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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되어 줄게, 기꺼이-1화 (1/130)

1화

Prologue

“이거 먹고 바다 보러 갈래?”

정이설이 문득 물었다.

“바다?”

“응. 보고 싶어.”

“그러지 뭐.”

인서는 별 고민도 없이 대답부터 했다. 오늘은 모처럼 시간이 넉넉했고 그는 정이설과 함께였다. 바다가 아니라 그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정이설만 원한다면.

“여기서 멀 텐데 괜찮겠어?”

“너랑 가는 건데 어딘들 못 가겠냐.”

씩 웃고는 기다렸다. 정이설이 뭐라고 할지를.

“고마워.”

“……고맙다고?”

이건 예상에 없던 반응이었다. 도리어 멋쩍어진 건 인서였다.

“뭐야, 이번엔 핀잔 안 주네?”

“무슨 핀잔?”

“저번엔 뭐라 그랬잖아. 네가 하는 말엔 왜 뭐든 다 좋다고만 하냐면서.”

“그건 매번 나한테 맞춰주니까 미안한 마음에 그랬던 거고.”

정이설이 얼마 남지 않은 쌀국수를 젓가락으로 살살 저었다. 그러더니 가만히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사실은 항상 고마워하고 있었어. 말만 그렇게 한 거야.”

“그런 말 듣자고 꺼낸 얘기 아닌데.”

인서는 어색하게 웃었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영 진지해져 버렸다.

“알아. 그냥 백인서 너한테 한 번쯤은 꼭 말하고 싶었어. 고맙다고.”

“갑자기 왜 그래? 꼭 작별인사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들렸어?”

“어차피 아니니까 상관없어.”

“…….”

“왜?”

“아니야. 어서 먹고 나가자. 바다 보려면 서둘러야지.”

잠깐 멈추었던 정이설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보고 도암시로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집에 잠깐 들어왔다 갈래?”

평소처럼 물었다.

“아니. 오늘은 그냥 갈래.”

“많이 피곤한가 보다?”

“좀 그렇기도 하고.”

그때까진 몰랐다. 정이설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저기…… 인서야.”

“어?”

인서는 다정한 눈길로 이설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망설였어.”

“뭐를?”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리는 정이설의 얼굴 위로 가을밤이 낮게 내려앉았다.

“너랑 나 벌써 스물일곱이잖아. 두 달 있으면 스물여덟이 될 테고.”

“그런데?”

“이제는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가을밤이 온통 내려앉은 정이설은 필요 이상으로 담담해 보였다. 마치 그렇게 보이려고 일부러 작정한 사람처럼.

“무슨 기회?”

인서는 어쩐지 싸한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계속 만나는 건 피차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그것보다는 일찌감치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를 주는 게 서로에게 덜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잠깐만,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기회는 또 뭐고.”

인서는 이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네가 어떤 의도로 이런 얘길 꺼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결혼 같은 거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야. 정이설 네가 원하지 않으면, 계속 이 상태로 만나도 상관없다고. 굳이 강요할 마음 없어.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난 상관있어.”

무 자르듯 단정적으로 흘러나오는 대답에 인서는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사실은, 언제고 정이설에게서 지금과 같은 말이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막상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까 봐 겁이 났으므로.

스무 살에 처음 연애란 걸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식의 복잡한 생각이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달콤하고 또 달콤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스물이 스물하나가 되고 스물하나가 스물둘로 변하던 어느 겨울에 정이설은 말했다. 자신은 진지한 관계는 원하지 않으니, 두 사람 중 하나가 헤어지길 원하면 언제든 그렇게 하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동의한 건 순전히 불안감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이설은 당장이라도 그들의 관계에서 발을 뺄 모양새였으니까.

“7년이면 충분히 오래 만났다고 생각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도 서로에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정이설은 남 얘기하듯 목소리에 고저가 없다. 그렇지만 인서는 멀쩡히 잘 가던 차를 뒤에서 누가 전속력으로 들이받은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이 왕왕 울려 댄다.

이렇게 간단히 이별을 고한다고? 늘 해오던 것처럼 아버지 추모공원에 들르고, 점심으로는 고수를 듬뿍 얹은 쌀국수까지 먹은 다음에 아무렇지 않게?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상태로 계속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좀 지치기도 했고. 그냥 우리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자.”

정이설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표정 변화가 없다. 인서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너 혼자 결정해놓고 이렇게 쉽게 우리 관계를 끝내자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지금 너한테 미안하단 소리나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목적은 이미 달성했어. 근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지.”

인서는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솔직히 너한테도 잘된 일이라고 보는데.”

“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키스하고, 섹스하고. 7년이면 물릴 때도 된 거 아냐?”

“누가 그딴 거만 원한대? 날 대체 뭐로 보고. 내가 짐승 새끼야?”

“…….”

아주 잠깐 정이설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도 같았다. 인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우리 관계를 너무 하찮게만 보고 있다고. 그렇게 쉽게 헤어질 것 같았으면…….”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

정이설이 가만히 눈을 맞춰온다. 자신처럼 그녀도 정신이 없을 줄 알았는데 순전한 착각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연갈색 눈동자에 흔들림이라곤 하나도 없다.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백인서 너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그래서 정말 헤어지자고?”

“…….”

“넌 뭐가 이렇게 쉬운데?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거야? 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아서 말이지.”

“미안해. 그만 갈게.”

“야, 정이설!”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런 표정을 할 때의 정이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본인 혼자만 곱씹고 곱씹은 후에 결정을 내린 얼굴이었다. 그리고 인서는 알고 있다. 정이설은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후엔 절대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그제야 이해가 됐다. 오늘따라 정이설이 왜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는지가. 혼이 쑥 빠져나간 머릿속과 심장이 미친 듯 서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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