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고등학교에 들어와선 더 대박이었다. 2학년 때 처음 참가한 아시안게임에서 가볍게 금메달을 따내더니 올해 열린 세계선수권에서까지 금메달을 떡하니 목에 걸어버렸다. 아파트 단지 주변은 물론이고, 학교 정문에까지 현수막이 거대하게 걸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년에 열릴 올림픽 역시 강력한 금메달 유망주로 꼽힌다니 운동선수로서는 그저 엘리트 꽃길만 걷고 있는 셈이다.
백인서는 그러면서 공부까지 잘했다. 그냥 어쭙잖게 잘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성적표에 1등급이 수두룩했다. 담임선생님도 그러지 않았는가. 운동선수가 이 정도 성적이면 정말 어마어마한 거라고. 교사 생활 15년에 처음 보는 경우라고. 여하튼 그랬다.
“솔직히, 별로 대단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기분은 썩 좋았지만.”
백인서가 쑥스럽게 웃었다.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니었다. 이설이 기억하는 한, 백인서는 쓸데없이 잘난 척하는 부류는 원래부터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왠지 모를 열패감이 더 들었다.
“운동하는 거 좋아해?”
슬쩍 말꼬리를 돌렸다.
“음, 그렇지?”
“힘든 적도 없어?”
“나 로봇 아니거든?”
억울한 표정으로 툭 던지는 말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재미는 있어. 성취감도 정말 크고.”
“좋겠다.”
이설은 손끝으로 잔디 잎을 살며시 쥐었다가 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사뭇 낯설다.
“넌 어떤데?”
이번엔 백인서가 물었다.
“나?”
“공부 재밌냐고. 매번 전교 5등 안에서 놀잖아.”
“글쎄…….”
이설은 무릎에 도로 턱을 괴었다.
“재밌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좀 헷갈려. 예전엔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설은 공부를 좋아했다. 어떤 날은 수학 문제 푸는 게 너무 재밌어서, 또 어떤 날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너무 기뻐 잠자는 시간이 아까운 적도 많았다. 친구들에게 말하면 재수 없다는 면박이 돌아올 테지만, 전부 사실이다.
그랬는데 언제부터 공부가 끔찍한 부담으로 다가왔더라. 어쩌면 마트에서 흔히 보는 투 플러스 한우처럼, 과목마다 등급이 매겨져 나오는 성적표를 받게 된 날부터였을 것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그럼 너는 그 애들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냐.」
불쑥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래야 아빠나 할아버지가 만족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전교 1등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설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데다 노력까지 하는 애들을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자신은 몇 번을 곱씹고 반복해서 들어야 겨우 이해하는 물리2 개념을 단 한 번 듣고도 완벽히 이해하는 괴물들을 대체 어쩌라고. 분야는 다르지만 백인서 역시 그런 괴물들 중 하나라는 사실엔 틀림이 없다.
“이제 그만 가자.”
이설은 엉덩이를 대충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있어 봐야 불필요한 상대적 박탈감만 더 커질 테니까.
“벌써?”
백인서가 두 팔을 뒤로 뻗고 앉은 자세 그대로 올려다보았다.
“그럼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언제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이설은 선 채로 그런 백인서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키가 191센티미터나 되는 녀석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본다는 건. 그리고 그녀는 이 새로운 경험을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백인서가 곧바로 일어나는 바람에 1분은커녕 30초도 이어지지 못했지만.
“아쉽다.”
이설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자전거가 세워진 쪽으로 걸어갔다.
“뭐가?”
백인서가 바짝 따라오며 묻는다.
“그런 거 있어. 넌 몰라도 돼.”
“치사하게, 나도 좀 알자.”
흘끗 쳐다본 백인서는 그림자마저 엄청난 기럭지를 보유하고 있다. 하여간에 덩치만 무지막지하게 큰 녀석.
“알아서 뭐하게?”
“몰라서 답답한 거보단 백번 낫지 뭘.”
“알아봤자 별 영양가 없는 얘기야.”
돌아오는 길은 훨씬 더 선선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후덥지근하니 뭐니 했던 게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젠 잔소리 안 해도 잘 잡네?”
신나게 도로 위를 달리던 백인서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봤다.
“내가 원래 한 번 배운 건 잘 안 까먹거든.”
“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 이거지?”
“알면 됐어.”
자못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백인서가 픽 웃는다.
“힘들면 언제든 내 등에 기대도 돼.”
“아까부터 뭘 자꾸 기대래?”
“그럼 안 돼?”
“좀 웃기잖아. 무슨 로맨스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설의 핀잔에 백인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웃어? 실없어 보이게.”
“기분 좋으니까 그렇지.”
“뭐가, 나랑 자전거 타는 게?”
“어.”
솔직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편안히 뒤에 앉아 있고 너만 죽도록 페달 밟고 있는데도?”
“그게 어때서. 내가 원한 거고, 정이설 넌 귀한 손님이잖아.”
“……그렇게 말한다면야.”
이설은 어쩐지 ‘귀한 손님’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적어도 ‘귀한 손님’에게는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게 비록 그녀의 아빠일지라도.
때맞춰 선선한 바람이 부어오른 볼 위로 달래주듯 살랑살랑 불어왔다. 이설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잠시 그 부드러움을 음미했다. 기온이 제법 내려간 탓에 볼에 닿는 공기의 흐름이 사뭇 시원했다. 어떤 면에선 상냥하다고나 할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안 기댈 거야?”
