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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9화 (9/130)

9화

“시간 안배 잘해서 풀라고. 특히 국어하고 수학시험 볼 때.”

“…….”

아빠가 대답이 없는 이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네.”

이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더 꾸물거렸다간 수능시험을 보는 날 볼썽사나운 꼴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하.”

속을 가라앉히는지 아빠가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툭 불거진 울대를 도드라지게 오르내리면서.

“듣기 싫어도 들어. 한 문제 차이로 등급 갈리는 거 잘 알잖아. 까딱하면 최저고 정시고 죄다 물 건너가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 재수하고 싶지 않으면.”

“…….”

안 그래도 부담감으로 짓눌려 있던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아빤 이번에도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노력할게요.”

이설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빠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설은 입을 꾹 다문 채 네모난 공간의 한쪽 벽만을 응시했다. 말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엘리베이터 안은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들리는 거라곤 조그만 흉곽 안에서 부지런히 팔딱대는 심장 소리뿐이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LED 조명은 왜 그렇게 눈부신지.

이설은 머릿속이 터질 듯해서 아랫입술만 연신 짓씹었다. 진공관처럼 고요하지만 동시에 미친 듯 시끄러운 공간 속에 들어앉은 기분이랄까. 그 모순되고 기묘한 느낌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토하기 직전이 돼서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설은 아빠를 앞질러 달리다시피 공동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폐부로 확 들이쳤다.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아빠가 그런 이설을 휙 지나쳐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 자로 잰 듯 몸에 딱 맞는 슈트 차림의 아빤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을 옥죄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이설은 엄마가 준 보온도시락 끈을 한번 꾹 움켜쥔 다음 걸음을 옮겼다.

백인서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마주쳤다. 파스타 전문점이 마주 보이는 교차로 신호등에서였다. 그는 영하의 쌀쌀한 날씨에 장갑도 없이 자전거 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신호등이 빨간불이었기에 아빠의 차도, 백인서의 자전거도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멈춰서 있었지만, 이설은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언젠가 함께 파스타를 먹고 돌아오던 날이 떠올라서였다.

어디에 다녀왔냐는 물음에 친구와 우연히 만나 저녁을 먹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빠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남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대뜸 호구조사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물은 건 이름이었다. 그다음엔 성적이었고, 뒤이어 부모의 직업과 사는 곳에 관한 질문이 이어졌다. 겨우 밥 한번 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백인서는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아빠의 질문 속에 낱낱이 발가벗겨져서는 결국 ‘엄마 없이 운동하는 녀석’ 정도로 치부되어 버렸다. 참으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결론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겨우 백인서 쪽을 돌아보았다.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못 본 척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아빠 말 잘 새겨들었지?”

교문 앞에서 다시 한번 다짐이 주어졌다.

“최소한 9월 모의고사 성적과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나와야 돼. 만약 또 실수해서 10월 모의고사 꼴 났다간 볼장 다 보는 거야. 알아들었어?”

“……네.”

그 말을 끝으로 아빤 몸을 돌렸다. 혹여나 딸이 안쓰러워 뒤를 돌아보는 법은 절대 없다. 이설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앞으로 40분 후면 시험을 치르게 될 학교건물이 괴물처럼 눈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최소한 9월 모의고사 성적과 엇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나와야 된다고? 어떻게?

9월 모의고사는 이설이 지금껏 본 모의고사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험이었다. 수학과 과학탐구 영역에서 각각 하나씩밖에 안 틀렸으니까. 그에 반해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졌던 10월 모의고사에선 무려 7개나 틀려버렸다. 국어에서 2개, 수학에서 2개, 나머지는 영어와 과학탐구 2개 영역에서 각각 하나씩이었다. 최악의 결과였다.

아빤 시간 안배를 잘못해서 생긴 실수라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그게 그녀의 진짜 실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난이도가 쉬운 시험에서 잘하는 건 정말 잘하는 게 아니니까.

