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목화솜처럼 하얗고 동그란 눈송이들이 하나둘 사이좋게 지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송이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근래 보기 드문 함박눈이었다.
손을 내밀었다. 길게 뻗은 검지 끝으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피부에 닿았는지도 모르게 가볍고 부드럽게. 이마 위로도 서너 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떨어져 내렸다. 보송한 눈송이가 불만투성이 이마 위로 사락, 내려앉는 순간 툭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온도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움직임이 퍽 우스워서.
백인서는 아파트 정문에서 몇 걸음 더 가지 않아 마주쳤다. 정말 타이밍 하난 기가 막혔다. 이설은 얼른 손을 들어 흥건해진 눈가를 비볐다. 백인서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그녀가 최악일 때만 마주치게끔 누군가 의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못 본 척 지나갔다. 곧장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걸었다. 어차피 107동까지는 같은 방향이었으므로.
* * *
111동을 지나 110동이 가까워졌다. 그다음이 107동이었고, 뒤이어 ‘Happy Plaza’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광장이 나왔다.
이설은 저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함박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광장을 지나면 곧바로 갈라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그녀가 사는 105동이었고, 반대쪽으로 꺾어서 50미터 정도 더 가면 백인서가 사는 101동이었다.
잘 가라는 인사 따위 안 해도 되겠지? 어차피 처음부터 못 본 척했잖아. 이제 와서 예의를 차린답시고 알은체하면 더 웃길 거야.
이설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인서 역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등 뒤로 바짝 따라붙는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설은 불편함을 느끼며 걸음을 빨리했다. 원래대로라면 광장을 지나치자마자 그녀는 왼쪽으로, 백인서는 오른쪽으로 갈라졌어야 했다. 그러나 왼쪽으로 스무 걸음 이상을 걸었는데도 백인서는 여전히 그녀와 같은 방향이었다. 걸음 역시 늦추지 않았다. 조금만 속도를 느리게 하거나 발걸음을 멈추면 그의 널찍한 가슴에 뒤통수를 콩 하고 부딪칠 정도의 공간밖에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나를 왜 따라오겠어.
이설은 애써 무시하며 공동현관 앞에 섰다. 빠르게 비번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백인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따라오지 않겠거니 했는데 착각이었다. 등 뒤로 백인서가 성큼 다가섰다. 겨울 공기를 한껏 품은 기운이 정수리 위에서 생생히 느껴졌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성마르게 몸을 돌렸다.
“언제까지 따라올 건데? 설마 우리집까지 따라올 작정이야?”
“그건 아니고.”
백인서가 대답했다. 공동현관 복도를 커다란 덩치로 가득 채우면서. 민망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그럼 왜 따라오는 건데?”
“어쩌다 보니. 부담돼?”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백인서가 물었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 나는 큰 키로 이설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평소보다 더 서늘했다.
“어, 완전.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
이설은 냉담한 손길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하필 언제 내려올지도 모르는 꼭대기 층이었다.
“오늘은 왜 혼자야? 다른 가족은?”
싫다는 데도 백인서는 계속 물었다.
“그러는 넌 왜 혼자인데?”
말간 얼굴로 질문을 되돌렸다. 이제나저제나 속사정을 털어놓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게 비록 백인서일지라도.
“혹시 이번에도 현장 나가셨어? 아빠 말이야.”
“아니, 이번 설은 함께 지냈어.”
“다행이네.”
이설은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잘 내려오다가 6층에서 멈춰버린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하필 멈춰도 그녀가 사는 층에 멈춰 있다.
“넌 왜 혼자냐고.”
백인서가 재차 물었다. 이설의 좁은 어깨 위로 그늘을 짙게 드리운 채로. 말투는 여상했지만 눈빛은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알 거 없어. 사생활이잖아.”
“얘기해 줄 수도 있지.”
“내가 왜?”
“우리 친구 아니었어?”
담담하게 응수하는 백인서의 어깨 위로 미처 녹지 않은 함박눈이 소복하다. 불쑥 손을 뻗어 털어내 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서둘러 시선을 내려뜨렸다. 백인서랑 있으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뜬금없이 감정이 널을 뛰었다. 그게 싫었다. 지난번처럼 감정이 녹아내려 쓸데없는 치부를 드러내게 할까 봐.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넌 아닌가 보지?”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해?”
필요 이상으로 발톱을 세웠다. 그러면 백인서가 물러날까 싶었다.
“그리고, 친구건 아니건 그냥 좀 지나가 주면 어때서. 그게 서로 예의 아냐?”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물러서기는커녕 백인서는 더 진지해졌다. 더불어 눈치까지 없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내뿜는데 이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제발 관심 좀 끊어줄래? 하나도 안 고마우니까.”
표나게 세운 발톱이 더욱 날카롭고 뾰족해졌다. 전부 눈치 없이 구는 백인서 탓이다.
