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라며. 같이 가.”
이설은 새침하게 대꾸했다. 역시나 백인서는 빈말로나마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초대해줘서 감사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생각 같아서는 운동화 발로 껑충한 무릎을 되게 차주고 싶었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백인서가 따라붙었다. 팔꿈치가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미소가 배어 있는 익숙하고 서늘한 눈이 새까만 동공 속으로 곧장 들어와서 콕 박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장이 툭 떨어졌다. 얼른 시선을 돌렸다.
덩치는 커다래가지고 저런 표정으로, 더구나 명절 당일에 아빠도 없이 혼자 있는 반찬 대충 꺼내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이설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제가 들어봐도 말이 안 되는 핑계를 이리저리 주워섬기며.
* * *
“운동하는 건 안 힘들어?”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백인서에게 물었다.
“별로 힘든 건 없습니다.”
“적성에 맞나보다. 대학은 정했고?”
“한국체대 가려고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이라곤 일체 찾아볼 수 없다.
“원래부터 장래희망이 운동선수였어? 이설이 말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했다던데.”
“그건 아니지만, 태권도에 흥미가 생겨 열심히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선수로 진로가 정해졌습니다.”
백인서의 대답은 간결했다. 꼭 평소의 자기 성격다웠다.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딱하고 마는 담백한 성격. 물론 이 파스타 전문점에 따라오려고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던 순간만은 예외였지만.
“내년엔 올림픽에도 나간다지? 뉴스에서 봤어.”
“희망 사항입니다. 꼭 나간다는 보장은 없어요.”
“어째서?”
“부상도 없어야 하고, 무엇보다 최상위 성적을 유지해야만 출전이 가능하니까요.”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도 그런 걱정을 하는구나. 당연히 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엄마가 몰랐던 사실을 알아낸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도 전부 그래요. 말 그대로 올림픽이잖아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로 삼고 있는 대회이니만큼 방심하는 순간 바로 탈락이에요.”
“부담이 크겠구나.”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최대한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는 백인서의 눈동자가 시종일관 맑게 반짝였다. 이설은 저도 모르게 그런 백인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꿈이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구나 싶었다. 저렇게 진심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다니.
처음으로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인서의 면면이. 윤송아가 매일 옆에서 이야기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했는데.
엄마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백인서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시종일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빠 역시 맞은편에 앉은 백인서를 무슨 연예인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라도 안 그렇겠는가. 백인서라면 무의식적으로 뾰족하게 반응하던 자신마저 고개를 끄덕이게 생겼는데.
“그래도 지난번 세계선수권대회 때는 정말 대단하더라. 아마 처음이지?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가 나온 건?”
“글쎄요, 전 잘 몰라서.”
“한동안 엄청 화제였는데 몰랐구나. 어쩜 그렇게 잘하냐고 다들 칭찬이 자자했었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뭘.”
이어지는 엄마의 칭찬에 백인서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목 언저리를 문질렀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금메달을 휩쓸면서도 면전에서 듣는 칭찬엔 아직 면역이 안 되어 있나 보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이설은 입꼬리가 둥그렇게 말려 올라갔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엄마와 오빠 앞엔 똑같이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로제 파스타가, 이설과 백인서의 몫으로는 각각 크림 파스타와 토마토 파스타가 놓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이블 중앙엔 다 같이 먹을 피자가 넉넉하게 한 판 자리를 차지했다.
엄마는 늘 그렇듯 음식을 먹기 전에 오빠부터 세심하게 챙겼다. 무릎에 냅킨을 펼쳐주고 손에는 포크를 얌전히 쥐여주었다.
백인서가 동작을 멈추고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섣부른 질문 따윈 없다. 그저 눈꼬리만 보일 듯 말듯 부드럽게 휘어졌을 뿐. 이설은 내심 그게 고마웠다. 백인서가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봐주지 않아서. 오빠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준답시고 이것저것 무례한 질문들을 퍼부어 주지 않아서.
“맛은 괜찮니?”
파스타가 어느 정도 줄어들자 엄마가 물었다. 이설과 나란히 앉아 있는 백인서에게.
“맛있어요.”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인서의 파스타는 이설의 파스타보다 배는 푹 줄어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파스타라고 큰소리치더니 마냥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이설이는 왜 그것밖에 안 먹니? 맛이 없어?”
엄마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이설의 파스타를 내려다보았다.
