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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살고 싶었다. (2) (66/238)


(66) 살고 싶었다. (2)
2023.05.07.


사이러스는 역시 날카롭다고 생각하며, 아리아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꼭 당해야 알까요?”

“당하기 전에 알아채기에 공주는 너무 어린 나이지. 서령에서 본 공주의 수단은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된 것 같지 않았거든.”

“그러는 북제후도 고작 14살에 훌륭하게 복귀하지 않았습니까?”

“내 곁에는 날 돕는 이가 많았지. 하지만 공주는 혼자야.”

“북제후의 도움이 있었죠.”

“아니, 내 도움이 없었더라도 공주가 그 상황을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야.”

사이러스가 엄지와 검지로 아리아나의 턱을 살짝 쥐었다. 아리아나는 그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꿰뚫을 듯 아리아나를 탐색했다. 농도 높은 눈빛이 물질감을 가지고 아리아나의 몸 안을 샅샅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은 차갑지만 왜인지 닿은 부위가 뜨겁게 느껴졌다. 그의 손을 피해 뒤로 한 발 물러서려 하는데, 그가 먼저 손을 내렸다.

“부모님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북령에 전해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성에 있는 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지. 가장 먼저 내 방에 들어온 이가 누군지 아나?”

“……누구죠?”

“내 아버지의 남동생. 내가 삼촌이라 부르는 자가 베개로 내 얼굴을 덮어 죽이려 하더군. 그래야 그가 북제후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사이러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평소 관계는 좋은 편이었지. 아니, 무척 좋았어. 부모님이 전쟁 때문에 나라를 비우면, 나는 그를 내 아버지라고 여기면서 따랐지. 내 부모님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게 의탁하라고 할 만큼 그를 믿었어.”

배신당했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이러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내가 믿었던 자들이 날 죽이려고 하더군. 내 아버지의 충신들이 사실은 내 아버지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운 좋게 도망쳤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었지. 도움의 손길도 있었지만, 모두 뿌리칠 수밖에 없었어. 헤른 공작과 페런 경이 날 찾아내 도우려 했지만, 나는 믿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페런 경이 죽었지.”

“페런 경이라면…….”

“아이작의 아버지.”

“…….”

“그제야 내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어. 위태로운 상황에서 증오와 경계를 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에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지.”

아리아나와 눈을 맞추고 얘기하던 사이러스가 시선을 강물로 돌렸다. 아리아나도 그의 옆에 서서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강물을 응시했다.

“덧없는 증오와 경계심은 공주의 목적에 방해가 될 거야. 공주는 고단해질 거고, 언젠가 그 고단함이 공주의 발목을 잡겠지.”

“용서하셨나요?”

“누구를?”

“북제후를 죽이려 한 자들.”

“아니. 모조리 죽였어.”

“…….”

“배신한 자는 죽였지. 하지만 내게 충성을 보인 자들은 믿었어.”

“그러다 그들이 북제후를 배신하면요?”

“그때는 죽여야지. 흔들림 없이 그 목을 베어야지.”

“그전에 도리어 북제후가 당하면요?”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다 한탄하며 죽어야지.”

“……나는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제’라는 말에 사이러스가 이상하다는 듯 아리아나를 쳐다봤지만, 아리아나는 그의 시선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조용히 흐르는 강물로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믿었다가 죽고 싶지도,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싶지도 않아요.”

마치 몇 번이나 배신당했다가 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사이러스는 지적하지 않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꼿꼿이 서 있는 아리아나는 우아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도 흩어질 것처럼 불안한데, 한편으로는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물을 향한 푸른 눈동자에는 슬픔과 후회, 고독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 애처로운 눈빛이 사이러스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사이러스와는 관계없는 아리아나의 감정에, 왜 제 가슴이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푸른 눈동자를 채운 재미없는 감정들을 전부 걷어내고 싶을 뿐.

맑디맑은 눈동자를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아리아나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평생 제 자리를 지키며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만 살아온 사이러스는 제 마음을 알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 부모님에게 명예롭지 않은 죽음을 안긴 자들이 있어. 나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생각이야.”

사이러스가 자신의 목적을 밝히자, 아리아나는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부모님의 죽음에 동제후도 관련이 있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았지.”

사이러스는 부모님이 죽기 전에 교류했던 동제후의 따스함을 기억했다. 화이트 가의 다정함이라면 아리아나의 눈동자에 새겨진 차가운 고통을 지워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이러스는 그렇게 감미로운 말을 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동제후의 힘이 필요해. 그러니 아리아나, 내게 빚을 갚고 싶다면 동령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철저히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동령의 사랑스러운 공주가 되도록 해. 그래야 내게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자신의 말이 아리아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아리아나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을 때에야,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요, 북제후. 당연히 갚아야지요. 북제후는 신경 쓸 것이 많을 테니 이제 내 일에는 걱정을 거두고 북제후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해요. 나도 빚을 갚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음 날, 사이러스는 아리아나 일행과 그 도시에서 헤어졌다.

