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2분 남짓이었다. 백인서는 1회전과 2회전을 치르는 동안 이미 점수 차를 멀찍이 벌려놓고 있었다. 상대편 선수보다는 심적으로 한층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스포츠 경기는 모르는 거잖아. 혹시라도 대역전극이 벌어지면 어떡해.
해설자도 앞서 언급했지만 늘 그렇듯 올림픽은 이변의 연속이었고, 백인서만 그 이변에서 제외되란 법은 없었다.
이설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음을 졸였다. 긴장감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시간은 경기 종료 전까지 겨우 1분 10여 초 남은 상황이었다. 점수는 19대 6 그대로였고, 해설자는 이미 백인서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여유롭게 중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8강전 상대를 넘어 결승전까지 운운하는 걸 보니.
“저렇게 설레발 치다가 꼭 재수 없는 일 생기더라.”
강라희가 옆에서 툭 내뱉었다.
“뉴스 보니까, 이번 올림픽 특징이 세계 랭킹 1위가 줄줄이 탈락하는 거라잖아. 종목 상관없이 다 그렇대. 그러니까 우리가 태권도 종주국이라고 안심할 순 없다는 거지.”
이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도 방금까지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대역전극을 상상하지 않았는가. 그렇더라도 백인서가 지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훈련에 임했는지 잘 알기에.
초조한 가운데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러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40여 초였다. 그 짧은 동안에도 백인서는 몸통 공격에 성공해서 점수를 더 모았다.
이제는 좀 여유롭게 시청해도 되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백인서가 그대로 다리를 뻗어 상대의 얼굴 옆면을 내려찍듯 정확하게 가격했다. 얼마나 움직임이 빠르고 타격감이 컸는지 상대 선수가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설은 매서운 기세로 재차 공격 기회를 노리던 백인서가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연이어 상단 돌려차기에 성공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거지!”
강라희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판 위로 내동댕이치다시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맨날 깔짝깔짝 발펜싱 하는 것만 보다가 저렇게 강력한 돌려차기로 상대방 선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흥분감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강라희 혼자만이 아니었다. 식당 안은 이내 경기의 여파로 시끌시끌해졌다. 무더위와 입시라는 이중고에 찌들어 있던 학생들은 간만에 속 시원한 경기를 보자 다들 고양된 감정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 사이에서 더 큰 감탄사가 튀어나온 건 백인서가 머리보호대를 벗는 장면이 TV 화면에 정면으로 클로즈업되었을 때였다.
“와, 씨발! 뭐야, 저 외모 실화냐?”
“내 말이. 저게 실현 가능한 이목구비라고?”
여기저기서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TV 화면에 크게 잡힌 백인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얼굴에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사람의 넋을 빼놓을 만큼 훌륭했다. 괜히 중고등학교 때부터 인근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자자했던 게 아니다.
“내가 왜 저 선수를 일찌감치 몰랐지?”
강라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장탄식을 내뱉었다.
“내 장담하건대, 오늘부로 페북이고 유튜브고 저 선수 얘기로 난리 날 거다.”
강라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백인서 얘기뿐이었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가 보여준 탁월한 경기력은 이제 뒷전이었고, 천지사방에서 온통 백인서의 외모 이야기만 난무해서 그렇지.
* * *
“진짜 아쉽다.”
식당 문을 나서며 강라희가 푸념을 길게 늘어놓았다.
“뭐가 아쉬운데?”
“결승전을 못 보게 생겼잖아. 오늘 밤 9시에 한댔는데 우린 그때 자습실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몹쓸 운명 아니냐고.”
강라희는 백인서의 결승진출을 당연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이설이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쌤들한테 물어보면 경기 결과는 알려주겠지? 내일 점심시간까지 기다릴 순 없잖아.”
“내 말이. 이건 뭐 휴대폰이 있어야 몰래 훔쳐보기라도 하지.”
강라희는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걸음을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박자 맞춰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오늘처럼 발펜싱 없는 시원시원한 경기를 결승전에서도 꼭 봐야 하는데 말이야.”
강라희는 아까부터 자꾸만 발펜싱 타령이었다. 이설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발펜싱이 뭔데?”
“아아, 그거? 요즘 태권도 경기가 하도 시시하고 재미없으니까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야. 잘 봐. 경기를 어떻게 하나면, 요래 요래 하거든.”
강라희가 공격 자세를 취하더니 곧장 오른쪽 다리를 들어 허공에 대고 이쪽저쪽 감질나게 휘저어댔다.
“어때, 무슨 느낌인지 알겠지? 한눈에 봐도 발로 펜싱 하는 거 같잖아. 그래서 붙게 된 굴욕 별명이 발펜싱이라고. 더 굴욕적인 별명으로는 발세수란 것도 있고. 하여간 이름들도 잘 가져다 붙여요. 천재적이야.”