“어, 그게…… 별로 생각이 없어서.”
이설은 대충 얼버무렸다. 엄마에게 파스타 전문점에 오자고 할 때만 해도 그릇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잘 먹을 자신이 있었다. 근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각처럼 잘 넘어가지 않았다. 옆에 떡하니 앉아 있는 백인서 때문인지도 모른다. 괜스레 심장이 쿵쿵대는 걸 보니.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백인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오래 시선이 머무는 정도였지. 생각해놓고 보니 더 이상했다.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거 시켜줄까?”
엄마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니야, 됐어. 피자도 있는데 더 시키면 배불러서 못 먹어.”
이설은 얼른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너무 오래 돌렸나. 한입에 넣기엔 컸다. 잠시 머뭇거리다 예쁘게 말린 파스타를 도르륵 다시 풀었다. 그렇게 몇 번을 돌돌 말았다 풀었다 했더니 백인서가 어깨를 숙이며 넌지시 묻는다.
“먹기 싫음 내가 먹어줄까?”
“어?”
“내가 먹어준다고.”
“왜?”
“말했잖아. 나 파스타 좋아한다고.”
“…….”
“진짜야. 없어서 못 먹어.”
“……그럼 먹어주든지.”
이설은 제 앞에 놓인 파스타 그릇을 백인서의 앞으로 가만히 밀어주었다. 두어 번 먹다가 만 파스타가 이내 백인서의 입으로 쑥쑥 들어갔다. 그릇이 비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백인서는 정말 파스타를 잘 먹었다. 그것도 입가에 소스 하나 묻히지 않고 깔끔하고 우아하게.
“계산은 내가 할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인서가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네가 왜?”
이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백인서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제일 많이 먹었잖아.”
“생각은 고마운데, 내가 사기로 하고 나온 거야. 넌 우리 손님이고.”
이설은 고집스럽게 백인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내가 내야 할 것 같은데.”
“많이 먹은 거로 치자면, 넌 한 명이고 우린 세 사람이나 되거든? 아무리 네가 많이 먹었어도 우리보다 많이 먹었을까.”
“항상 그렇게 정확하냐?”
“응, 그러니까 어서 계산서나 줘.”
“…….”
“왜 그렇게 봐?”
이설은 백인서가 너무 빤히 내려다보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좋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백인서가 무슨 꿍꿍이인지 흔쾌히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다음번엔 내가 사는 거다, 알았지?”
“어?”
“너 계산 정확하잖아. 나도 마찬가지거든. 한 번 얻어먹었으면 반드시 한 번은 사야 된다고.”
“……뭐, 그러든지.”
“약속한 거다?”
이상한 방식으로 대화가 끝나버렸다. 이설은 드러내놓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백인서를 흘끗 쳐다본 다음 식당 직원에게 빳빳한 신사임당 2장과 계산서를 내밀었다.
* * *
잠을 설쳤다. 요 며칠 계속 그랬다. 이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부터 열었다. 냉기를 잔뜩 품은 바람이 얼굴 위로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일기예보에서 올해 들어 가장 추울 거라더니 오보는 아닌 듯했다. 기습한파였다.
하지만 뭐, 나름 참을 만하네.
이설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중얼거렸다. 얇은 잠옷을 뚫고 영하의 찬바람이 스며들었으나 예상한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 추위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이설은 도로 창문을 닫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추울 거라더니 가히 그렇지도 않을 모양이니까. 영하 2도면 손이 곱을 정도로 춥긴 하지만 얼어 죽을 정도로 춥지는 않기에 딱 적당한 정도의 날씨였다. 이번 수능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무 어렵지도, 쉽지도 않아서 무난하게 풀 수 있는 문제들만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긴장하지 말고.”
엄마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속 부대끼지 말라고 너 좋아하는 전복죽 끓여서 넣었어.”
“고마워, 엄마.”
이설은 애틋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와 잠시 눈을 맞추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빠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시험은 그녀가 보는데 정작 본인이 수험생인 것처럼 한껏 경직된 얼굴로.
“어서 가자.”
재촉하는 목소리 역시 경직되어 있긴 마찬가지다. 부담감이 확 밀려들었다. 이럴까 봐 혼자 간다고 했던 건데 아빤 기어이 자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정색을 했다. 그게 수험생 가진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가 원한다고.
“10월 모의고사 때처럼 실수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자 아빠가 내뱉은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