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원재범으로 말하자면, 이설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는 수업을 듣거나 복도에서 오다가다 마주칠 때, 또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라치면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사람을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눈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원재범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이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뿐이면 미친놈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텐데, 하루는 반 학생들이 전부 있는 교실에서 뜬금없이 말했다.
「우리 여기 공부하러 온 거야.」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하게 쳐다보자 기함할 말이 이어졌다.
「나한테 관심 그만 가지라고.」
「……뭐?」
「나도 네가 싫지는 않지만 공부가 먼저라서.」
이 정도면 진심 약도 없는 과대망상증이었다. 이설은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다정하게 웃지도 말고.」
뭐라는 거지? 이 미친놈이.
「앞으로 주의 좀 해줘.」
제 할 말만 지껄이고 돌아서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거짓 소문까지는 어떻게 참을 수 있었는데 더는 아니었다. 이 자식은 인내심의 한계 지점을 가뿐히 초과해 버렸으므로.
「야, 원재범.」
또박또박 제 이름을 부르자 원재범이 빙글 몸을 돌렸다. 제법 뿌듯한 얼굴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제 이름이 불리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 눈 되게 높거든?」
이설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질척대는 거 아냐.」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넌 내 기준점에서 한참 미달이야. 키도, 생긴 것도.」
「내 키랑 생김새가 어때서? 나 182야. 외모도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고.」
이설은 쓴웃음을 지었다. 치료 불가능한 과대망상증에 자아도취까지.
「그 정도론 안 돼. 내 취향 아니라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붙들어 매. 너 좋아하는 일 절대 없을 테니까.」
「그게 바로 전형적인 자기 위안이라는 거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거지.」
원재범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넌 학원 규칙도 모르니?」
그게 뭐냐는 듯 원재범이 빤히 쳐다보았다.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서로 사적인 대화 금지. 넌 그걸 지금 보란 듯 어기고 있는 건데 몰랐어?」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네가 너무 질척거리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규칙을 위반해서라도 바로잡아야지.」
「하, 정말.」
이설은 원재범을 쏘아보았다. 실루엣 안경테 속의 눈알이 반들반들 빛이 났다. 제 딴에는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얘 뭐지? 싸이코인가? 저런 녀석이 어떻게 의대 진학반에 들어온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도저히 대화가 불가능한 꼴통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말려드는 순간 재수고 뭐고 끝이라는 걸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경험상 이런 유형의 인간들에겐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헛짓거리를 못 하도록 철저히 짓이겨주든가, 그도 아님 개무시를 하든가.
이설은 주저 없이 두 번째를 택했다. 첫 번째는 노력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으며, 그럴 능력도, 가치도 없었다. 그에 비해 두 번째는 그녀가 아주 잘하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아빠에게 20년 동안 수없이 당해온 일이었으므로.
「알아들었으면 앞으로 주의 좀 해줘. 내가 너무 신경 쓰여서 말이야.」
원재범이 거만하게 덧붙였다.
「그러든지.」
이설은 원재범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원재범이 지금 뻔뻔하게 산책 가냐고 묻는 중이었다.
미친 꼴통 자식.
이설은 복도를 걸으며 미간을 와락 구겼다. 속이 다 메스꺼웠다.
저녁을 먹고 룸메이트인 강라희와 산책을 나왔다.
“아우, 저녁인데도 무진장 덥네.”
강라희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러더니 이설을 쓱 쳐다봤다.
“넌 어째 땀도 하나 안 흘리냐? 예쁜 애들은 원래 다 그런 거야?”
“뭐래.”
이설은 픽 웃었다.
“많이도 나왔네. 학원생들 죄다 나왔나 봐.”
강라희가 학원 건물 주변으로 굽이굽이 형성된 산책로를 따라 삼삼오오 걷는 학생들을 휘휘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생각난다. 저녁만 먹으면 줄줄이 사탕처럼 나와서 운동장 트랙 돌았는데. 선생님들도 군데군데 함께 돌고.”
강라희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너희도 그랬어? 우리 학교도 그랬는데.”
“저녁 먹고 운동장 트랙 도는 건 대한민국 여고생들에겐 국룰이지.”
이설의 눈빛도 아련해졌다. 불과 1년도 안 된 기억들이 아주 먼 옛날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냐?”
강라희가 불쑥 물었다.
“당연하지. 너 4일인가 늦게 입소했잖아.”
“울 아빠가 하필 그때 도쿄 출장이 잡혔거든. 나한테 신신당부하는 거야. 절대 아빠 없이 학원에 들어가는 만행은 저지르지 말라고. 아빠가 배웅하게 해달라지 뭐야. 얼마나 간절하게 부탁하던지 아빠가 오건 말건 그냥 들어가겠다고 하면 평생 원망할 기세였다니까.”
말끝으로 키득대던 강라희가 덧붙였다.
