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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살고 싶었다. (6) (70/238)


(70) 살고 싶었다. (6)
2023.05.11.


아무도 팻말을 들지 않자, 사회자는 초조해진 듯했다.

“정 마음에 걸리신다면 사들여서 눈알을 파는 방법도 있습니다. 알 만한 분들이니 다 아실 텐데요, 황금색 눈알은 정말 비싼 값에 팔리잖아요.”

사회자의 끔찍한 말에 아리아나는 구역질이 났지만, 사람들은 흥미를 보였다. 사회자의 말대로 황금색 눈알은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자가 철창을 툭 쳤다.

“야, 고개 좀 들어봐.”

사회자의 말에 철창 안의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

선명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본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징그러…….”

“이상해.”

그런 말을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아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소녀를 응시했다. 집요한 시선을 느낀 듯 소녀 또한 아리아나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눈이 마주쳤다.

아리아나는 치마를 움켜잡았다.

‘저 애는…….’

금색 눈동자 안에 아리아나가 있었다.

‘나와 같구나.’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경멸당하고 철저하게 이용당했던 아리아나 브론테.

‘그때의 나와 같구나.’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해 지옥불 위를 꾸역꾸역 걸어야만 했던 아리아나 브론테.

아리아나는 철창 안에 갇힌 소녀가 마치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리아나는 제 문제로도 벅찼기에 소녀를 도울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에게 필요한 건 건장하고 영리한 노예이지, 황금색 눈동자를 가져서 눈에 띄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만 가자.”

소녀가 팔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옛 모습과 같은 아이를 계속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어나는데 소녀가 덜컹 철창을 붙잡았다.

“사여……주세여…….”

소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운…… 나씨…… 보거…… 시퍼여…….”

더듬더듬 이어져가는 말은 발음이 뭉개져서 아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리아나의 귀에는 쐐기처럼 박혔다.

살려주세요. 좋은 날씨를 보고 싶어요.

비틀거리는 아리아나의 팔을 랜스터가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응. 여기서 당장 나가야겠어.”

토할 것 같았다.

쾅-!

“이년이 미쳤나? 가만히 있어!”

사회자의 외침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만 같았다.

소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 음성이 넝쿨처럼 아리아나의 발목에 감겼다.

살려주세요. 좋은 날씨를 보고 싶어요.

아리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랜스터의 손에 의지해서 노예 시장을 빠져나왔다.

+++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에야 아리아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리아나가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는 동안, 랜스터는 묵묵히 곁을 지켰다.

그러게 노예 시장을 왜 갔느냐는 타박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랜스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아이의 처지가 안쓰러우나 공주님께서 마음 쓰실 일은 아닙니다. 본디 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응…….”

“저 아이에 관한 소문은 저도 들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인은 불에 타서 죽었고 두 번째 주인은 낙마했으며, 세 번째 주인은 마차 사고로 가족이 모두 죽었고…….”

“랜스터, 그만해.”

“죄송합니다.”

아리아나는 랜스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았다. 혹시라도 가여운 마음에 저 소녀를 도울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이리라.

아리아나는 소녀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리아나는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었다. 저 아이까지 보살필 수는 없다.

하지만 자꾸만 소녀와 자신이 겹쳐졌다.

도움의 손길 없이 브론테 가문이라는 좁은 새장에 갇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만 했던 아리아나. 그저 살고 싶어서 바둥거리며 초라한 날갯짓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죽고만 아리아나.

“그만, 돌아가자.”

소녀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당겼지만, 아리아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꼿꼿이 서서 거침없이 걸었다.

‘미안해. 하지만 내게도 이 삶이 마지막 기회야. 나는 널 도울 수가 없어.’

+++

무너질 듯 피곤한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소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웅웅 울려서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지난 날 언젠가 황금색 눈동자를 본 기억이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대체 난 언제 그런 눈동자를 본 거지? 왜 그 일만 기억이 이렇게 희미한 거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기억에 남지 않았다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까.

어느새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자는 걸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걷었다.

‘좋은 날씨…….’

새파란 하늘에는 점점이 흰 구름이 떠 있었다. 청명한 하늘빛에 눈이 시렸다.

‘설마 그 안에 갇혀서 한 번도 못 나와본 걸까?’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북제후라면 어떻게 했을까?’

왜 이런 상황에서 북제후가 떠오르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리아나는 생각했다.

‘북제후라면…… 구했겠지. 그자는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지 않으니까.’

다른 문제들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자에게 쓸모가 있을 때의 일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애는 내게 쓸모가 없어. 오랫동안 갇혀서 지냈다면 잘 움직이지도 못할 거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데다가, 읽고 쓰는 건 당연히 못하겠지. 북제후라도 그 애를 구하지는 않았을 거야.’

짐승이 되고 싶었다.

