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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22화 (22/130)

22화

“우리 조금만 더 걷다 들어갈까?”

강라희가 기숙사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지 뭐.”

이설은 순순히 대답했다.

학원이 산속에 위치하다 보니 눈이 닿는 곳마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 천지였다. 그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단풍나무였다.

“난 여기 와서 알았잖아. 단풍나무가 이렇게 종류가 많았는지.”

강라희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 그랬다. 기숙학원 산책로 주변엔 온통 단풍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종류도 다양해서 산단풍나무, 적단풍, 청단풍, 수양단풍 등이 골고루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개중에는 벌써 잎이 붉은 것도 있었고 아직은 가을을 기다리느라 초록색인 것도 있었다.

단풍나무 옆으로는 키가 큰 활엽교목들이 죽 늘어섰다. 중간중간 잔망스럽게 꽃을 피운 배롱나무와 그에 질세라 앞다퉈 꽃망울을 새빨갛게 터뜨리고 있는 석류나무를 구색 맞춰 끼워 넣은 채.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이상 계속 핀다고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 한다나 뭐라나. 전부 유달리 나무에 관심이 많은 국어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였다.

“근데 이설이 넌 남자친구 없어?”

“어…?”

“남자친구 있다고 하면 원재범 같은 자식도 안 꼬일 거 아냐.”

“사실은 나…… 남자친구 있어.”

“진짜? 근데 원재범이 헛소리할 때 왜 가만히 있었어?”

강라희가 펄쩍 뛰었다.

“걔 하는 짓을 봐.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도 믿을 분위기인가. 분명 거짓말로 둘러댄다고 비웃기나 할걸?”

“하긴, 그러고도 남을 놈이긴 하다. 혹시 대학생? 아님, 우리처럼 재수생?”

강라희가 호기심을 보이며 바짝 달라붙었다.

“대학생.”

“어디 학교? 음……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인가?”

“한체대 1학년이야.”

“우와, 동갑내기 운동선수구나. 종목은 뭔데?”

강라희의 입에서 질문이 연달아 쏟아져나왔다.

“태권도.”

“이런 우연이. 나도 태권도선수였었는데.”

이번에 놀란 건 이설이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강라희가 운동선수였다고? 게다가 종목도 백인서와 똑같은 태권도였다.

“뭐, 중학교 들어가면서 공부 쪽으로 방향을 틀긴 했지만, 그만두기 전까진 나름 잘나갔었어. 초등학교 6학년 때 경남 대표로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해서 은메달까지 땄었거든.”

“대단하다. 그렇게 잘했는데 왜 그만뒀어?”

“공부가 더 재밌어서.”

강라희가 씩 웃었다. 성격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그만둔 거 후회 안 해?”

“전혀. 나 원래 지나간 거엔 집착 안 하는 성격이야. 정리했으면 그걸로 완전 끝인 거지. 그게 사람이든 뭐든.”

“……그렇긴 하지.”

이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건 강라희의 말처럼 좋은 일이긴 하다.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 그렇지.

“남자친구는 몇 단이야?”

숨 돌릴 틈도 없이 강라희가 자신의 과거에서 백인서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4단이라고 들은 것 같아.”

“대학교 1학년이 4단이면 더 올라갈 단은 없겠네.”

“왜? 더 높은 단도 많이 있지 않나? 내가 듣기론 바둑이나 합기도처럼 8단, 9단, 막 이런 것도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태권도 단증은 아무리 잘해도 나이 제한이라는 게 있거든. 5단은 최소한 대학교 4학년 이상은 돼야 딸 수 있어. 최고 높은 9단은 50대 중반이 넘어야 가능하고. 실력이 월등하다고 연달아 막 따는 시스템이 아니거든. 남자친구 대회 실적은 좋지?”

제법 전문가 같은 눈빛으로 강라희가 물었다.

“……잘하는 것 같아.”

이설은 백인서가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라는 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한체대를 갔겠지. 거긴 수상실적이 좋지 않으면 원서 자체를 안 받아주거든.”

“너 되게 잘 아는구나.”

“말했잖아. 나도 소싯적엔 태권도로 이름 좀 날려야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고. 하다 보니 운동보다는 공부가 더 적성에 맞는 바람에 진로를 틀어서 그렇지.”

강라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이나 눈빛에서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운동을 그만둔 것에 대해 전혀 미련이 없다는 것을. 강라희는 언제나 그랬다. 겉으로는 엄살을 부려댔지만, 실상은 무엇을 하든 굉장히 적극적이었으며 마음가짐 또한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설에겐 부러운 면이었다.

“남자친구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지.”

그것도 아주 많이.

이설은 입안 점막을 지그시 깨물었다. 불쑥 떠오르는 백인서의 모습 때문에.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그리움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이해된다, 그 심정.”

강라희가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였다.

“너도 남자친구 있구나?”

이설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물었다.

“있었지. 얼마 전에 고무신을 바꿔 신어 탈이지만.”

“……왜?”

“나야 그 자식 맘을 모르지.”

방글방글 웃던 강라희의 얼굴이 금세 축 처졌다.