“왜 그렇게 하는 건데? 말 그대로 격투기잖아.”
“남자친구가 태권도선수라면서 얘기 안 해 줬어?”
강라희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보았다.
“……어, 그게 어쩌다 보니.”
이설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남자친구라고 해봐야 설 연휴부터 사귀기로 했으니 겉으로 보이는 기간은 5개월이 훌쩍 넘었으나 실질적으로 만난 횟수는 손에 꼽아야 했다. 그렇다고 전화통화를 자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휴가 나가서 하는 정도? 백인서의 말마따나 견우직녀가 따로 없다. 사정이 이러니 귀한 시간에 발펜싱을 왜 하는지 같은 이야기는 할 겨를이 없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강라희가 침을 꼴깍 삼켰다. 사설이 길어질 때면 습관처럼 보이는 행동이다.
“태권도선수들은 전부 발바닥에 센서를 부착하고 있거든. 공격할 때 그 센서가 머리나 몸통에 붙어 있는 센서를 감지해야 점수를 얻게 되는 시스템인 건데, 문제는 뭐냐 하면, 실제 경기에선 이런저런 공격기술보다 요런 발펜싱이 확률도 높고 안전해서 죄다 이런 방식으로 경기를 한다는 거지. 아무리 폼 나게 싸워도 점수 인정이 안 되면 끝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
“실제 올림픽 경기에서도 있는 일이야. 누가 봐도 강력한 돌려차기 공격인데 포인트로 인정이 안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살랑살랑 커트로 때렸는데 포인트가 무진장 잘 먹혀. 그러니까 선수들 입장에선 욕을 왕창 얻어먹어도 계속 그렇게 하는 거야.”
이 말을 할 때쯤 강라희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말소리가 점점 커졌고 말하는 속도 역시 그에 비례해 빨라졌으므로. 만약 옆에 정수기가 있었다면 기꺼이 물을 한 잔 따라 건네줬을 것이다.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뛰어차기 같은 박진감 넘치는 공격기술을 백날 연습하면 뭐하냐고. 경기장 안에만 들어서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죄다 발펜싱밖에 안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설도 언젠가 그와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태권도와는 접점이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수박 겉핥기로 후루룩 읽고 넘겨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내용이 뭐였더라?
아, 맞다. 태권도 경기 도중 판정시비가 끊임없이 일어나자 해결책으로 전자호구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결과적으로 지루하고 맥빠지는 경기가 되어버렸다는 자성 어린 기사였다.
“내 생각엔 이런 발펜싱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자호구도 전자호구지만 발바닥 센서를 없애버리든가, 그도 아니면 커트 발로 공격하는 경우엔 기본 점수를 팍 깎아버리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없어. 그러기 전까진 절대 안 없어질 일이거든. 근데!”
강라희가 포효하듯 자신의 말을 뚝 자르더니,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설은 저도 모르게 같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엄청난 말이 나올까 싶어서.
“백인서 선수는 아예 결 자체가 다르다는 거지. 그 선수는 깔짝깔짝 간 보는 게 없어. 공격이든 방어든 정석 태권도 그 자체야. 아까 돌려차기할 때 봤냐? 그것도 연속으로? 진짜 제대로 멋있지 않았냐? 나 완전 소리 지를 뻔했잖아. 감동 연타로 먹어서.”
강라희의 눈동자가 별을 품은 듯 초롱초롱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큰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야, 강라희. 너 또 복도에서 쓸데없이 썰 풀고 있냐?”
이설은 강라희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복도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정적인 수업방식으로 소문이 자자한 국어 선생 김경찬이었다.
“선생님도 보셨죠?”
강라희가 국어 선생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뭘 또.”
“아까 태권도 경기요.”
“보긴 봤지.”
“느낌이 어떠셨어요?”
강라희가 때아닌 애교를 부렸다. 살짝 쳐진 눈매가 오늘따라 더 몽글몽글, 순둥순둥하게 보인다.
“느낌이 어떻긴. 우리나라 선수가 이겼으니 기분은 좋지.”
“그것 말고는 없으셨어요?”
“쓸데없이 서론이 긴 걸 보니, 너 혹시 무슨 꿍꿍이라도 감춰뒀냐?”
흥분한 강라희와 달리 국어 선생은 별 감흥이 묻어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표정 변화가 딱히 없는 걸 보니. 아니면 시시때때로 뜬금없는 이야기를 흘려대는 학생들에게 이골이 났던지.
“에이 꿍꿍이라뇨.”
“그럼 왜 이렇게 서론이 길어.”
국어 선생이 표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