사냥감만을 주시하다가 이빨을 박아 넣는, 감정 없는 짐승으로 살고 싶었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두 번째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가족들은 예상치 못한 애정을 보여줬고, 그 애정은 아리아나의 심장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대는 결코 짐승이 되지 못할 거야.”

언젠가 사이러스는 아리아나에게 짐승이 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아마 다쳤을지도 모를 루이를 찾으러 갈 때였던 것 같다.

사이러스의 말이 옳았다.

‘그래, 나는 짐승이 될 수 없어.’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으려 해도 좋은 사람들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이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냥 그런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다. 처절하게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 해서 타고난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분명 후회할 거야.’

소녀를 모르는 척한다면, 앞으로 평생 그 소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따라다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 애를 구하든, 구하지 않든 후회하겠지. 이왕 후회한다면…….’

한 소녀의 인생이라도 바꿔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애는 이런 날씨를 보고 싶어 했지.’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하게 누리는 청명한 날씨.

‘나도 그랬지. 그저 평범한 아이들처럼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했었어.’

대부분의 아이가 당연하게 누리는 부모님의 애정.

만약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더라면 아리아나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달라졌어.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기에 내가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거겠지. 그렇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게 당연한 거야.’

모두를 구할 수는 없지만, 마음이 가는 한 사람이라도 구해주자. 내가 두 번째 기회를 얻었으니, 나도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자.

아리아나는 결심을 굳혔다.

+++

아직 아버지인 러셀보다는 할머니 캐러딘이 더 편했다. 자연스럽게 노부부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생각을 바꿔, 러셀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 앞을 지키던 랜스터가 근심 가득한 눈으로 아리아나를 지켜봤다. 아리아나가 무엇을 위해 동제후의 방을 찾는지 안다는 듯이.

-“공주님을 모시게 된 것은 제게 과분한 영광입니다.”

지난번 사이러스에게 랜스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일로 랜스터가 자신을 호위하게 된 걸 후회하지 않을지 걱정됐지만,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미움 좀 받으면 어때? 항상 그렇게 살았는걸.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거야. 이번에는 그러기로 했어.’

아리아나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자, 러셀은 무척 놀란 듯했지만, 반갑게 맞이했다.

“일찍 일어났구나.”

“네, 아버지.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뵈었나요?”

“딸이 아빠를 찾아오는 건데 몇 시든 상관없지.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아리아나는 러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표정이 거의 드러내지 않는 러셀은 아리아나의 앞에서만 미소를 지었다. 웃는 방법을 모르는 듯 어색한 미소를 못마땅해서 그런 거라고 오해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 어젯밤에 노예 시장에 다녀왔어요.”

러셀의 표정이 굳었다.

“랜스터와 함께요. 하지만 랜스터는 죄가 없어요. 제가 억지로 졸라서 랜스터도 난처했을 거예요. 그러니 랜스터를 벌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마. 그래서?”

“한 아이를 봤어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어요. 저주로 주인을 여러 번 죽였다는 소문이 있어서 다들 기피하는 듯했어요. 그랬더니 사회자가 금빛 눈알은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하더라고요.”

아리아나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러셀의 표정을 살폈다.

러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아리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애를 돕고 싶구나?”

“네.”

“금빛 눈동자를 가진 노예에 관한 이야기는 나도 한 번 들은 적 있다. 동령의 시골 귀족이 그 아이를 사들였는데, 1년 정도 지나서 강도에게 당해 죽었다는 이야기로 시끄러웠었지.”

동제후도 아는 일을 아리아나는 몰랐다.

아리아나는 지난 생애 내내 금빛 눈동자를 가진 노예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 소녀가 조만간 죽는다는 의미다.

아리아나는 알프레히 자작과 결혼할 때까지 바깥의 소문 같은 건 모르고 지냈었다.

“그 애를 풀어준다고 해도 조만간 다른 이들이 그 애를 잡아서 다시 노예로 팔아치울 거다. 아니면 눈을 거래하든가.”

“그 애를 제 곁에 두고 싶어요.”

러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아리아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제가 그 애를 돌봐주고 싶어요.”

“그 애가 금색 눈동자를 가진 것뿐이라면 허락했을 거다. 그저 제 주인을 저주해서 죽였다는 소문만 돌았더라도 허락했을 거야. 나는 미신을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나, 그 애는 파가누스다.”

파가누스.

소녀의 갈색 피부를 봤을 때부터 혹시나 싶기는 했는데, 진짜로 파가누스일 줄은 몰랐다.

소녀가 파가누스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도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더 안타까워졌다. 아리아나 역시 브론테 가문에 있을 때는 동제후의 피를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 애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에요.”

파가누스라는 말을 듣고도 아리아나가 고집을 꺾지 않자, 러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리아나를 볼 때마다 한숨을 쉬던 레이첼이 떠올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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