고 인천공항에 들어섰을 때는 북새통도 그런 북새통이 없었다. 언제 몰려든 건지 취재진이 새까맣게 들러붙는 바람에 이동조차 불가능했다. 스포츠 에이전시와 연예기획사라는 곳에서는 또 왜 그렇게 연락이 오는 건지.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이 끝난 직후에도 알음알음 연락들이 오긴 했지만, 지금처럼 집중적으로는 아니었다.
근 일주일 동안 인서는 바뀐 상황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올림픽의 여파가 원래 이렇게 엄청난 건가 싶기도 했다.
「너만 그래, 너만.」
숙소를 나서기 전 한숨을 푹푹 내쉬자 룸메이트면서 올림픽에 함께 출전했던 선배 양병욱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씩 웃었다.
「생각해 봐. 태권도 금메달은 나랑 용인대 김지왕도 같이 땄거든. 근데 우린 절간이 따로 없잖아. 이게 다 뭣 때문이겠어.」
양병욱이 자못 심란해 죽겠는 인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 죽 훑어내렸다.
「이건 뭐, 암만 봐도 몰빵 아니냐고.」
「뭐가요?」
「너 말이야. 외모 하나는 죽여준다고.」
「갑자기 무슨 외모 타령이세요? 운동선수한테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하여간 있는 놈들이 없는 놈 염장 지르는 덴 뭐 있다니까.」
양병욱이 침대 헤드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가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체격 어쩔 거야. 190이 넘는데도 둔한 구석 하나 없이 날렵하잖아. 어깨는 좀 넓어. 그러니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 두겠냐고. 딱 봐도 엄청난 물건인데. 솔직히 내가 영화나 TV를 숱하게 봐도 너만 한 얼굴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잘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숙명이라고 받아들여. 어쩌겠냐.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줄을 서는데.」
도움은커녕 위로도 안 되는 말만 잔뜩 늘어놓고 양병욱은 다시 휴대폰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