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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살고 싶었다. (1) (65/238)


(65) 살고 싶었다. (1)
2023.05.06.


4월에서 6월까지는 사교 시즌이라서, 제국 수도인 스테리온 시에는 많은 귀족이 모여 있었다.

다른 나라나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머무는 별장이 모여 있는 거리와 고급 여관 거리는 북적거렸고, 살롱들은 예약이 꽉 차 있었다.

최근 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아리아나의 양육권 재판과 북제후에 관해 떠들어댔다. 어느 백작 영애의 염문설도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이기는 했지만, 동제후와 서제후의 싸움, 그리고 북제후의 개입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귀족들은 북제후와 동제후에게 끊임없이 파티 초대장을 보냈지만, 양쪽 다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제국을 떠나버렸다.

가련한 소녀 아리아나가 사악한 어머니의 족쇄에 묶이기 직전, 백마 탄 기사처럼 나타나 아리아나를 구원한 북제후의 이야기는 음유시인의 노래가사가 되었고, 어느 극단에서는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

그렇게 제국 수도에 한 차례의 폭풍을 일으킨 아리아나와 북제후 사이러스는 작은 도시인 오브앙 시에서 머물며 느긋하게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동제후 러셀은 오브앙 시에서 큰 여관을 통째로 빌려, 사이러스와 아이작에게도 방을 내주었고, 저녁에는 만찬을 열어 두 사람을 초대했다.

“은인에게 이런 곳에서 조촐한 대접밖에 못해 미안하군.”

러셀의 말에 사이러스가 담담히 대답했다.

“딱 적당합니다. 수도는 보는 눈이 많아 방문하기도 불편했지요.”

“나중에 동령에 방문한다면 귀히 대접하겠네.”

“네,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러셀은 차분하게 식사하는 사이러스를 향해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과거 동령과 북령은 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륙 북동쪽에 위치한 히난 지방, 그곳에 존재하던 파가누스의 거대 도시 헤드란 때문이었다.

파가누스는 시시때때로 북령이나 동령 경계를 넘어와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약탈했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북령과 동령 간의 협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선대도, 선선대도 서로의 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 십수 년 전의 그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선대 북제후 내외가 전쟁에서 죽은 후, 북령은 그야말로 무법지대가 되었다. 당시 북후제인 사이러스가 너무 어렸던 탓이었다.

러셀은 사이러스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황제에게 군사 명령권을 빼앗긴 데다가 근신하라는 황명을 받은 탓에 대놓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은밀히 사람을 시켜 사이러스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데다가, 훌륭하게 북제후의 자리를 되찾기까지 했다.

러셀은 사이러스에게 축하의 서신을 보냈을 때도, 초대의 서신을 보냈을 때도 답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했다.

사이러스가 가장 힘든 순간 손을 내밀어주지 못했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런 사이러스가 아리아나를 도왔다.

고맙고 미안한 감정과 옛 친구를 향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러셀의 가슴을 채웠다.

조용히 식사하는 사이러스와 달리, 아이작이 앉은 자리는 시끌벅적했다.

“그럼요, 할머님. 이 연고를 매일 바르면 공주님의 흉터가 깨끗이 사라질 거예요. 오래 지난 흉터는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얼추 3개월이면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애한테 이렇게 신경을 써줘서 고맙구나.”

“제가 잘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고마워하실 것 없어요.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남을 치료하는 일에는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고.”

“그래, 페런 경은 마음씀씀이가 참 넓고 고왔지.”

캐러딘이 그리운 듯 말하자, 아이작의 녹색 눈동자도 그리움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아이작은 곧 해사하게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러셀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아리아나는 슬쩍 눈을 들어 아이작과 선대 동제후 내외를 살펴봤다.

‘북령과 동령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친밀했었구나.’

사이러스의 부모가 전쟁에서 죽기 전에 북령과 동령이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도 아닌 부르주아 계층인 페런 가문과도 연을 맺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인 줄은 몰랐다.

‘예전에 3황자가 조사했을 때는 둘의 관계가 굉장히 안 좋다고 했었는데.’

3황자가 황좌를 노리며 가장 신경 쓰던 것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북령과 동령이었다. 3황자 헤럴드는 두 나라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으나, 북제후와 동제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북제후와 동제후가 손을 잡고 황태자의 편에 서면, 3황자가 무슨 짓을 해도 황좌에 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3황자는 두 나라의 동향에 크게 신경 썼다.

아리아나가 죽을 때까지 북제후와 동제후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동령이 무너질 때도 북령은 동령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그래서 딱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만찬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자리인 것 같다. 아리아나보다 사이러스와 아이작이 화이트 가문 사람들과 더 가족인 것처럼 보였다.

‘북제후는 언젠가 날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때를 위해 동제후와 친선을 맺어두려는 거겠지. 그래야 나와 일을 꾸미기가 편할 테니까.’

이 시점에서 북제후와 동제후의 관계가 좋아진 것이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3황자는 이 시기 전부터 황좌를 노리고 있었어. 지금도 북령과 동령의 동향을 보고받고 있겠지. 만약 북제후와 동제후 사이에 교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마땅한 대응책을 준비하려고 할 거야.’

아리아나는 아직 황실 사람을 상대할 힘이 없기에, 3황자가 공격을 해올 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공주는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기에 셔벗을 포크로 드시는지?”

