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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31화 (31/130)

31화

“이건 필요할 때 용돈으로 써라.”

할머니가 빳빳한 지폐 열 장을 인서의 손에 쥐여주자 아빠가 펄쩍 뛰었다. 무슨 애한테 그렇게 큰돈을 용돈으로 주냐며.

“왜, 너도 주랴?”

“누가 그렇대요? 돈도 못 버는 양반이 무슨 돈이 있다고 막 퍼줘요, 퍼주길.”

“그래도 내가 너보단 부자야. 그건 알고 있냐?”

“엄마도 참, 왜 사람 아픈 데를 무지막지하게 찌르고 그래요.”

할 말이 없어진 아빠가 입맛을 쩝 다셨다.

“운전 조심하고.”

“그래야죠. 엄마도 건강 조심하시고요.”

“나야 건강 하난 잘 챙기지.”

“말만 그러지 마시고요.”

언제 농담을 주고받았나 싶게 모자 사이는 금세 애틋해졌다.

“그나저나 차가 안 막히려나 모르겠다. 날이 더워지니까 피서다 뭐다 해서 주말마다 도로가 아주 북새통이야.”

할머니가 목을 길게 빼고 큰길가를 살폈다.

“아침엔 덜 막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빠가 소리도 요란하게 차 트렁크를 닫았다.

“저희 이제 출발할 거니까 엄만 그만 들어가세요.”

“너랑 인서 가는 건 봐야지.”

“날 더운데 굳이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런 게 아니다.”

있는 거 없는 거 죄다 싸주고도 할머닌 서운해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도리어 차가 안 보일 때까지 대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아빤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오늘 밤엔 잘 주무시려나 모르겠네.”

아파트 정문이 보이는 지점에서 아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할머니 생각이 머릿속에서 영 떠나지 않는가 보다.

“걱정되면 내가 전화해볼까?”

“됐어. 자고로 안부 전화는 궁금한 사람이 하는 거야.”

“나도 할머니 안부 궁금한데?”

“그럼 네가 하든지.”

아빠가 씩 웃었다.

“뭐야, 결국 나보고 하란 소리네.”

인서는 픽 웃으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정이설을 발견했다. 뙤약볕이 싫었는지 그늘로만 요리조리 걷고 있던.

그래서 저렇게 하얀 거구나.

인서는 진초록색 벚나무 잎사귀들과 건조한 아파트 외벽을 배경으로 혼자만 새하얗게 빛나는 정이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껌딱지처럼 늘 붙어 다니던 오빠는 오늘 곁에 없었다. 혼자였다.

어디 가? 혹은, 내 이름 알아? 그도 아니면, 오늘은 혼자네? 오빠는 어디 갔어?

아무거라도 좋았다. 정이설에게 말을 걸 수만 있다면. 하지만 아빠가 바로 옆에 있는 데다 차 안이어서 그러지 못했다. 물론 달리는 차 안이라고 말을 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차창을 내리고 말을 걸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때문이다. 만약에라도 그런 만용을 부렸다간 두고두고 아빠의 그 괴상한 웃음소리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저 여자애가 대체 누구이기에 우리 아들이 차창까지 내리고 친히 말을 거냐는 놀림과 함께.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다음번엔 꼭 말을 걸어봐야지.

인서는 아빠가 눈치채지 못하게 허벅지 위로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제법 결연한 다짐이었으며, 전학을 온 이후 처음으로 생긴 바람이었다. 비록 그 바람을 이루는 데 3주라는 긴 시간이 걸렸지만.

* * *

그날 역시 무척 더운 날이었다. 기온이 38도인가 그랬다. 정이설은 아빠와 함께 할머니를 모셔다드리고 춘천에서 돌아오던 날처럼 쏟아지는 직사광선을 피해 그늘로만 걷고 있는 중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시간이 좀 흐른 뒤라 운동장엔 아이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그와 정이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 사이로 군데군데 빚어져 있는 동그란 그늘들뿐이었다. 기회다 싶어 곧장 걸어갔다. 동전이라도 줍고 싶은 사람처럼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걷고 있는 정이설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는 걸 정이설은 알까? 몇 번의 달싹거림 후에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손바닥 전체가 수영장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축축해졌다는 것도 당연히 모를 테지. 뜨끈해진 관자놀이가 높은 기온 탓이 아니라 순전히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짐작 못 했을 것이다.

“너 대영아파트 살지?”

와, 이게 무슨!

말을 불쑥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세상 하찮은 질문을 해버렸다는 걸. 비루한 자책이 물밀듯 쏟아져 들었다.

멍청한 백인서! 무려 3주 동안 바라고 또 바랐는데 할 말이 겨우 그거밖에 없었던 거냐? 떠오르는 말이 고작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였냐고. 무슨 호구 조사해?

