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추워서.”
말도 안 되는 핑계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갑자기?”
“진짜야. 어두워지니까 훨씬 더 춥다고.”
이설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궁색한 이유를 서둘러 주워섬기며 다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히 국어 얘기는 꺼내 가지고. 벌써부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빤 지금쯤 사무실에 있겠지? 온통 굳은 얼굴을 하고서. 어쩌면 수능 관련 기사를 확인하고 있거나 예상 등급 컷 따위를 검색하고 있을지도. 오늘은 야근 안 하나? 지난번 폭우 땐 매일 야근을 했었는데.
입술이 다시 근질거렸다. 우툴두툴한 거스러미들이 못 견디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손이 움찔댔다.
“춥다며.”
입술 거스러미를 떼어내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는데 백인서가 커다란 손으로 이설의 손을 움켜잡았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처럼. 이설은 백인서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두어 번 꼼지락거리다가 스르르 힘을 풀었다.
“……안 할 테니까 놓아줘.”
“뭘?”
“입술 뜯는 거.”
말이 끝나자마자 백인서의 손에 다시 한번 힘이 주어졌다. 조그만 손이 커다란 손안에서 맥을 놓고 이지러졌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섭게 속박하던 손아귀에서 힘이 풀어졌다. 이설은 겨우 풀려난 손으로 하릴없이 허공을 한번 휘저어 본 다음 백인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손끝에 닿는 복부 근육이 순간적으로 꿈틀하는 게 느껴졌다.
겁은 내가 먹었는데 왜 긴장은 네가 해?
이설은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점점 검게 변하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건물들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집이 가까워졌다는 표시였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참아야 하는데 지난번처럼 못 참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집안이 엉망이 될 건 뻔한데. 최악의 경우 오빤 발작을 일으킬 거고, 엄만 그 후유증으로 몇 날 며칠을 불면증에 시달릴 텐데.
정말 나보고 어쩌라고.
* * *
괜찮다는 데도 백인서는 기어이 이설이 사는 아파트 동까지 따라왔다.
“너 춥겠다.”
이설은 제 앞에 선 백인서에게 어색하게 웃어 주었다.
“하나도 안 추워. 네가 장갑 사줬잖아.”
백인서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공동현관 불빛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장갑이 유난히 더 촌스러웠다. 한숨이 나왔다. 괜히 손은 무지막지하게 커 가지고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된 장갑으로 사줄게.”
“이것도 괜찮아.”
백인서가 씩 웃었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처지는 모습이 언제 보아도 참 근사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색깔이며 디자인이 그게 뭐야.”
“정 원하면 사주든지.”
“…….”
“…….”
이상한 순간에 말이 끊겼다. 이설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백인서를 올려다보았다. 공동현관 불빛에 비친 그의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이마는 넓고 반듯한 데다, 눈매는 굉장히 깊었고, 잘생긴 콧대는 어느 하나 휘어진 부분 없이 곧게 쭉 뻗은 채 날렵하고, 그리고…….
이설은 거기까지 생각하다 얼른 멈추었다. 뜬금없는 외모 감상이었다.
“그만 들어갈게. 백인서 너도…….”
“이설아.”
“……어?”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해줄래?”
“……뭘?”
이설은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백인서가 그녀의 이름 석 자중 성을 빼고 부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전혀 고등학생답지 않은 서늘함이었다.
“이거.”
곧게 뻗은 손가락이 이설의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 말라고.”
새하얗게 피어난 거스러미와 그 거스러미를 떼어내는 과정에서 생겨난 피딱지로 온통 우툴두툴한 입술 위로 백인서의 손가락이 곧장 내려앉았다.
“……아, 이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별로 안 아파.”
“그래도 하지 마.”
무언가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릴 때였다.
“너 뭐 하는 녀석이야.”
차가운 목소리가 저녁 공기를 갈랐다. 시선을 돌린 곳에 아빠가 서 있었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뭐 하는 녀석인데 우리 이설이 얼굴에 손을 대.”
원래도 다정다감한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오늘 밤의 아빤 유독 더 냉랭했다. 목소리만으로도 감정을 베일 것 같은 차가움이었다. 백인서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이설이 친구 백인서라고 합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이설과 달리 백인서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게 더 신경을 자극했는지 아빠의 얼굴이 사납게 경직됐다.
“친구면 함부로 얼굴에 손을 대도 되는 거야? 더구나 이렇게 어두컴컴한 저녁에.”
“죄송합니다.”
백인서가 사과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들어가자.”
그런 백인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빠가 이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녀석이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빠가 물었다.
“뭐가요?”
“추석 때 같이 파스타 먹었다던.”