사이러스의 목소리에 아리아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로 셔벗이 나와 있었는데, 아리아나는 여전히 포크를 쥐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녀의 손에 들린 포크를 보는 바람에, 아리아나의 뺨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잠시 서령에서의 나날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아리아나의 변명에 화이트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굳고, 아이작은 안쓰럽다는 듯 눈썹 끝을 늘어뜨렸으며, 사이러스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오호.”

“배움이 짧아 디저트를 먹는 방법도 잘 몰랐네요. 북제후의 신경에 거슬렸다면 미안해요.”

졸지에 사이러스가 나쁜 놈이 됐다.

화이트 가문 사람들이야 사이러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이작은 달랐다. 대번에 눈을 부라리고 사이러스를 나무라는 눈빛을 보냈다.

사이러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가 공주에게 큰 실례를 범했소. 공주의 고통스런 나날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 식사가 끝난 후 산책을 호위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소?”

“북제후, 공주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아 산책을 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네.”

아무리 십수 년을 떨어져 있었다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사이러스와 아리아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눈치챈 러셀이 끼어들자, 아이작도 지지 않고 말했다.

“공주께서는 이제 완전히 회복하셨어요, 동제후 전하. 오랜 흉터는 남아 있으나 제가 드린 체력 회복제를 꾸준히 드셨으니 몸은 건강하실 겁니다. 그리고 식사 후 약간의 산책은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죠.”

“하나 이 도시는 잘 아는 곳이 아니라서 공주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에이, 전하. 우리 북제후 전하의 실력을 의심하십니까? 얼마나 강하시다고요. 만약 습격자가 나타난다면 꽁꽁 얼려버리면 되죠.”

“밤길에 넘어지지나 않을지.”

“우리 전하께서 안전하게 에스코트하실 거예요.”

아리아나는 동제후 러셀과 아이작 사이의 신경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제후는 왜 내가 북제후와 산책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거지? 북제후에게서 의심스러운 면을 발견했나?’

딸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아리아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지만, 티어도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러셀의 방어를 지켜봤다.

화이트 가문의 두 남자가 아리아나와 사이러스의 산책을 방해하려고 드는 걸 보다 못한 캐러딘이 말했다.

“북제후는 신사이니 아리아나를 잘 에스코트하겠지. 아리아나도 바람을 쐬고 싶을 거고.”

“어머니.”

“아리아나, 멀리 가지는 말고 조심히 다녀오렴.”

러셀과 티어도어가 못마땅한 듯 캐러딘을 쏘아봤지만, 캐러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떠밀리듯 산책길에 나선 아리아나의 손에는 10골드가 들려 있었다. 캐러딘이 필요한 것을 사라며 쥐여준 용돈이었다.

용돈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웠다. 언젠가 필요할 날을 위해 빅토리아와 헬레나의 장신구를 몰래 팔아치웠던 나날이 떠올라서 쓴웃음이 나왔다.

“공주가 10골드나 갖고 있으니 군것질거리를 하나쯤은 얻어먹을 수 있겠군. 아니면 그 돈도 저축할 건가?”

“북제후께 받은 은혜가 10골드로 갚을 수 있는 거라면, 군것질거리 하나만 사드리겠습니까? 100개라도 사드리지요.”

“그리 많이 먹을 수는 없으니 사양하지.”

“서령을 떠나기 전에는 20골드 남짓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동령에 오니 산책길에 10골드나 손에 들어오네요.”

“그래서 원망스러운가?”

폐부를 찌르는 질문에 아리아나는 사이러스를 돌아봤다. 사이러스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공주는 서령에서 지독한 꼴을 당했는데 그동안 동령은 평온하고 행복하게 지냈지. 원망의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내를 사이러스에게 간파당해서 창피했다. 자신이 그렇게 속마음이 드러날 정도로 행동했나 싶어서 한심스럽기도 했다.

“무의미한 원망이야, 공주. 인제 와서 동제후의 가족을 원망한다고 해도 공주가 당한 일은 바뀌지 않아.”

옳은 지적이었다. 아리아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에요, 북제후. 인형이 아닌데 저절로 드는 마음을 없앨 수는 없죠.”

“글쎄. 없앨 수는 없지만, 없애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공주는 딱히 노력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군.”

“…….”

“동제후는 좋은 사람이지. 선대 동제후 내외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동령도 사람 사는 곳이라서, 모두가 좋을 수는 없어. 공주를 시기 질투하는 자도 생길 거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공주를 제거하려는 자도 있을 거야.”

“압니다.”

“안다는 사람이 그래?”

사이러스가 걸음을 멈추고 아리아나를 돌아봤다. 뒤로 흐르는 작은 강물에 떨어진 별빛이 그를 에워쌌다.

“무의미한 원망과 경계는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지. 믿어야 할 자를 의심하다가 적의 공격에 마땅히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어. 쓸 데 없는 일에 촉을 예리하게 세우느라 그 촉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지.”

“그래서 화이트 가문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니 마음을 터놓고 믿으라는 건가요?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때는 어찌할까요? 내가 저들을 내 가족으로 받아들였는데, 사실 저들이 날 이용하다가 버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 그때는 어찌할까요?”

자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는 걸, 아리아나는 깨닫지 못했다.

사이러스는 무표정하게 아리아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공주는 브론테 가문 사람들을 믿은 적이 있나?”

있지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이 졸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믿었지요.

목에 맴도는 말을 삼켰다.

사이러스가 예리한 눈으로 아리아나를 관찰하며 말했다.

“왜 내 귀에는 그들을 믿었다가 철저히 배신당했다는 말로 들릴까? 서령에서 본 공주는 단 한순간도 가족을 믿지 않은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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