조용한 속에 백인서의 목소리만 홀로 도드라졌다. 이설은 저를 향해 세로로 길쭉하게 아치를 이루고 있는 백인서의 등을 잠깐 쳐다보았다. 기대라고? 굳이? 하지만 저렇게 넓은데 그녀 하나쯤 기대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잠깐만 기댈게.”
이설은 백인서의 등과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던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였다. 처음엔 어깨가, 그다음엔 오른쪽 볼이 널찍한 등에 닿았다. 자전거를 모느라 쉼 없이 움직인 탓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넓은 등이 얼굴 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허리도 더 단단히 잡고.”
백인서가 허리춤에 머물러 있던 이설의 손을 잡아끌어 제 복부를 감싸 안게 했다. 손바닥 전체로 느껴지는 근육이 무슨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이 자세가 너한테 더 편할 것 같아서.”
밤공기 속으로 백인서의 목소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러든지.”
이설은 제게 기댈 공간을 내어주고 있는 널따란 등에 볼을 댄 채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법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결 사이로 옅은 땀 냄새와 함께 백인서의 체취가 희미하게 섞여들었다. 불쾌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설은 백인서의 등에서 볼을 슬그머니 떼었다.
“왜?”
아주 가볍게 기대고 있다가 그보다 더 살며시 떼었는데도 금방 알아차리고 백인서가 돌아보았다.
“그냥. 이게 더 편해서.”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하자 백인서가 씩 웃었다.
“편한 대로 하든지.”
백인서는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대로 앞만 보고 자전거를 달렸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얇은 교복 상의가,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새하얀 면티가 무심코 내려진 눈동자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서둘러 시선을 끌어올렸다.
속도가 높아지는 자전거 옆으로 야간산책을 나온 부부가 스치듯 지나갔다. 목줄이 야무지게 채워진 닥스훈트 두 마리를 각각 데리고서. 그 앞엔 검은 레깅스에 운동화 차림의 여자가, 또 그 앞으로는 아이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는 할머니가 보였다.
대체 어디서 다들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나오는 거야? 설마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가? 그래?
이설은 낯선 풍경 속에 홀로 들어와 있는 이방인처럼 주변을 살폈다. 한여름 밤의 호수 주변 도로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데다 심지어 느긋하기까지 했다. 고민이나 걱정 따윈 들어설 여지조차 없다는 듯.
이게 무슨 어이없는 경우지? 백인서 때문에 잠시 말랑해졌던 심장 부위가 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생각해?”
열심히 자전거만 몰던 백인서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아무 생각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맥없는 대답이었다.
“그냥 다들 너무 한가해 보여서.”
끝모르게 넓은 등에 대고 덧붙였다.
“네가 속고 있는 거야.”
“뭐?”
“다들 그런 척하는 거라고. 진짜 한가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알아? 저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니면서.”
“꼭 들어가 봐야 아나?”
백인서가 픽 웃었다.
“너하고 나도 저 사람들 눈엔 똑같이 보일걸? 교복 차림으로 평일 저녁 도암호수에서 자전거나 타는 걸 보니 참으로 걱정거리 하나 없는 삶이겠구나 하고.”
“말은 똑바로 하지? 넌 교복 차림이지만 난 생활복 차림이라고.”
“그게 더 포인트야.”
백인서가 뜻 모를 말을 했다.
“어째서?”
“내가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방금 말했잖아.”
“그래서?”
“전혀 다르게 생긴 옷을 입고 있어도 정이설 너하고 나는 결국 같은 고등학교 소속이거든.”
딱히 틀린 부분이 없어 이설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백인서의 말처럼, 교복을 입었든 생활복을 입었든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까.
“저 사람들도 그래. 다 똑같은 인생이야. 겉으론 저렇게 여유로워 보여도 한 꺼풀 벗겨 속을 들여다보면 무지하게 복잡할 수 있거든.”
“너도 그렇다는 얘기야?”
“나라고 별다를 거 있나? 그래서 더 미친 듯이 운동하는 건데.”
“네가 왜? 너야말로 운동선수로선 탄탄대로잖아.”
이설의 물음에 백인서는 더 이상의 부연 설명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좋으니까 괜찮아.”
대화를 나누느라 슬쩍 늦춰졌던 자전거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뭐가 그렇게 좋은데?”
“너랑 자전거 탈 수 있어서.”
“그 얘긴 아까도 했잖아.”
“좋은 건 원래 자꾸 되새김질해주는 거야. 그래야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거든.”
“유치하긴.”
“어, 나 완전 유치해.”
여름밤 속으로 백인서의 웃음소리가 낮게 퍼져나갔다. 뭐야, 실없다 실없다 하니까 정말 실없게. 이설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상한 날이었다. 볼 언저리로 살랑거리며 지나가는 밤바람이 밑도 끝도 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다니. 성적표를 빌미로 아빠에게 뺨을 대차게 얻어맞은 날이었다. 지금껏 그래왔듯 분명 우울의 끝을 달려야 정상인데 뜬금없이 가슴을 두근거리는 게 정상인가? 그것도 백인서가 모는 자전거 뒤에 태평하게 앉아서.
이설은 들쭉날쭉해지려는 호흡을 가만히 추스르며 가슴을 똑바로 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