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 *
저녁상은 푸짐했다. 할머니는 인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상을 한가득 채웠다. 전복이 듬뿍 들어간 미역국에, 달짝지근하게 졸인 LA 갈비, 사골국물을 넣고 시원하게 버무려낸 섞박지와 담백하게 부쳐낸 감자전까지. 이러니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다.
“잘 먹겠습니다!”
인서는 우렁차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한 후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고소한 미역국을 한 숟가락, 그다음엔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갈비 한 점과 고소한 감자전을,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매콤한 섞박지를 한입 크게.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어린 마음에도 언제나 최고다.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맛있는 걸 보니.
“어때, 먹을 만해?”
할머니가 식탁 너머로 물었다.
“네, 완전요.”
인서는 입에 음식을 문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한 직후라 아직까지 촉촉한 이목구비 너머로 만족감이 한가득 배어 나왔다. 할머니의 눈꼬리가 언젠가 사진에서 본 하회탈 모양으로 길게 휘어졌다.
“잘 먹으니 좋다. 암, 그게 최고지.”
할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본인은 먹지도 않으면서 인서의 앞으로만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끊임없이 음식들을 가져다주었다. 인서는 그런 할머니가 고마워 늘 과식을 하게 마련이었다.
“밥도 맛있게 먹었는데 우리 산책이나 할까?”
할머니가 인서를 돌아보았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지금요?”
흘끗 돌아본 베란다 유리창 밖이 새까만 먹빛이었다.
“원래 여름 산책은 늦저녁이나 밤에 하는 거야.”
할머니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모르니까 얇은 외투 하나 챙기고.”
“에이, 한여름인데요?”
“그래도 날씨란 건 모르는 법이다.”
“알았어요.”
인서는 군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제일 얇은 옷을 챙겨왔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입을 일은 없을 테지만 할머니가 원하니 가져가는 것이다.
“가요, 할머니.”
인서는 스스럼없이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때마침 밖으로 나오던 앞집 할머니가 두 사람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러더니 익숙하게 대화가 오고 갔다.
하여간에 할머니들의 친화력이란 무섭다. 겨우 두어 번 얼굴 본 게 다인데 마치 십 년은 알고 지낸 사람들 같다. 인서는 멀뚱하게 서서 공통점이라곤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게 전부인 할머니들끼리 대화 삼매경에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럼 나도 이참에 바람이나 쐬고 올까?”
앞집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나섰다. 덕분에 졸지에 셋이 하는 산책이 되었다. 영 어색하기만 한 인서와 달리 두 할머니는 마냥 편안해 보였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소재도 어찌나 다양한지 아파트 대소사에서부터 얼마 남지 않은 선거 얘기까지 무궁무진했다.
“그나저나 손자가 인물이 훤하네요? 또래에 비해 키도 훌쩍 크고.”
두어 걸음 떨어져서 걷던 앞집 할머니가 인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태권도선수예요. 요 앞 경서초등학교.”
대답을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그득했다. 설마 자랑하시는 건가? 인서는 할머니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170에 가까운 자신보다 어느새 키가 한참 아래인 할머니가 오늘따라 부쩍 왜소하게 보였다.
예전에는 참 커 보였는데 언제 이렇게 작아지신 거지?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할머니는 그대로인데 자신만 훌쩍 자랐다는 것을. 당연한 일인데도 인서는 괜히 마음이 짠해져서 할머니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어쩐지, 나이에 비해 다부져 보이더니만.”
두 할머니는 길을 걸어가면서 내내 오순도순 말을 이어갔다.
“여기 잠깐 앉을까요?”
앞집 할머니가 아파트 광장에 놓인 벤치를 가리켰다.
“그럴까요?”
마침 허리가 아프던 차에 잘됐다며 할머니가 냉큼 벤치에 앉았다. 인서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가 할머니의 재촉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되도록 두 할머니에게서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로. 그러나 어둠이 진하게 내려앉은 밤이었고 주위가 조용한지라 할머니들의 대화 소리는 낭랑하리만큼 잘 전달되었다. 이래서야 떨어져 앉은 보람이 없다.
무념무상의 기분으로 멍하게 주변을 쳐다보던 인서의 몸이 어느 순간 움찔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야무지게 남자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인물이 정이설이라는 걸.
하,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는구나. 그렇게 좋은가?
속으로 비뚜름하게 투덜거리던 차에 앞집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참, 사이가 좋아.”
“누가요?”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 할머니가 물었다.
“저 집 남매 말이에요.”
앞집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정이설과 문제의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인서는 자연스럽게 앞집 할머니의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분명 남매라고 들었다.
그럼 남자친구가 아닌 거네?