“……어, 왜?”

정이설은 그야말로 움찔했다. 겁을 살짝 집어먹은 것도 같았고. 눈빛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얜 뭐지?’ 딱 그거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짜고짜 길을 막고서는 아파트 이름부터 물어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뜨악한 표정과 달리 뒷걸음질까지는 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도 너네 아파트로 이사 왔거든.”

하, 진짜 뭐라는 거냐.

두 번째로 꺼낸 말 역시 한숨이 푹푹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화의 물꼬를 어떻게 트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걸 시사해주는 대목이었다. 시작을 아파트로 했으니 그다음 이야기도 아파트가 되어야 하는 아주 쓸모없는 방식의 대화 전개였다.

“……그래? 언제?”

그러니 당연하다는 듯 이런 질문이 되돌아오는 거다.

“얼마 안 됐어. 한 달 전쯤?”

“그전엔 어디 살았는데?”

“성현동 근처.”

인서는 가까스로 기억을 짜냈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게 아닌데.

“아아.”

정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관심은 없지만, 대꾸는 해야겠으니 마지못해 맞장구를 쳐주는 것 같은 분위기?

인서는 관자놀이가 뜨끈하다 못해 화끈거렸다. 도무지 그의 관심사와는 하등 상관없는 호구 조사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정이설의 눈동자와 도톰한 입술만큼은 정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스치듯 봤을 때는 그저 예쁜 애구나 싶었는데 코앞에서 내려다보는 정이설은 뭔가 달랐다. 특히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눈동자 색이.

정이설의 눈은 보통 사람들처럼 검은색에 가까운 고동색이나 평범한 갈색이 아니라 홍채의 바깥 부분은 짙은 갈색인데 그 안쪽으로는 초록빛이 살짝 감도는 아주 연한 갈색이었다. 어떻게 이런 색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한국인 아닌가?

게다가 입술 색은 또 왜 저렇게 빨간 건데? 뭘 바른 건가? 하다못해 틴트라도. 여자들 화장품은 잘 모르지만 그건 아니지 싶었다. 그냥 타고난 입술 색이 그런 것 같았다.

인서는 순식간에 멍한 기분이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정이설은 그냥 ‘예쁘다’라는 흔하디흔한 수식어로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할 만큼 뭔가 인상적인 데가 있었다.

“넌 여기 오기 전에 어디 살았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정이설에게 물었다. 대화의 첫 물꼬를 충실하게 이어나가는 질문이었다.

이왕 이렇게 돼버린 거 할 수 없지 뭐. 달리 말재주가 있는 편도 아니니까.

벌게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을 때 엉겁결에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정이설이 또 움찔했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웃었나?

“잘 기억 안 나. 어렸을 때부터 여기 살아서.”

약간 뜸을 들인 후에 정이설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

“…….”

어색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이상한 지점에서 끊어졌다. 인서는 제가 웃었을 때 본능적으로 움찔하던 정이설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그리고 이설은 대화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지라 둘 사이의 대화가 끊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아서.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이설에게 몇 동 몇 층에 사나 같은 질문들도 던져야 하나? 그럼 진짜 이상하게 보일 텐데.

이 이상하고 삐걱대는 대화에서 먼저 발을 뺀 사람은 정이설이었다.

“……저기.”

“……어?”

인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 안쪽만 짓이기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난 그럼 갈게.”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이만큼 맞춰줬으면 나름 충분하다는 뉘앙스였다. 그런데도 여기서 더 말을 건다는 건 정말 우스운 짓이었다. 누가 봐도 질척이는 꼴이 될 테니까.

“그, 그래.”

인서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밑에서 얌전하게 서 있던 정이설과 달리 쏟아지는 한여름 햇살을 정수리 위로 곧장 한 무더기 내려받으며.

참을 수 없이 더웠었던가?

사실 기억도 잘 안 난다. 누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첫 대화는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다. 볼일 다 봤다는 듯 정이설이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서와는 눈도 제대로 안 맞추고. 당연히 뒤를 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름도 말 안 했네?

인서는 뙤약볕 아래 서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목적은 하나도 수행하지 못했음을.

나 방금까지 뭐한 거야?

어이가 없어서 마디가 불거져 나온 주먹으로 제 머리를 한 대 콕 쥐어박았다. 정이설은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운동장 바닥에 멀거니 서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였다.

“야, 백인서! 코치님이 연습한다고 얼른 들어오래!”

체육관 쪽에서 같은 태권도부원인 주호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인서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정이설이 사라진 방향을 한번 쓱 쳐다본 다음 체육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오늘 못 했으면 다음번에 제대로 하면 되지, 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나?”

태생이 긍정적인 사람답게 인서는 체육관에 도착할 즈음엔 기분이 제법 좋아져서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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