백인서는 입실시간이 임박해서야 고사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설은 놀라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녀와 친한 친구들이 대부분 다른 교실이나 학교로 배정받았기에 백인서와 같은 공간에서 시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옆으로 지나가는 그에게서 한껏 다가온 겨울 냄새가 진하게 났다. 얼핏 바라본 손가락들이 추위 때문에 빨갛게 얼어 있었다. 나름 입시 한파인 데다 이른 시간이라 기온이 뚝 떨어져서 춥기는 추운 모양이었다. 하긴, 그 먼 거리를 장갑도 없이 내내 자전거로 달려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뒤를 돌아보자 왼쪽 대각선 끝으로 자리를 잡는 백인서가 보였다. 위가 뒤틀릴 정도로 바짝 긴장한 그녀와 달리 그는 별로 긴장한 기색도 없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시험 잘 보라고. 말끝으로 잘생긴 눈꼬리가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느긋한 것을 넘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하, 어쩜 저래?

이설은 백인서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백인서의 대학 합격은 어차피 기정사실이었으므로.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을 동시에 석권한 데다 교과성적까지 우수한 선수를 불합격시킬 대학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그러기는커녕 어서 오라고 모셔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거다. 실제로도 많은 대학에서 치열한 영입시도를 했었던 거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 한체대가 백인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백인서가 그 많은 체대 중에서 한체대를 선택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지원한 대학 여섯 개 중 제발 아무거라도 좋으니 하나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하고도 비루한 심정이었다. 이설은 자못 씁쓸한 현실을 자각하며 몸을 똑바로 했다.

근데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신경 쓰이게.

고개를 돌린 이후로 내내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인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걸.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지라 모르는 척하면 그만인데 오늘따라 유독 신경이 곤두섰다.

그나저나 손이 그게 뭐야. 날도 추운데 장갑이나 끼던지. 완전 새빨개서는.

8시 40분이 되자 시험감독관이 문제지를 넘겨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설은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두어 번 문지른 다음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빽빽한 글자들이 떼로 덤비듯 한꺼번에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제발, 제발, 9월만 같아라, 9월만.

이설은 주문을 외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험을 보기 전엔 난이도가 적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문제지를 펴자 소용없었다. 무조건 고득점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친 듯 뛰어대는 심장을 간신히 다독이며 1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겁먹지 마. 국어라면 자신 있잖아, 안 그래?

이설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3년 내내 1등급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과목이 국어였다. 심지어 배탈이 나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며 치렀던 4월 모의고사에서도 98점을 맞지 않았는가. 그러니 국어 걱정은 세상 쓸데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첫 시험부터 악몽이었다. 역대급 난이도였다. 화법과 작문 영역의 선지 길이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으며, 내용은 거의 비문학 수준이었다. 6월과 9월 모의고사는 물론이고, 나름 어려웠다는 10월 모의고사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15분이 지나도 화법과 작문을 끝낼 수가 없었다.

이설은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로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이었는데 풀면 풀수록 지옥이 돼가고 있었다. 슬쩍 눈을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8시 58분이었다. 등허리로 서늘한 기운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런 속도면 시간 안배는 고사하고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됐었나?

이설은 무의식적으로 입술 거스러미를 손가락으로 잡아 뜯었다.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한번 심장이 제 속도를 벗어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능시험을 망치는 것보다 아빠와 대면할 생각에 더 소름이 끼쳤다.

입술을 더듬어대던 손가락이 또다시 거스러미를 잡아 뜯었다. 무의식적으로 쭉 잡아 내리는데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나더니 따끔한 통증이 불같이 일었다. 손가락 끝으로 새빨간 피가 점점이 묻어났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 올렸다. 비릿한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나한테 끝까지 왜 이래?

수능이고 뭐고 그대로 시험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1교시가 끝난 교실과 복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불만에 찬 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우는 학생에, 짐을 싸서 나가는 학생들도 간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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