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너도.”
손을 들어 백인서의 후드를 벗겨주려다가 슬쩍 가게 주인 쪽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서른 언저리로 보이는 젊은 주인이 두 사람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자, 벗겨줘.”
그것도 모르고 백인서가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이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손을 뻗어 백인서의 머리에서 후드를 벗겨주었다. 뭐,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잖아?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 거릴 주워섬겼다.
설마 머리카락도 정리해 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눈치를 챈 백인서가 씩 웃고는 상체를 바로 했다. 그는 볼이 살짝 달아오른 이설을 내려다보면서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쓱쓱 빗어서 정리했다. 이마가 반쯤 드러난 백인서는 놀라우리만큼 잘생겼다. 카페 주인 역시 눈썹이 슬쩍 올라가면서 동공이 확장되는 걸 보니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그래서 뭘 마실 건데?”
이설은 백인서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어수선해진 제 마음속을 힘겹게 정리했다.
“넌?”
“난 초코라떼. 휘핑크림 잔뜩 얹어서.”
말을 하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생각만 해도 그 달콤함에 한겨울 추위가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난 그냥 따뜻한 아메리카노.”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뭐, 그런 셈이지?”
백인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심장이 또 한 번 요동쳤다.
그만 좀 두근대지, 심장아? 방금 차분하게 정리해줬잖아. 근데 점잖지 못하게 왜 이래? 백인서에 관해선 면역이란 게 안 생기니?
눈치 없는 심장이 다시 한번 망종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설은 제멋대로 구는 심장을 호되게 나무란 후 자리에 앉았다. 별 소용이 없었다. 백인서가 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순간 대책 없는 심장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번엔 훨씬 더 맹렬히.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해보았다. 키스를 해서 그런가. 자꾸만 시선이 백인서의 입술 쪽으로만 향했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깔끔한 데다 남자치곤 색이 붉어서 더 시선을 끄는 듯했다.
저 잘생긴 입술로 나한테 키스를 했단 말이지. 그것도 아주 야하게. 혀를 막 집어넣고.
무심코 키스 장면을 떠올리다 반대편에 앉은 백인서와 시선이 맞물렸다. 놀랍게도 백인서의 시선 역시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얼굴이 화끈하다 못해 뜨끈해졌다. 이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시선으로 눈에 들어오는 아무거나 쳐다보았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벤자민 화분과 그 옆으로 놓인 앙증맞은 소품 등이 차례차례 스치듯 지나갔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트레이를 손에 들고 다가오는 카페 주인이 구세주라도 된 듯 반가웠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그녀를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자, 마셔.”
얼른 백인서의 앞으로 아메리카노가 든 머그잔을 내밀었다. 제 앞으로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려진 초코라떼를 끌어오고.
“와, 맛있겠다.”
반달 모양으로 눈을 크게 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백인서와 시선이 또 얽혔다.
“……왜?”
자꾸만 눈이 마주치니 없던 딸꾹질마저 생길 것 같았다.
“그냥.”
별다른 설명 없이 백인서가 빙그레 웃었다. 절대 ‘그냥’일 것 같지 않은 진한 암갈색 눈동자를 하고서.
“뭐야, 싱겁게.”
이설은 대수롭지 않은 척 빨대를 입에 물었다. 초코라떼를 마시다 보면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도 좀 괜찮아지겠지. 오늘은 예상에 없던 일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일어나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뿐이야.
하지만 휘핑크림을 다 먹고 음료가 반이나 줄어든 후에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백인서가 고개를 숙이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마시는 대로,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볼 때면 내다보는 대로 시선이 끝도 없이 들러붙었다. 이설은 자석에 이끌리듯 백인서의 얼굴과 입술로만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다잡았다. 무슨 이야기라도 꺼내야 했다.
“근데 아빠 계시다며. 모처럼 같이 보내는 설인데 안 들어가 봐도 돼?”
“춘천에서 돌아오시자마자 동창들 만난다고 나가셨어.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봐야 혼자야. 그리고 여자친구 만나다고 하면 두 손, 두 팔 들고 환영하실걸?”
“진짜?”
“툭하면 물어보셨거든. 얼굴이고 덩치고 어디 가도 빠지지 않게 낳아줬는데 어째서 여자친구 하나 없냐고. 혹시 여자들한텐 안 먹히는 타입인 거냐고.”
“음, 그건 절대 아닐걸?”
이설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인기 많았어. 중학교 때도 그랬고. 아저씨가 사정을 잘 모르시는 듯.”
“너한테도?”
“어?”
“너도 나한테 맘 있었냐고.”
백인서가 상체를 숙이더니 장난스럽게 눈을 맞춰왔다.
“……그건 아니고.”
아주 가끔 눈길이 가기는 했었지만. 이설은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여태 여자친구 하나 없었던 거야.”
백인서가 피식 웃었다.