인사를 하는 내내 아리아나는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리아나 일행이 먼저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던 아이작이 물었다.

“저기, 사이러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사이러스는 아이작의 말을 무시하고 말에 올랐다. 아이작도 서둘러 말을 타고 사이러스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어제 산책하다가 제후비랑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걸 몰라서 물어? 제후비 미소가 얼음장 같잖아!”

“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몹쓸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귀한 인재에게 몹쓸 짓을 할 리가 있나.”

“또, 또, 또 그 소리!”

사이러스가 미간을 좁혔다.

“자꾸 이용을 하네, 마네 하는 소리를 하다가는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쓸데없는 조언이야. 아직까지 후회한 적 없으니.”

“설마 사이러스, 어젯밤에 제후비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는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

“했구나!”

사이러스는 무시하고 말의 허리를 찼다. 말이 속도를 높였다.

“같이 가!”

아이작이 비명처럼 외쳤지만, 못 들은 척했다.

‘내가 후회를 할 거라고?’

아리아나는 사이러스의 앞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는 등, 여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젯밤 그린 듯이 완벽한 미소를 지은 후부터는, 내내 그런 미소만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불쾌하고 신경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후회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후회를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다.

사이러스의 눈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리아나 화이트는 거기까지라는 거겠지.’

+++

가슴에 싸늘한 바람이 일었다.

아리아나는 마차에 꼿꼿이 앉아서 창문 밖을 응시했다.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마차의 소파는 푹신하고 좋은 향기까지 났음에도, 얼어붙은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나도 참 바보 같구나.’

사이러스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친절도, 배려도 전부 그의 목적을 위해서라는 것 또한 알았다.

알면서도 몰랐다.

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어느새 그에게 마음을 풀고 있었다.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을 만큼, 무의식적으로 그의 앞에서는 본 모습을 보일 만큼, 그를 믿고 있었다.

모두가 목적이 있기에 자신에게 잘해준다는 걸 깜빡 잊었다.

‘3황자 때도 그랬었지.’

헤럴드는 달콤했다.

황실 파티에서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는 아리아나에게, 그는 더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 아리아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춤을 청했고, 파티가 끝난 후에도 저택으로 꽃과 편지를 보내 아리아나의 마음을 떨리게 만들었다.

부유한 남편을 가졌으면서도 제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던 아리아나에게, 헤럴드는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귀걸이, 그대를 빛나게 해줄 목걸이…….

거기에는 늘 조건이 하나 붙었다.

-“그대가 나를 위해 노력해준다면.”

그뿐이었다.

누구나 그와 같을 뿐이었다.

사이러스 또한 헤럴드와 마찬가지로 아리아나의 가치를 발견해 이용하려고 할 뿐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사이러스가 헤럴드와 다른 점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 북제후는 한 번도 날 이용할 거라는 걸 숨기지 않았어.’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서늘한 걸까? 알고 있던 사실을 한 번 더 자각했을 뿐인데 왜 이다지도 많은 것을 잃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리아나, 속이 안 좋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캐러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념에 빠져서 그녀와 함께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요, 조금 피곤해서요.”

“그래,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금방 회복되지는 않겠지.”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작의 약은 효과가 좋았다. 요 며칠 꾸준히 복용했을 뿐인데 벌써 살이 조금씩 찌는 데다가 조금만 걸어도 가빠오던 호흡도 안정적이 되었다.

좋은 약을 만들어준 아이작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으니 앞으로 더 좋아지겠죠.”

“그래, 분명 그럴 게다.”

“열흘 정도 지나면 동령에 도착하겠죠?”

“그렇겠지. 말을 서두르고 있으니 그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 수도 있고. 동령에 가면 하고 싶은 일이 있니?”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제가 뭘 해야 좋을까요?”

할머니라는 호칭을 들은 캐러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캐러딘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아나, 지금 날…….”

“아, 죄송해요. 제가 허락도 없이 할머니라고…….”

“아니,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는데, 허락이 왜 필요해? 응?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런 말 마.”

노부인의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눈치챈 아리아나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캐러딘의 생각처럼 이제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기에 할머니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동령의 사랑스러운 공주가 되도록 해.”

사이러스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사이러스는 아리아나를 이용하려고 하듯, 아리아나 또한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북제후는 강대한 힘을 가졌고 영리하기까지 한 데다가 아리아나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보다 이용하기 좋은 패는 없었다.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 것은 사양이지만, 서로를 이용할 수 있는 관계라면 찬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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