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할아버지 댁엔 오전 10시경에 도착했다. 엄만 여느 명절과 다름없이 차례 준비에 열심이었고, 아빤 거실에 앉아 할아버지와 태연하게 바둑을 두었다. 운전대 뒤에서 지치지도 않고 화를 내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설은 대학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한 처지였으므로 군말 없이 부엌에서 엄마를 거들었다.
작은집 식구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야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섰다. 양손에 두둑한 현금 봉투와 선물꾸러미를 바리바리 들고. 얼굴엔 하나같이 함박웃음 꽃들이 펴서 흡사 개선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유주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과목에서 한 번도 1등급을 놓치지 않은 완벽한 학업 우수생인 데다, 올 수능에서도 겨우 한 문제밖에 안 틀린 덕분에 수시지원한 모든 대학에서 최초합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뤄냈다지 않은가. 학교 정문엔 서울대 의대 합격을 알리는 커다란 현수막이 자랑스럽게 펄럭였고, 작은아빠 내외는 부녀가 모두 서울대 의대를 들어갔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축하 전화를 받느라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지?
“우리 유주 어서 들어와라.”
“아이구, 대견하기도 하지.”
환한 얼굴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정유주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조선시대로 치자면 과거급제와 다를 바 없다는 거한 칭찬까지 곁들이며.
그건 학생을 뽑는 게 아니라 관리를 채용하기 위한 시험인데. 이설은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괜히 한번 토를 달아봤다.
정말 대단한 건 아빠였다. 재빨리 표정 관리에 들어간 아빤 큰아버지다운 넉넉함으로 유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엄마 역시 작은엄마와 유주에게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떠들썩하게 덕담이 오고 간 후, 작은엄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형님.”
살가운 말투로 작은엄마가 말을 걸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엄만 그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뭐부터 할까요?
“응, 이거 하고 이거 그릇에 담아 내가면 돼.”
“아유, 형님은 정말 음식 솜씨도 좋으세요. 언제 이 많은 걸 다하셨어요?”
“해마다 하는 건데 뭘.”
이제는 순서까지 다 외울 지경인 대화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부유물처럼 네모난 부엌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식탁 위로 온갖 음식들이 차려졌다. 간이 잘 배어 윤기가 도는 소갈비에서부터, 비트를 넣어 색이 곱게 우러난 물김치까지.
“유주야, 이거 받아라.”
식사를 하기 전 할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뭔데요?”
유주가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긴, 대학입학 선물이지.”
“에이, 안 주셔도 되는데.”
“그래도 그게 아니다. 어서 받아.”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유주는 참 싹싹했다. 식탁 너머로 두 손을 쭉 뻗어서 할아버지가 내미는 봉투를 답삭 받아들었다.
“안 열어 볼 거야?”
봉투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유주에게 할머니가 슬쩍 운을 뗐다.
“한번 열어볼까요?”
눈치 빠른 유주가 얼른 봉투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빳빳한 수표 한 장이 손가락 사이로 딸려 나왔다.
“우와…… 천만 원이요?”
유주가 수표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머나, 아버님. 너무 많아요.”
“그래요, 아버지. 이제 갓 대학 들어가는 애한테 무슨 천만 원씩이나.”
놀라기는 작은아빠와 작은엄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서울대 의대생인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 안 그러냐, 유주야?”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과하신 것 같은데요, 아버님.”
작은엄마가 말끝으로 우아하게 웃었다.
“죽어서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그깟 돈 손주한테 좀 쓰면 어떠냐.”
할아버지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유주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한마디 했다.
“이설이는, 크흠, 대학에 붙으면 주마, 알았니?”
선심 쓰듯 건네진 말에 이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깟 돈, 액수가 천만 원이 아니라 일억이라도 받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조부의 위치였다면, 대학에 붙은 손주보다 떨어진 손주가 훨씬 더 안쓰럽고 애틋할 텐데 할아버지에겐 그런 마음이 십 원어치도 생기지 않는가 보다.
모르고 있던 사실도 아니었다. 더 잘나고, 더 똑똑한 자식만 편애하는 게 아빠 쪽 집안 내력이었다. 무슨 약육강식의 세계도 아닌데 아무튼 그랬다. 그러니 아빠가 저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비뚤어진 양육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쌍한 아빤 어려서부터 수재로 이름을 거하게 날린 한 살 터울의 작은아빠에게 치여 공부를 꽤나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된 칭찬 한번 못 듣고 컸다지 않은가. 그나마 이만큼의 대접을 받게 된 것도 지금은 없어진 지방고시에서 세 번이나 떨어진 후, 절치부심 끝에 겨우 합격한 덕분이었다.
그때도 할아버지는 지금처럼 후한 선물을 내놓았다지?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졌을 때는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했었으면서.