“난 정이설 너한테만 정신이 팔려 있는데 넌 나한테 눈길 한번 제대로 안 줬잖아. 그러니 여자친구가 있을 수 있겠냐고. 내가 사귀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뿐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절절하냐? 듣는 사람 민망하게.”
이게 아닌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다시 민망한 상황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설은 이번에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이거 한번 볼래?”
틈날 때마다 자주 찾는 강아지와 고양이 브이로그가 액정 위로 주르르 떴다.
“뭔데?”
백인서가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강아지랑 고양이 브이로그. 완전 귀엽지?”
이설은 빠른 손놀림으로 브이로그를 검색하다가 그중 하나를 백인서에게 보여주었다.
“고양이잖아.”
백인서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뭐야, 고양이라니.”
이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백인서를 쳐다보았다. 백인서가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양이가 아닌가?”
이설을 건너다보는 눈동자 속에 물음표가 동동 떠오르는 것이 다 보였다.
“당연히 고양이지.”
“아깐 고양이 아니라며.”
백인서는 어안이 벙벙해진 눈빛이었다. 홍길동도 아닌데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였나?
“얘넨 그냥 밋밋하게 부를 만한 고양이가 절대 아니라고.”
“아아.”
그제야 백인서는 알아차린 듯했다. 제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정이설에게 화면 속에서 공 굴러가듯 데굴데굴 움직이는 고양이는 그저 무덤덤한 어조로 고양이라고 불려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단 감탄사부터 내뱉은 다음 최대한 사랑스러운 마음을 기본 전제로 깔고 불러줘야 하는 특별한 고양이라는 것을.
그게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근본부터 확실히 다르다고. 긍정적인 감정을 잔뜩 실어서 부르는 고양이와 소 닭 보듯 무덤덤하게 부르는 고양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양이였으므로.
“움직이는 것 좀 봐. 꼬물꼬물.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설은 애써 고양이들을 바라보았고, 백인서는 연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양이에게 빠져드는 이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음, 남자들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려나?”
이설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화면 속에서 폴짝폴짝 뛰어대는 회색 솜뭉치들에 집중하려 했지만, 자신에게 꽂히는 따가운 시선에 마음이 자꾸만 흩어졌다.
“……야, 그만 봐.”
슬쩍 손을 들어 제 뺨을 문질렀다. 백인서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닐까 괜한 걱정마저 들었다.
“미안.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놓고는 제 말에 확 붉어지는 이설의 얼굴로 시선이 또 따라붙는다.
“어…… 고양이 브이로그 안 볼 거면 그만 끄고.”
이설은 볼이 화끈해지는 바람에 서둘러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계속 봐.”
“관심 없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내 얼굴만 보고 있었지.”
“나도 고양이 좋아해.”
백인서가 진심인지 뭔지 모를 말을 건넸다.
“진짜?”
확인차 한 번 더 물었다. 혹시나 싫은데 너 때문에 꾹 참고 본다는 말이 나올까 봐.
“응, 그러니까 계속 보자.”
백인서가 휴대폰 액정 쪽으로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이마가 서로 ‘콩’하고 부딪쳤다.
“너무 가까웠나?”
백인서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몸을 떼지는 않았다. 이설은 콩닥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브이로그를 다시 재생시켰다.
“이 고양이가 먼치킨 고양이라는 거야.”
자식 자랑이라도 하듯 뿌듯하게 말했다.
뭐랄까, 생긴 건 마치 풍선 두 개를 붙여놓은 듯 동글동글하고,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회색 털은 마냥 보송보송한 것이, 짧디짧은 다리로 걸음을 걸을 때면 지면에 발이 닿지 않는 듯 공기처럼 사뿐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렇게나 통통하게 살이 올랐는데 무게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 게다가 한주먹밖에 안 될 것 같은 조그만 덩치에 왕사탕 저리 가라 할 만큼 커다란 청회색 눈동자가 두 개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일단 외양부터 이러니 숨이 막히도록 귀여운 건 당연했다.
“귀엽네.”
“그치? 저기 발 움직이는 것 좀 봐.”
“그렇게 귀여워?”
표가 나도록 얼굴이 환해졌나 보다. 곧바로 이런 질문이 날아드는 걸 보니. 그럼에도 이설은 좋았다. 백인서와 함께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고양이 브이로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있잖아.”
조금 망설이다가 운을 떼었다.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나 고양이 보는 거 되게 좋아했어.”
“그래?”
“힐링 되는 기분이랄까? 계속 보고 있으면 막 행복해지거든. 입꼬리도 장난 아니게 올라가고.”
“몰랐어. 그 정도로 반려동물을 좋아하는지.”
“내 꿈이 어른 돼서 독립하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강아지랑 고양이 키우는 거야.”
그럼 아빠한테서 협박성 발언 같은 걸 들을 일도 없을 테니까. 이설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씁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