“…….”
“태권도선수면서 엄마는 없고.”
흘려넘길 줄 알았는데 아빤 백인서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동하는 애들 가까이하지 마. 어려서부터 공부는 안 하고 몸만 써서 무식하고 폭력적이야. 너한테 도움 될 거 하나도 없는 부류들이라고.”
무식하고 폭력적이라는 말에 이설은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구에게 폭력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건지. 국가대표면서 공부까지 전교 10등 안에 드는 괴물이란 말도 했는데, 아빠의 기억은 아무래도 선택적인 모양이다. 백인서에 대해서 좋은 점은 싹 잊어버린 걸 보니.
“왜 대답 안 해?”
아빠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그쳤다.
“아빠가 걱정할 만한 사이 아니에요. 그냥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냥 우연히 만났는데 여자애 입술을 제멋대로 더듬어 대?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
“시험은 꼴 같지 않게 봐 놓고 벌써부터 연애질할 생각이라면 애저녁에 접어.”
아빠는 몹시 불쾌해 보였다. 못 볼 꼴을 본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한껏 구겨진 미간에 서슬 퍼런 기운을 보면 알 수 있다. 폭발하기 직전의 전형적인 표정이었으므로.
“하필 만나도 어디서 저런 녀석을.”
“…….”
“이목구비 번지르르하고 덩치깨나 있는 걸 보니 나중에 몸으로는 먹고살겠다만 너한테 어울리는 수준은 아니야. 운동하는 애들 중에서도 특히 유도나 태권도처럼 격투기 하는 애들, 몸만 믿고 까불다가 폭력으로 인생 망치기 딱 좋아. 우리 때는 저런 애들 조폭으로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어.”
“…….”
“그러니까 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얌전히 있다가 너랑 격에 맞는 애랑 만나. 괜히 저런 질 떨어지는 녀석들이랑 엮이지 말고. 알았어?”
이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백인서는 그저 엄마도 없이 편부슬하에서 태권도나 하는 무식하고 머리 텅 빈 운동선수 나부랭이에 불과한 모양이니까. 그것도 몸만 믿고 까불다가 언제 폭력으로 얼룩질지 모르는.
정말 창피해. 어떻게 하면 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빠져들 수 있는 거지?
이설은 무심결에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렇게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도암시 기획실장이라는 게 진심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책상에서 노트북부터 집어 들었다. 저기, 애 밥이라도 먹이고서……. 부탁하듯 읊조리는 엄마의 말은 아빠가 사나운 눈빛과 함께 혀를 한번 쯧 참으로써 싹둑 무시되었다.
이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오빠가 유난히 동공이 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문틈으로 빼꼼히 내다보고 있었다.
“확인해 봐.”
아빠의 말에 이설은 노트북을 열고 수능시험 사이트로 들어갔다. 정답지를 다운받는데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제발, 점수가 잘 나왔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답안을 확인해야 하는데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확인 안 할 거야?”
아빠가 성마르게 재촉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선득하게 빛내면서.
“……할게요.”
이설은 숨을 한번 참았다가 내쉰 후 정답지를 클릭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그나마 국어시험의 영향을 덜 받은 영어였다.
“몇 점이야?”
아빠가 물었다.
“……100점이요.”
다행이었다. 풀면서 다 맞을 거라고 예상했던 과목 중 하나가 바로 영어였다. 그다음은 과학탐구 영역 2개였고.
“수학은.”
“……이제 확인할게요.”
클릭 몇 번으로 수학시험 정답지가 노트북 화면을 가득 메웠다. 이설은 수험표 뒷면에 적어온 자신의 답안과 정답지를 하나하나 비교하기 시작했다. 번호가 뒤로 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낯빛을 아빠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점수가 어떻게 돼.”
“……87점이요.”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 점수였다. 아빤 아무 말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국어 매겨 봐.”
“…….”
“안 할 거야?”
“……할게요.”
이설은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는 손으로 정답지를 클릭했다. 수학 점수를 매길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이 연신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점수 불러 봐.”
“그게…….”
“제대로 말 안 해?”
아빠의 목소리가 더없이 싸늘해졌다.
“……89점이요.”
수학보다는 조금 더 높은 점수였다. 하지만 지금껏 국어에서 2문제 이상 틀려본 적이 없는 이설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점수였다.
“한심해서는.”
아빠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문제를 푼 거야.”
“…….”
위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의 입에서 연이어 나온 말이 명백한 비웃음이라는 건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심장이 끝 간 데 없이 툭 떨어졌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새하얀 노트북 위로 멍울을 동그랗게 만들며 떨어져 내린 건 투명한 눈물방울 몇 점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