“우리 아빠가 양산시 대표 딸바보거든.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럼 좋은 거 아냐?”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은데. 지난번엔 휴가받아서 갔더니 자기도 휴가받고 싶다고 난리인 거야.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그러니까 맨날 엄마한테 구박받지. 철 좀 들라고.”
“난 부럽기만 한데 뭘.”
이설은 아주 잠깐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강라희네처럼 허물없고 밝은 가정을. 딸바보 아빠라니. 그런 말은 매체에서 수도 없이 들어봤다. 하지만 그게 대체 뭘까. 딸바보? 때리지나 않음 다행이지.
엄마랑 오빤 잘 있는 걸까?
「집 근처 학원에서 다니면 안 돼요?」
엄마와 오빠를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려 아빠에게 물었었다. 들어줄 리 없는 부탁이었다. 예상대로 아빤 무 자르듯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두 번 부탁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설이 기숙학원으로 들어오던 날 엄만 속내를 감춘 담담한 표정이었고, 오빤 눈물을 찔끔 흘려댔었다. 그래도 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더 안쓰러웠다.
집에서 학원까지는 넉넉잡고 한 시간 남짓이었다. 아빤 운전하는 내내 고득점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이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숨 막히는 순간들을 버텨냈다.
다행히 엄마와 오빤 그녀가 없어도 나름의 일상을 잘 유지하는 듯했다.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받아 집에 가면 평소와 다름없이 보였으므로.
“그래도 난 정이설 때문에 학원 생활 버티고 있잖아.”
나란히 걷고 있던 강라희가 습관처럼 팔짱을 껴왔다.
“처음 입소하던 날 휴대폰이랑 화장품 다 뺏기고 반 배정 시험 보러 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잠자기 전에 웹툰 보고 SNS 하는 게 찐 낙인데 그걸 뺏어버리니 앞이 캄캄한 거야.”
강라희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게다가 룸메이트라면서 너하고는 인사만 딸랑 시켜주고. 얼마나 뻘쭘했는지. 그러고 바로 다음 날 담임쌤이 나를 교실 맨 앞으로 끌고 갔잖아. 자기소개를 하라면서.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걸 시키냐고. 최대한 경상도 본토박이 사투리 안 나오게 또박또박 서울말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나중에 애들이 그러더라? 그게 훨씬 더 웃겼다고.”
기억난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단상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던 강라희의 모습이.
“그때 다들 피식피식 웃었는데 너만 안 웃은 거 알아?”
“내가 그랬나?”
“어. 그래도 룸메이트라고 너만 점잖게 바라봐주더라고. 마치 네 마음 다 이해해, 나도 너랑 똑같았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너 모르지?”
강라희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공간이 넉넉하던 두 사람의 상체가 바짝 붙었다. 온기가 넘쳐나는 자세였다. 이설은 그런 강라희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 역시 강라희가 있어 이곳 생활이 외롭지 않았기에.
“나도 마찬가지야. 너 때문에 참 많이 의지가 됐어.”
이설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만약 강라희가 없었다면 이곳 기숙학원에서의 생활이 참 삭막했을 것이다. 틀에 짜맞춘 듯 촘촘하게 이루어진 시간표에 따라 하루 일과를 진행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잘 통하는 룸메이트란 보석보다 값진 것이었다.
“우리 여기 처음 왔을 땐 서로 되게 어색했는데, 그치?”
이설의 말에 강라희가 ‘맞아, 맞아’를 연발했다.
“나 너 처음 봤을 땐, 완전 도도할 거라고 생각했잖아.”
“왜?”
“솔직히 너 입 다물고 있으면 되게 차가운 분위기거든. 일명, 냉미녀 스타일. 딱 그거라고.”
이설은 피식 웃었다. 한두 번 들은 얘기도 아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숱하게 들어온 얘기라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숫기가 없어서 그래. 다들 처음 만나면 그러지 않나?”
이설은 담담히 대꾸했다. 누군가와 처음 대면했을 때 상냥하게 구는 법 같은 건 잘 몰랐다. 먼저 손을 내미는 법도 서툴렀다. 그러다 보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생각해보니 인간관계에 대해선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정이설 넌 특별히 더 예뻐서 사람들 관심을 끌어모으는 거라고. 괜히 남자애들이 너만 보면 흘끔대겠냐. 원재범 같은 진성 또라이까지 말이야.”
“네가 모르고 있나 본데,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는 건 강라희 너야.”
“아니 대체 나를 왜?”
강라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같이 있음 기분 좋아지니까 그렇지.”
“내가 종종 그런 얘길 듣기는 해. 급이 다른 친화력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강라희가 방그레 웃었다. 이설이 제일 좋아하는 미소였다. 과하지 않으면서,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싶게 만드는 전염성이 강한 미소. 강라희는 그래서 언제나 인싸였다.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