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되어 줄게, 기꺼이-4화 (4/130)

4화

* * *

아파트에 도착한 건 아홉 시가 거의 다 돼서였다.

“들어가.”

공동현관 앞에서 백인서가 고갯짓을 했다.

“오늘 고마웠어. 덕분에 맘 편히 호수 구경도 하고.”

“좋았다니 다행이다. 나만 좋으면 안 되잖아.”

백인서가 빙그레 웃었다. 저녁 내내 그녀를 뒤에 태우고 다녔던 자전거를 옆에 얌전히 세워둔 채.

“또 가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태워줄 테니까.”

“그런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

“난 괜찮은데. 정말이야.”

농담을 진담처럼 받아치며 백인서가 빤히 쳐다보았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이설은 얼른 덧붙였다.

“기말고사 끝났잖아.”

“최저 맞춰야 하거든. 여차하면 정시도 써야 할 것 같고.”

“아아, 의대는 최저가 세지?”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

“다들 얘기하니까. 누가 어디를 쓴다더라. 누구는 어디를 지원한다더라.”

“그럼 내 성적도 알겠네?”

“우리 같은 학교잖아. 모르면 더 이상한 거 아냐? 너도 내 성적 알고 있잖아.”

“……어, 그렇긴 하지.”

이설은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그녀와 엇비슷한 성적의 아이들은 모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자신만 수시 6개에서 다 떨어지는 상상을 해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그리고 사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상상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렇게 옆 뒤 안 보고 열심히 했어도 전교 1등은커녕 올 1등급 역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일상처럼 쏟아지는 아빠의 비난이 때맞춰 머릿속에서 윙윙 울려댔다.

「내가 너한테 전교 1등 하라고 했어? 13등 안에만 들라는 거 아냐. 그걸 못해서 매번 2라는 숫자를 받아와? 더구나 주요과목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더니 등허리로 서늘한 감각이 치달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건 금방이었다. 토할 것 같았다.

“……정이설?”

백인서가 한 걸음 다가왔다.

“왜?”

“아니 난, 네가 울고 있어서.”

“……뭐?”

이설은 손을 들어 눈가를 만졌다. 축축했다. 언제 울어버린 거지? 미친 거 아냐? 이설은 서둘러 눈 주위를 문질렀다. 백인서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사람 우는 거 처음 보니?”

무안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말이 뾰족하게 나왔다. 그런데.

“어, 처음이야. 여자가 내 앞에서 우는 건.”

백인서가 웃음기 하나 없이 대답했다. 말문이 막혔다. 언제부터인가 백인서는 잊을 만하면 쓸데없이 진지해졌다. 사람 불편하게.

“알았으니까 넌 그만 가. 나도 들어갈 테니까.”

인사도 생략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팔이 붙잡혔다. 고개를 들자 동그랗게 뜬 노란 가로등을 널찍한 어깨 뒤로 전부 가린 채 백인서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서늘한 눈을 하고.

“너.”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그 자전거에 타버렸을까. 그냥 평소처럼 동네 몇 바퀴 돌다 집으로 들어갔으면 되는 건데.

“신경 안 써도 돼. 나 원래 이유 없이 잘 울어. 오늘도 그래서 그래. 단점이라면 단점이야.”

“…….”

“왜 그렇게 보는 거야? 거짓말 같아서?”

이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백인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제발 동공이 흔들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거.”

백인서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이설의 왼쪽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렇게나 간절히 바랐는데 동공이 흔들려버렸다. 바보처럼.

“방금 네 반응과 관계있는 거니?”

“상관 마.”

이설은 백인서의 손을 탁 쳐 냈다. 주변의 사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자신만을 담고 있는 시선이 못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백인서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게 된 건. 어쩌면…….

“괜한 걱정 안 해도 돼. 월요일이면 감쪽같이 없어지거든.”

“한두 번이 아니구나.”

“…….”

“아빠니?”

비밀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단단히 싸매놓은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다. 의도치 않은 순간, 의도치 않은 사람에게. 바로 지금처럼.

“알았으면 그만 들어가도 되지?”

어차피 부인해봐야 믿어줄 얼굴도 아니었다. 백인서는 대답은커녕 미동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서늘한 얼굴을 하고서.

그대로 몸을 돌렸다. 뛰듯이 계단을 올라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이 마구 떨렸다. 스르르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까지 단숨에 뛰어왔다. 버튼을 누르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백인서는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눈동자만 그녀에게 고정한 채로.

제발 빨리 내려와라. 이설은 조바심을 내며 서서히 바뀌는 계기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뒤통수가 여전히 따끔거렸지만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사람은 엄마였다. 푹 꺼진 눈 밑과 창백한 안색을 보니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었을지 안 봐도 훤했다.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빠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사실은 괜한 심리적 화풀이를 엄마에게 해버렸다.

소리에 유독 민감해서 장마철이면 밤에 잠도 잘 못 자는 오빤 집안에서 큰소리라도 나면 극도로 불안해하며 심한 경우 자해를 하거나 발작까지 일으켰다. 특히 아빠의 폭주를 제일 무서워했다. 그렇게 되면 집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엄마가 무엇보다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오빤?”

