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유주는 최종내신이 얼만데.”
“1.0.”
망설임도 없이 단순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 딸이지만 참 대단해. 3년 내내 올 1등급이야.”
“……대단하긴 하네.”
“운도 좋았던 거지 뭐. 이런 말 하면 유주가 화내려나?”
“…….”
작은아빠는 눈꼬리까지 휘어가며 웃었고 맞은편에 앉은 아빠는 입술을 한일자로 다문 채 보이지 않게 미간을 구겼다.
이설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그저 생각했다. 앞으로 명절 연휴 이틀간 몸을 최대한 사려야겠다고. 신경이 예민해진 아빠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는 수도 없이 경험했으므로.
하, 끔찍해.
이설은 목덜미 위로 오소소 돋는 소름을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 * *
할아버지 댁을 나온 건 명절 다음날, 점심을 먹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작은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명절 당일 아침 차례를 지내기 무섭게 작은엄마를 데리고 자리를 뜬 뒤였다. 처가에 다녀와야 한다는 말을 훈장처럼 남기고서.
어릴 땐 그게 못내 얄미웠다. 마귀할멈 같은 할머니와 성격 괴팍한 할아버지에게 불쌍한 엄마만 혼자 떠넘기고 가는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아주 현명한 행동이라는 걸 안다. 가끔은 작은엄마가 부럽기까지 했다. 끔찍하게 챙겨주는 남편과 시가에서도 전혀 꿀릴 게 없는 돈 많은 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반해 아빤 어떻게든 본가에 눌러앉아 있으려고 했다. 엄마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려보겠다는 세심함 따윈 아빠에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큰아들 된 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걸지도.
「넌 어차피 갈 친정도 없잖니?」
서둘러 떠나는 시동생 내외를 엄마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같잖지도 않다는 얼굴로 툭 내뱉곤 했다. 그럼 엄만 더 이상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점심준비를 하고 간간이 찾아오는 할아버지 손님들에게 다과를 내고, 그렇게 하면서 귀한 명절 연휴를 흘려보냈다.
“엄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모처럼 찾아온 평화였다. 할아버지 댁을 벗어난 데다, 아빤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나간다며 자리를 비운 저녁이었다.
“명절 끝에 외식은 무슨.”
“뭐 어때. 내 친구들 보니까 다들 외식하러 나가더라. 명절 음식 물린다고.”
이설은 엄마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엄마 파스타 좋아하잖아. 먹으러 가자, 응? 돈은 내가 낼게.”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나 돈 많아. 작은아빠한테 용돈 받았다고.”
이설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엄마 앞에서 흔들었다.
“무려 신사임당 열 장.”
“그렇게나 많이?”
“원래 작은아빠가 통이 크잖아.”
“그래도 우린 유주 용돈도 못 줬는데.”
“그건 유주가 안 와서 그런 거고.”
“아무튼.”
엄마는 못내 미안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오빠를 공략해야 하지 싶었다. 이설은 얼른 형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빤 어때? 오빠도 파스타 먹고 싶지?”
“……어?”
“지난번에 갔을 때 좋아했잖아. 교차로 맞은편에 있는 맛집. 기억 안 나?”
“기억…… 나.”
“그거 또 안 먹고 싶어?”
이설의 물음에 형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엄마. 오빠도 먹고 싶다잖아. 그러니까 얼른 가자.”
이설은 형설의 핑계까지 대며 엄마의 팔을 잡고 졸랐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엄마가 모처럼 웃었다. 말로는 왜 이러냐면서도 눈빛을 보니 딱히 싫은 기색은 없다. 이설은 내친김에 한 번 더 졸랐다.
“가는 거지, 응?”
“그래, 우리 예쁜 이설이랑 형설이가 먹고 싶다는데 어딜 못 가겠어.”
엄마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대신 예쁘게 입고 가자, 엄마.”
“새삼?”
“추석 연휴 내내 주방에 있느라 기름 냄새 뱄잖아. 간만에 외식 하러 가는데 기분 좀 내야지.”
사실은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을 말끔히 없애주고 싶었다. 면박에, 냉대에, 사람을 아주 하찮게 보듯 하던 그 모든 돼먹지 못한 기억들로부터 엄마를 완전히 꺼내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설은 부산스럽게 옷장을 열어 가지런히 걸린 옷들을 살펴보면서 짧게나마 기도했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한들 과연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엄만 이설의 요구를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녀가 골라준 옷을 아무 소리 없이 입어주었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엄마, 고마워.”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뭐가?”
겨우 파스타 먹으러 가면서 무슨 요란이냐 핀잔주지 않아서. 그리고 우리 엄마여서.
“아무것도 아냐.”
이설은 방그레 웃으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너 가끔 무지 싱거운 거 알지?”