“설이잖아. 음력 1월 1일이라고.”
“뭐라는 건지.”
헛웃음이 나왔다. 남의 사생활에 관심 있는 것과 설 명절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흘끗 쳐다본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6층이었다. 분명 어떤 몰지각한 주민이 버튼을 누른 채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게 분명했다. 맘이 조급해졌다.
“나 바빠. 할 말 없으면 그냥 가.”
이설은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재빨리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6층이었고 걸어서 올라가자면 못 갈 것도 없는 층수였다. 예상을 깨고 백인서가 또 따라온다. 정말 어쩌자는 건지.
“좋아, 따라오고 싶으면 따라와. 난 집으로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차갑게 내쏘는 시선 속으로 백인서가 끼고 있는 장갑이 들어왔다. 수능시험을 보던 날 그녀가 사준 장갑이었다. 디자인도 색감도 전혀 취향이 아니라 영 성에 차지 않던 장갑이었는데 저걸 아직도 끼고 있다고?
“그러든지.”
백인서는 꿋꿋했다. 이설이 매몰차게 내치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뻔뻔해진 거지?
그는 이설이 한 계단 올라가면 두 계단씩 따라잡았다. 유달리 다리가 기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위치가 역전되는 건 금방이었다. 2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설은 백인서를 올려다보는 신세가 됐다.
“장난 그만하지?”
이설은 걸음을 딱 멈췄다. 계단을 이용해 상황을 회피하는 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뭘?”
백인서가 맞받아쳤다.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 행동에 짜증이 밀려들었다.
“너 눈치 없니? 원래 이렇게 둔했어?”
날카로운 힐난에도 백인서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숯검정 눈썹만 슬쩍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게 더 약이 올랐다.
“사람이 못 본 척 지나갈 땐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잖아. 아무리 눈치가 둔치라도 그 정도는 기본 아냐?”
이설은 1층에서 2층으로 꺾어지는 층계참에 서서 백인서를 쏘아 보았다.
“내가 따라오는 게 싫었으면.”
백인서가 한 걸음 다가서더니 낮게 운을 뗐다.
“우는 걸 들키지나 말든가.”
“……뭐?”
이설은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냐. 그러니 내가 신경이 쓰여, 안 쓰여.”
“대체 뭐라는 거야. 나 안 울었거든?”
“빨개진 눈언저리나 어떻게 하고 그런 말 하지?”
백인서가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이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건 그냥…….”
“또 어떤 말로 사람 마음을 헤집으려고?”
백인서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눈동자는 무척 깊었으며 동시에 다정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장이 곧장 반응을 보였다.
“누, 누가 너한테 그런 거 신경 써 달래? 하나도 안 고맙거든? 너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 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하, 대체 말은 뭣 때문에 더듬는 건데? 심장은 또 왜 미친 듯이 뛰어대고.
이설은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등 뒤로 차갑고 딱딱한 계단 벽이 느껴졌다.
“그렇게는 못 하겠으니까 문제지.”
“왜? 그냥 지나치는 게 그렇게 힘들어? 그래서 내가 싫다는 데도 매번 참견하는 거야?”
“내 마음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백인서가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네가 울면 미치겠는 건 확실해.”
“…….”
“알아들었어? 난 정이설 네가 우는 것만 보면 돌겠다고.”
“그, 그러니까 왜.”
이설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게.”
삼킬 듯 빤히 내려다보던 백인서가 손을 뻗었다.
“너를 되게 많이 좋아하는가 보지.”
“……뭐?”
“그렇다고, 내 마음이.”
서슴없이 다가온 손이 붉게 얼룩진 눈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치 소중한 걸 애무하듯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었다.
“……야, 너 왜 이래.”
“내가 뭘?”
“누가 함부로 만지랬어.”
“미리 허락받고 만졌어야 되는 거냐?”
백인서의 눈가로 설핏 웃음기가 번져나갔다. 심장이 쿵 떨어지면서 호흡이 단박에 얼크러졌다. 끝도 없이 숨이 차올랐다.
이게 뭐지? 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만지는 건데? 이러면 반칙이잖아.
이설은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말문은 진작에 막혔고 애꿎은 입속만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게다가 심장은 무슨 이유로 정신없이 뛰어대는 건데.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밀어내려던 차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왁자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공동현관 복도를 왕왕 울렸다.
“아유, 바쁜데 무슨 선물까지 들고 오셨어요. 이러면 제가 감사해서 원.”
계단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 중 한 사람은 분명 이설의 집과 현관을 마주 보는 607호 아주머니였다. 동네방네 소문 퍼뜨리기를 좋아해서 인간 나팔수라는 별명까지 붙은 아주머니였다. 이설은 극도로 긴장해서 몸을 움츠러뜨렸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러는 줄 알고 백인서가 손을 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