이설은 엄마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물었다. 심장이 자꾸만 덜그럭거려 미칠 것 같았다.

“방에 있지 뭐. 저녁은?”

“됐어.”

“아까 밥도 안 먹고 나갔잖아.”

생각 없다는데 엄만 자꾸만 식사 이야기를 했다. 마치 그게 자식 가진 부모의 성스러운 본분인 것처럼.

“배 안 고프다고.”

“그래도 좀 먹지? 너 좋아하는 참치찌개 끓여놨는데.”

“나중에 먹을게. 지금은 도저히 못 먹겠어.”

이설은 엄마를 지나쳐 제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하, 이 와중에 밥이라니. 그게 넘어가면 정말 대단한 비위의 소유자인 거다. 토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방 안 공기가 답답했다. 이설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둠 속으로 더운 공기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비가 오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래서 여름이 싫다. 특히 우중충한 여름은 더더욱. 원래도 좋아하는 계절은 아니었는데 오늘처럼 덥고 습하고 칙칙한 날엔 유독 더 그랬다.

언젠가 우기인 줄도 모르고 온 가족이 함께 놀러 갔던 동남아 날씨가 떠오른다. 열대성 폭우에 태풍까지 겹쳐 연일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관광은커녕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빤 호텔 방에 들어앉아 전매특허 같은 싸한 얼굴을 하고 엄마를 닦달했었다. 태풍이 오는 줄도 모르고 여행 가자 했냐고. 제대로 하는 게 도대체 한 가지나 있냐고.

그렇게 닦달해대는 남편 앞에서 그녀의 엄만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입술만 소심하게 달싹이면서. 그렇게 잘하면 본인이 직접 알아볼 것이지 애꿎은 엄마 탓은 왜 하는지.

아빤 무슨 일이든 본인이 계획한 것에서 조금이라도 틀어지거나 어긋나면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게 업무에 관한 것이든, 오랜만에 떠난 가족여행이든 상관없었다. 이설은 강박증을 드러내며 완전히 평정심을 잃어버린 아빠의 행동에 반발심이 솟아올랐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꼭지가 돌아버린 아빠가 어떻게 변하는지는 수도 없이 봐왔으니까.

평상시엔 그럴 수 없이 점잖아 보이는 눈을 무섭게 번득이며, 당장이라도 누구 하나 죽여버릴 것 같은 표정을 코앞에서 대하고 보면 누구라도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비단 그녀의 엄마뿐이 아니다. 이설도 그랬고, 그녀보다 두 살 많은 오빠 형설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꼭지가 돌아버린 아빠의 눈빛 앞에서, 숨을 죽인 채 심장을 퍼덕거리며 가빠진 호흡을 가라앉히는 게 고작이었다. 부정적인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는 건 그래서 공포스러운 일이다.

덕분에 모처럼 떠난 가족여행은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현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인천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까지 내내 살얼음판이었다.

그런 것도 가족여행이라고.

책상에 앉았으나 공부가 될 리 없다. 이설은 눈앞에 펼쳐놓은 책을 되는대로 넘겼다. 뒤엉킨 글자들 사이로 백인서의 얼굴만이 도드라졌다. 노란 가로등 불빛을 등 뒤에 감추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서늘한 얼굴이.

「이거, 방금 네 반응과 관계있는 거니?」

백인서는 어떻게 그 짧은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걸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은 건데. 그에게 말했듯, 맞아서 부어오른 볼은 절대 월요일까지 간 적이 없다. 그녀의 아빤 어떤 경우에도 일요일 저녁엔 이설의 얼굴에 손을 대지 않으니까.

생각해보니 정말 소름 끼치도록 계산적이네. 그게 조절이 돼?

이설은 손에 쥐고 있던 필기도구를 책상 한구석으로 휙 집어 던졌다. 투명 재질의 필기도구가 두어 번 팽그르르 돈 다음 멈춰 섰다.

그리고 대체 그 눈빛은 뭔데.

이설은 백인서가 자신을 쳐다보던 순간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봤더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계기는 2년 전뿐이다.

현장학습 겸 신체단련 명목으로 1학년 전체가 다 같이 학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도암산으로 트레킹을 갔을 때였다. 해발 295미터밖에 안 되는 얕은 산이라기에 다들 우습게 봤다. 실제로 정상까지 올라가 봤던 애들도 다수 있었고. 그들이 교과서에서 본 백두산이나 한라산의 해발고도에 비하면 동네 야산 정도에 불과했으니 당연했다. 이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산행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래서였을까. 모두들 신나게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개중에는 뛰어가는 애들도 제법 있었다. 트레킹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코스가 평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경사진 부분이나 계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도암산 자체가 험준한 산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도중에 낙오하는 아이들도 전무했다.

문제는 하산할 때였다. 이설은 마음을 놓고 있다가 정상으로부터 얼마 안 되는 지점에서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선뜻 백인서가 나섰다. 업어주겠다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