“그래서 싫어?”
“아니. 너무 좋아.”
엄마가 곧바로 대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로. 오빠가 그런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만 형설이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의 대답에 오빠가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저렇게 순하고 착한데 오빤 가끔씩 다른 사람처럼 돌변할 때가 있다. 물론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을 제외하면 극히 드문 일이긴 하다. 일 년에 한두 번, 좀 더 많으면 서너 번 정도니까. 문제는 그 정도가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메가톤급이어서 그렇지.
이설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오빠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어주었다. 돌아오는 미소 역시 환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때라곤 전혀 묻어 있지 않은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해져 버렸다.
백인서는 그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거리를 걷고 있던 와중에 만났다. 파스타 전문점이 곧장 마주 보이는 교차로 신호등 근처에서였다.
“어디 가?”
그냥 무시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백인서는 기어코 다가와서 아는 체를 했다. 그러더니 바로 옆에 서 있는 엄마와 오빠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널찍한 어깨를 깍듯이 숙이고 절도 있게. 가만 보면 예의가 발라도 너무 발랐다. 언제 어느 때건 대충 날림으로 인사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엄만 백인서를 굉장히 좋아했다. 애가 나이답지 않게 너무 점잖고 바르다면서. 노림수인가?
더욱 이상한 건, 백인서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엄마 혼자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빠 역시 백인서만 보면 얼굴이 환해졌다. 친하든 친하지 않든, 사람들과 어지간해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오빠로선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 아냐? 오죽하면 이설은 그런 생각까지 했다.
“인서구나. 명절은 잘 지냈니?”
엄마의 물음에 백인서는 평소답지 않게 쑥스러워했다.
“본가가 춘천이라서 거기 다녀왔어요.”
“그랬구나. 저녁은 먹었니?”
“아직이요. 근데 어디 외출하세요?”
“응, 간만에 파스타 먹으러 가는 길이야. 우리 이설이가 명절 음식은 좀 물린다고 해서.”
“아아, 파스타요?”
백인서가 눈동자를 빛내며 되물었다. 뭔가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인서 너도 파스타 좋아하니?”
“저야 없어서 못 먹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파스타예요.”
“그래? 그럼 별일 없으면 우리랑…….”
“엄마.”
이설은 슬그머니 엄마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혹시라도 백인서에게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이 나올까 미리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그제야 엄마가 말을 돌린다.
“이런, 내 생각만 해버렸네. 명절이니까 집에 아빠 계시겠구나.”
“아니요, 아빠 집에 안 계세요. 저 혼자뿐입니다.”
백인서가 엄마를 내려다보며 ‘혼자’라는 말에 유독 방점을 찍었다. 이설은 속으로 입을 딱 벌렸다. 누가 봐도 ‘저랑 같이 가요’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 기가 막혀. 언제 저렇게 뻔뻔한 스타일이 되었지?
이설은 엄마 몰래 백인서에게 눈치를 주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그러나 백인서는 못 본 척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순진한 엄만 백인서를 두고 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빠는 어디 가셨는데?”
“긴급출동 나가셨어요.”
백인서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아, 맞다. 도암경찰서에 근무하신다고 했지.”
“네.”
“명절에도 일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그럼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네?”
“그래야죠.”
“추석인데 아빠랑 같이 있지도 못하고 어쩌니?”
엄마가 안쓰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괜찮아요.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닌데요, 뭘. 익숙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집에 먹을 건 있고?”
“냉장고에 밑반찬 서너 가지 있어요. 명절이라 할머니한테 얻어온 음식도 잔뜩 있고요. 대충 꺼내서 차려 먹으면 돼요.”
백인서는 참 천연덕스러웠다. 코앞의 어른을 이런저런 말로 잔뜩 걱정하게 만들어놓고는 입으로만 괜찮단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엄마가 말꼬리를 흐리며 이설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데려가면 안 되겠냐는 눈빛이다. 이설에겐 거대 포식동물처럼 느껴지는 백인서가 엄마의 눈엔 보살펴줄 사람 하나 없는 조그맣고 가여운 강아지처럼만 보이나 보다.
엄마도 참. 바로 이런 반응을 노리고 불쌍한 척하는 건데 그걸 또 넘어가주시네.
“오빤 괜찮아?”
이설은 멀뚱히 서 있는 오빠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난 좋아.”
미적거릴 줄 알았는데 단번에 승낙이 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 사람에게 모종의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다.
“……알았어. 같이 가.”
이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설이도 괜찮다는데 그럴래?”
엄마가 백인서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같이 가도 돼?”
분명 난처해하는 이설의 반응을 눈치챘으면서 백인서가 태연하게 물었다. 눈가로는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기를 한가득 머금고서. 저럴 거면 애초에 물어보지나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