불퉁하던 마음속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풀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정이설과 무슨 특별한 사이가 된 것도 아니건만. 사실은 대화 한번 나누어 본 적 없는 사이였다.
“남매가 둘 다 인물이 좋네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집 아버지가 보통 인물이 아니거든. 잘생긴 거로 따지면 연예인 뺨따귀는 쌍으로 스무 대를 쳐도 모자라요. 머리는 또 얼마나 좋다고. 지방고시 출신인데 지금 뭐라더라, 도암시 균형발전 실장인가 그렇다더라고.”
“아아, 그래요?”
할머니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저 집 작은아빠는 어떻고.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여기 도암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병원 원장이잖아요. 하도 환자가 많아서 돈을 갈퀴로 긁어댄다지, 아마?”
“위아래로 잘되는 집안이네요.”
“그 집 두 형제가 어려서부터 워낙 유명했거든요. 수재라고. 특히 형은 잘생기기도 잘생겨서 도암시 여자들 속 좀 끓였지. 근데 사실, 공부는 동생이 더 잘했어요. 중고등학교 6년 내리 전교 1등에다가 대학입학시험까지 만점 받았으면 얘기 다 끝난 거지. 저 집 할아버지가 이 근방에선 알아주는 재력가거든요? 그때 얼마나 거드름을 피워대던지. 온 동네 사람 밥을 다 사줄 기세였다니까?”
앞집 할머니는 자기 일처럼 신이 났다. 정이설네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끝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근데.”
갑자기 앞집 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애가 정상이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통.”
할머니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까 본 애 있잖아요. 그 왜 남자애 말이에요. 걔가 허우대는 멀쩡한데 장애가 있잖아요. 듣자 하니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라던데. 듣기로는 발달장애 1급이라던가 뭐라던가. 그게 말이 어려워 그렇지, 예전으로 치면 정신지체 비슷한 거라더라고요. 지능이 세 살만도 못하다지? 거기에 자폐도 있으니 원. 아무튼 그것만 아니면 세상천지에 부러울 것 없는 집안인데 참 안됐어요.”
“……저런.”
“그래서 어딜 나가면 저렇게 동생이 보호자처럼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기특하네요. 우애도 남다르고.”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빨라지는 앞집 할머니와 다르게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에 반비례해서 더 작고 느려졌다.
“아유, 아무리 우애가 남다르고 기특하면 뭐해요. 애가 정상이 아닌데.”
“…….”
“얼마 전엔 저 오빠라는 애가 간질이 와서는 눈이 허옇게 뒤집히고 길바닥에 드러눕는데 다들 놀라서…….”
앞집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갑자기요?”
“가스레인지에 뭘 올려놓고 온 게 떠올라서요.”
“아이고, 그럼 얼른 가셔야지.”
앞집 할머니가 부산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가자, 인서야.”
할머니가 몸을 일으키더니 인서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정이설이 그녀의 오빠 손을 꼭 잡은 것처럼.
밤하늘은 여전히 새까맣고 주위는 먼지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 그지없는데 할머니는 앞집 할머니가 조그만 점으로 보일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귓전에 울리는 거라곤 두 사람의 자박거리는 발소리뿐이다. 101동 현관이 보일 즈음에서야 인서는 물었다.
“진짜 가스레인지에 뭐 올려놓고 오셨어요?”
“당연히 안 올려놓고 왔지.”
“그럼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할머니가 대답했다.
“뭐를요?”
“남 얘기하는 거.”
“처음엔 열심히 맞장구쳐주셨잖아요.”
인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그건 누가 들어도 즐거운 얘기였을 때고.”
“그게 아니면요?”
“가슴 아픈 얘기는 들어주는 것도, 맞장구쳐주는 것도 고역이거든.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안 듣는 게 상책이야.”
“하지만 사람이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렇다고 일부러 마음 짠한 남의 가정사를 심심풀이 땅콩처럼 맞장구까지 쳐가며 들을 필요는 없지. 당사자에겐 무례도 그런 무례가 없고.”
할머니가 인서를 보며 담담히 웃었다.
* * *
정이설을 또 마주친 건 그러고도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모처럼 시간이 난 아빠와 함께 할머니를 춘천까지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늘 터미널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가시던 할머닌 아빠가 모셔다드린다고 하자 입으로는 괜찮다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웃었다. 사실은 내심 좋았던 거다.
하룻밤을 자고 이른 아침까지 먹은 후에 춘천을 떠날 때, 할머닌 아빠가 좋아하는 매실장아찌와 인서가 잘 먹는 진미채 볶음 같은 밑반찬들을 차 트렁크 가득 바리바리 싸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