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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1화 (11/130)

11화

이설은 얼른 시선을 내리고는 백인서의 등에 도로 제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껏 의식 안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났다. 뭔가 알싸하고 그러면서 청량감이 물씬 배어나는 냄새였다. 섬유유연제 냄샌가? 아님…….

“넌 안 춥냐고.”

백인서가 다시 물었다.

“나야 뭐…… 네가 등으로 다 가려주고 있잖아.”

그것도 엄청 넓은 등으로.

“나도 딱히 추운 건 없어. 참을 만해.”

“그럼 손은 왜 그런 건데?”

“내 손이 왜.”

백인서가 무심한 시선을 제 손등으로 쓱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되게 빨갛잖아. 아침에도 그러더니.”

“아침에 언제?”

“어?”

“아침에 언제 봤냐니까?”

백인서가 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앞이나 제대로 보지? 안전운행 몰라?”

“하여간에 말 돌리는 거 하난 선수지.”

“내가 뭘.”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내 질문에.”

백인서는 끈질겼다. 서글서글한 생김새로 봐선 대충 넘어갈 것도 같은데 이럴 때 보면 집요한 구석이 있다.

“언제긴, 너 교실에 들어올 때지.”

“나한테 관심 있었나 봐?”

“누가, 내가?”

“그게 아님 뭔데.”

“옆으로 지나가니까 본 거지. 어쩔 수 없이.”

이설은 ‘어쩔 수 없이’라는 말에 또박또박 강조를 두었다.

“정말이야? 나라서 보인 건 아니고?”

“너 자꾸 확대 해석 하고 그럴래?”

“확대 해석이 아니라 사실 같은데.”

“그렇게 믿고 싶음 그렇게 믿든지.”

새침하게 대꾸했으나 돌아오는 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너 되게 이상한 부분에서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

“어, 내가 좀 그래. 정이설하고만 있으면.”

백인서가 들으라는 듯 덧붙였지만 이설은 못 들은 척했다. 또 무슨 엉뚱한 말이 날아올까 싶어서.

“아무튼 너 손 되게 빨갛다고. 어떻게 좀 해봐. 보기 딱해 죽겠어.”

“네 손은 안 빨갛고?”

“난 두 손 모두 네 패딩 속에 들어가 있잖아. 완전 따뜻하다고.”

“그럼 됐어.”

백인서가 또 웃는다. 이상한 부분에서 좋아한다고 말한 게 또 확인된 셈이다.

“뭐가 됐다는 거야?”

“넌 따뜻하다며. 그럼 된 거 아냐?”

“되긴 뭐가 돼. 나만 따뜻하면 넌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야?”

“어.”

“하, 진짜 뭐라는 거야.”

자전거를 출발하기 전 백인서는 이설의 두 손을 잡아다 제 허리에 두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지퍼를 채우지 않은 패딩점퍼 안으로 단단히 욱여넣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은 모두 찬데 유독 손만은 따뜻했다. 패딩점퍼 등에 기대고 있는 오른쪽 볼과 함께.

이설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외관을 알록달록 치장하고 있는 팬시점 앞을 지날 때였다.

“잠깐만 자전거 좀 세워 봐.”

“왜?”

“살 게 있어서 그래.”

백인서는 더 묻지 않고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이설은 서둘러 자전거에서 내린 뒤 매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안 와?”

“나도?”

백인서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거 살 건데 너도 와야지.”

“갑자기?”

백인서는 영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매장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설은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곧장 걸음이 향한 곳은 방한용품이 줄지어 있는 매대 앞이었다.

“골라 봐.”

“뭘?”

“안 보여? 장갑이잖아.”

“그건 나도 알지만.”

이게 무슨 생뚱맞은 경우인가 싶은지 백인서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너 손 얼었잖아. 지금도 빨개.”

“그래서 사주겠다고?”

“응.”

“진심이야?”

“이런 거로 농담 안 해.”

아침에도 생각했었다. 백인서는 왜 장갑을 끼지 않는지에 대해.

“음…… 이건 어때?”

이설은 여러 가지 디자인 중에서 까만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섞인 니트 장갑을 집었다.

“괜찮네.”

백인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껴볼래?”

“굳이?”

“맞아야 사지.”

장갑을 건네주자 백인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이설의 재촉 어린 눈빛을 받고서야 장갑을 껴본다. 턱도 없이 작았다. 이설은 직원에게 더 큰 사이즈가 있나 물어봤다. 여기 있는 게 전부라는 실망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그럼 이거로 한번 껴 봐.”

이설은 진열된 장갑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를 집어 들었다. 디자인이고 색감이고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인서는 키만 큰 게 아니라 손도 무지막지하게 컸으니까.