한번은 할아버지 댁에서 창고 열쇠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누가 가져간 것도 아니고, 도둑이 든 것도 아니었는데 할아버진 당장 창고 열쇠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문이란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전부 도끼로 때려 부쉈다. 열지도 못하는 잠금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냐며.
광기 어린 그 모습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서웠던지 이설은 그날 밤 악몽을 꾸었고, 오빤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의 강박증과 폭력성을 똑같이 물려받은 아빠 역시 필요한 무언가가 제자리에 없으면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눈을 번득이고, 불같이 화를 내고.
이설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런 거였구나. 괴물은 그냥 혼자 나오는 게 아니었어.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는 거지.
“이설이도 내년엔 꼭 붙어야 하는데 말이지.”
마냥 잔칫집 같은 분위기가 그랬는지 작은아빠가 슬쩍 이설의 역성을 들었다.
“붙겠지. 공부 잘하는데 무슨 걱정이야?”
작은엄마가 나란히 앉아 있다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안 그래요, 형님?”
“……어? ……어어, 그렇지.”
엄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우리 유주보다 이설이가 뭐든 뛰어났잖아요.”
“그랬었나?”
“어딜 가나 돋보이는 애가 이설이였다니까요. 형님은 잘 모르셨구나.”
“무슨, 유주도 모범생이었는데.”
“공부 말고요.”
작은엄마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이설이가 좀 예뻐요?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인물이 훨씬 좋잖아요. 탑급 연예인 정도는 돼야 비교 대상이 되려나? 지금도 그래. 평범한 티셔츠에 흔한 면바지 차림인데 깜짝 놀랄 만큼 예쁘잖아요.”
“뭘 그렇게까지.”
“혹시 의대 말고 연예인 시켜볼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꼭 공부 쪽으로만 길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마다 다 자기 그릇이라는 게 있는데.”
“……글쎄.”
엄마는 난데없는 작은엄마의 훈수에 반가워하기보다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쾌한 표정이긴 아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시간 되시면 기획사에 프로필 사진 한번 넣어보세요.”
“기획사에?”
“요즘은 연예인이 대세라는 말도 있잖아요. 오죽하면 애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귀족계급이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거기서 끝났으면 기분이 그렇게 엿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대학입시에서 보기 좋게 물을 먹었지만,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한 정유주를 기꺼이 축하해줄 의향 정도는 충분히 있었기에. 부럽기는 했어도 고까운 마음까지는 전혀 없던 이설이었다. 작은엄마가 쓸데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지만 않았다면.
“다른 길도 많은데 굳이 의사 할 거 뭐 있나요? 난 그거 진짜 별로더라. 힘들기만 하고 자기 시간도 별로 없고.”
그럼 정유주도 의대 보내지 말고 연예인 시키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좋은 거 저한테만 권하지 말고.
버릇없는 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안 그러니, 이설아?”
작은엄마가 특유의 사근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 의사 할 건데요?”
이설은 생긋 웃으며 되받아쳤다.
“아니, 왜?”
작은엄마가 쌍꺼풀이 진하게 진 눈을 과장되게 뜨며 재차 물었다.
“그게 제 꿈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아유, 아쉽다. 그렇게 예쁜 얼굴을 가지고 병원에만 있어야 한다니. 외모 낭비야, 외모 낭비.”
“그럼 얼굴 예쁜 의사 하면 되죠, 뭐. 환자들도 이왕이면 예쁜 의사 선생님을 더 좋아한다잖아요.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에이, 그래도 연예인에 비할까. 수입 면에서나 인지도 면에서나.”
“정 아쉬우면 나중에 전문가 자격으로 TV에 출연하는 방법도 있어요. 요즘엔 의사들도 전공과목 상관없이 방송 출연 많이 하는 추세니까요. 작은엄마 말씀처럼 전 외모가 되니까 한번 방송에 얼굴 내밀면 출연 섭외가 밀려들지 않을까요?”
생글거리며 따박따박 대꾸하자 작은엄만 더 이상 뭐라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 지겨워.
저녁을 먹고도 기형적인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숨이 막혔다. 법적으로든, 혈연으로든, 가깝다면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이렇게 모래알처럼 겉돌기도 힘들 것이다. 설이 아니라 무슨 서바이벌 게임장 같았다.
가족들에겐 폭군이나 다름없이 행세하면서 할아버지 앞에서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설설 기는 아빠나 의대는 접고 연예인이나 하라며 만날 때마다 돌려 까는 걸 잊지 않는 작은엄마에, 혹여 오빠가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무슨 실수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는 불쌍한 엄마와 동갑내기 사촌 정유주에게만 대학입학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거금을 투척하는 할아버지, 그걸 또 옆에서 잘한다며 부추기는 할머니까지 전부 거지 같고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