“지난번 휴가 나가서 알게 된 거 있지. 아무리 연락을 해도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알고 봤더니 자기네 학교 여자애랑 바람났더라?”

“아무런 말도 없이?”

“나한테 문자 보냈대. 그래서 내가 ‘나 휴가 나갈 때 말곤 휴대폰 못 쓰잖아.’라고 했더니, 이 잡놈이 뻔뻔한 얼굴로 ‘몰랐어, 미안.’ 요따구로 말하는 거야. 완전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놈 아니냐? 하도 열 받아서 따졌더니 내가 저를 잡을까 봐 걱정돼서 그랬다나? 아니 내가 왜? 우리가 무슨 열렬히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수능 끝나고 두어 달 사귄 게 전분데.”

강라희는 아주 어이가 없는 듯했다. 말을 하면서도 콧김을 식식 내뿜었다.

“그런 예의 없는 녀석이랑은 앞으로 말도 섞지 마. 생각도 하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아쉬운 건 걔지, 내가 아니거든.”

“잘 생각했어.”

이설은 손을 들어 강라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갈까?”

잘 자란 왕벚나무 앞에서 강라희가 발걸음을 멈췄다. 산책을 나오면 항상 반환점 역할을 하는 나무였다.

“오케이.”

이설이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였다.

“잠깐만, 사진 좀 찍고.”

강라희가 재빨리 이설의 팔을 붙들었다.

“휴대폰도 없는데 무슨 사진을 찍어?”

“이렇게 찍으면 되지.”

강라희가 생긋 웃더니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팔을 쭉 뻗었다.

“우린 너무 기계문명에 찌들어 있어. 참 개탄할 일이라는 생각 안 들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으로 찍는 사진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거지.”

강라희가 마치 휴대폰 카메라를 조작하듯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 찍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강라희가 카메라 버튼을 꾸욱 눌렀다. 이설은 그런 강라희와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었다.

* * *

점심을 먹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그 시간만큼은 식당에 있는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올림픽 경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좋은 건, 만약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이라도 따는 날이면 학원에서 전체 원생들에게 피자를 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래저래 축제 분위기가 연출되는 셈이었다.

“오늘도 금메달 따면 좋겠다, 그치?”

강라희가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소복하게 음식이 든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설은 밥을 뜨기 전 TV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태권도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16강전인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여느 때처럼 무심히 TV 화면을 응시하던 이설의 눈이 가늘어졌다.

80kg 초과급?

이설은 아무 생각 없이 TV 화면을 보다가 멈칫했다. 80kg 초과급은 백인서가 출전하고 있는 체급이었다.

설마…… 백인서인가?

한 체급에 두 명 이상 출전할 리는 없으므로 지금 TV 화면 오른쪽에서 파란색 보호구를 착용한 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백인서가 틀림없었다.

이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뚫어져라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해설자의 입에서 연신 ‘우리 백인서 선수, 대표팀 막내인데 정말 노련하게 경기운영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 백인서 선수가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대한민국 태권도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에이스 선수이자 해당 체급 세계 랭킹 1위의 선수죠. 이번이 첫 올림픽 출전이지만 최근 2년간 무패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좋은 성적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게 되면 겨루기 부문에선 명실상부 세계 최고가 되는 거죠.’ 어쩌고 하는 말들이 쉴 새 없이 고막을 때렸다.

이설은 밥 먹을 생각도 없이 화면에만 오롯이 집중했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던 닭갈비와 소고기 장조림 등은 안중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관심을 보이기는 강라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전직 태권도 선수답게 날카로운 눈으로 양측 선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나이도 어린데 괜히 세계 랭킹 1위가 아니야.”

“우리나라 선수?”

“딱 봐도 덩치가 장난 아닌데 움직임 좀 봐. 날렵하잖아. 그러면서 빈틈 하나 없어. 저러니 상대가 공격 타이밍을 못 찾고 우왕좌왕하지.”

강라희는 꼭 전문해설자 같았다. 그녀는 밥을 연신 떠먹으면서도 시선은 내내 TV에 두었다.

“저 체급이 복싱으로 치면 헤비급이나 마찬가지거든. 올림픽에선 가장 높은 체급이니까. 당연히 선수들 대부분이 한 덩치 하는 건 기본이고. 그래서 움직임이 다른 체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둔할 수밖에 없는데 저 선수는 미친 것 같아. 몸놀림이 혼자만 저세상 급이야. 근데 정이설 넌 밥 안 먹냐?”

열심히 떠들던 강라희가 이설의 식판을 가리켰다.

“……어? 어어, 먹어야지.”

“남자친구가 태권도선수라더니 너도 관심 장난 아니구나? 다른 종목 중계해 줄 땐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래도 밥은 먹어가면서 봐라, 응?”

이설은 차마 저기 나오는 대한민국 선수가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말은 입도 벙긋 못하고 밥을 두어 숟가락 떠먹었다. 때마침 2회전이 끝나 휴식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고. 그러나 고작 먹는 시늉뿐이었다. 3회전 시작을 알리는 해설자의 말이 나오자마자 시선이 자동으로 TV 화면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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