내 두 배는 되려나? 설마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겠지.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사이 백인서가 장갑을 껴보고 있다. 어설프게나마 맞았다. 다행이었다.

“일단은 이거로 하자.”

이설은 한숨과 안도감이 반반 섞인 눈빛으로 백인서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받아도 돼?”

백인서는 꽤나 불편한 얼굴이었다. 겨우 만 원도 안 하는 장갑을 받아들고서.

“나도 너한테 뭐 사줘야 되는 거 아냐?”

“됐거든?”

“가만있어 봐.”

말릴 틈도 없이 백인서가 목도리 매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설의 손을 덥석 잡고.

“너도 하나 골라 봐.”

“됐다니까?”

“그럼 나도 이거 안 낄래.”

백인서가 장갑을 도로 벗으려 했다.

“알았어, 고르면 되잖아.”

결국 떠밀리듯 목도리 하나를 얻어 가지고 나오면서 이설은 생각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가?

“아직 하나 더 남은 거 알지?”

뜻 모를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 더 남았다는 거야?”

“파스타.”

“파스타?”

“너한테 얻어먹었잖아. 교차로 맞은편 가게에서. 기억 안 나?”

“설마 추석 때 얘기하는 거야?”

이설은 걸음을 멈추고 백인서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비록 그것이 백인서와 자신이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은 경험이었지만.

“난 또 뭐라고. 신경 안 써도 돼. 난 다 잊었어.”

“내가 또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역시나.”

이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풋, 하고 웃었다.

“뭐야 그 웃음은?”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거든. 백인서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일 거라고.”

“성격 파악 끝났으면 오늘 당장 어때?”

“뭘?”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내가 저녁 사준다고.”

“……어.”

이설은 입술을 벙긋거렸다가 얼른 닫았다. 저도 모르게 그러라고 할 뻔했다. 저녁을 사주겠다고 말하는 백인서의 눈빛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해서, 그리고 자신을 드잡이하듯 몰아붙일 게 분명한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들어가는 게 너무 끔찍해서.

“미안한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이설은 목도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황이 끔찍하다고 집에 안 갈 수는 없었다. 피한다고 피해질 문제였으면 언제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잘 안다. 미루는 내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해야 할 테고, 서너 번의 기억을 더듬어봤을 때 그건 결코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감당하는 게 더 나았다.

“집에 일찍 가야 돼?”

백인서가 금방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같이 먹자. 내가 쏠게.”

“다음에.”

“집에 일찍 안 가도 된다며.”

“아무래도 엄마가 기다리실 것 같아서.”

“…….”

“……왜?”

표정을 감추려고 했는데 잘 안됐던 모양이다. 어쩌면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을지도.

“혹시…….”

백인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설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백인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어쨌거나 그는 아빠에게 얻어맞아 벌겋게 부어올랐던 이설의 뺨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가자.”

무슨 말인가를 할 것 같았는데 백인서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속도 모르고 난처하게 고집을 부릴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눈치껏 순순히 물러났다. 이설은 왠지 그게 미안해서 재빨리 덧붙였다.

“나중에 서로 시간 있을 때 같이 밥 먹자.”

“그럴까?”

“……응.”

“…….”

자전거가 다시 도로를 달렸다.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설은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한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저녁 어스름을 잔뜩 묻히고 있는 건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명을 밝혀대고 있었다. 예뻤다.

“아빤 항상 바쁘셔? 추석 때도 집에 안 계셨다며.”

이설이 기억하기로 백인서의 아빤 집에 있는 날보다 밖에 있는 날이 더 많은 분이었다. 만날 때마다 매번 집에 안 계시다는 걸 보면.

“강력팀 형사들이 원래 그래. 사건 하나 터지면 3박 4일 집에 안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야. 심할 땐 열흘씩 안 들어오기도 해.”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있으면 안 힘들어?”

사실은 외롭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백인서는 외동인 데다 아주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 얼핏 사고사라고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는 이설도 모른다.

“힘들어도 버텨야지 어쩌겠어. 그게 일상인데.”

백인서는 무덤덤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일쯤은 예사로 여기는 듯했다.

“그게 마음대로 돼?”

“익숙해지지 않음 서로 고생이잖아. 아빠도, 나도. 어쩔 수 없다면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야지.”

“넌 뭐든 긍정적이구나.”

이설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니 참 부러운 성격이었다.

“피차일반이거든.”

“어째서?”

“나도 매일 합숙이다, 시합이다 해서 툭하면 집을 비워야 하는 처지거든. 아빠가 모처럼 집에 계실 땐 내가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누가 누구한테 서운해하면 안 되는 사이야.”

“역지사지라 이거구나?”

“오오, 사자성어 좀 쓴다 이거지?”

“왜 이래, 나 국어…….”

이설은 무심코 1등급이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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