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내 딸 아리아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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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내 딸 아리아나 (3)
2023.05.04.
공작부인을 위한 감옥은 방 하나에 화장실도 따로 있을 만큼 좋았지만, 레이첼은 깊은 모멸감과 두려움을 맛보고 있었다.
서령 오블렌 가문의 공주로 태어나 동제후비를 거쳐 브론테 공작부인이 되는 이날까지, 레이첼은 이런 가혹한 처우를 당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리아나를 몇십 번이나 어두운 지하감옥에 가둬뒀던 일은 레이첼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아리아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레이첼은 분노를 거둘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 감히 내게…….’
아리아나가 이렇게까지 해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레이첼은 일부러 아리아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지혜가 있으면 자유를 원하고, 자유를 원하면 칼을 드는 법이니까.
아리아나는 아둔하게 키워 필요한 가문에 시집보낸 후, 빅토리아와 헬레나, 그리고 조이슨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리아나가 변했다.
‘그때, 그 파티 때부터.’
헬레나의 데뷔탕트를 위한 인맥을 만들어주기 위해, 2월에 브론테 저택에서 열었던 가든 파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날 파티에 나온 아리아나는 멍청하게 행동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을 흔들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변한 거지? 언제부터 속에 칼을 품고 있었던 거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서재에는 발도 못 디디게 하고, 두 딸을 위한 가정교사를 불렀을 때도 아리아나는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다. 아리아나는 지식도, 예법도 모르는 게 당연했는데, 그날부터 아리아나는 누구보다도 영리하게 구는 데다가 마치 황실 사람과도 같은 예법을 구사했다.
‘내가 그 고생 끝에 낳았는데.’
이 뱃속에 열 달을 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내의 아이가 기생충처럼 느껴졌지만, 열 달이나 품고 있었다.
그렇게 낳아줬으면 은혜를 갚아야 마땅한데, 도리어 품고 있던 칼을 들이밀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배은망덕한 것!’
일주일째 갇혀 있는 동안 증오가 부풀어 올라 터질 지경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아리아나의 머리채를 잡아 패대기치고 싶었다. 아니, 이 손으로 직접 아리아나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싶었다.
아리아나는 그래서는 안 됐다. 제 어미에게 이런 가혹한 짓을 해서는 안 됐다.
분노를 태우며 이를 갈고 있는데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 철창 앞에 멈춘 자는 서제후였다.
“아버지!”
“오늘 중에 풀려날 게다.”
“판결이 뒤집어진 건가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레이첼 때문에 서제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판결이 뒤집어져?
황명이 내렸다. 설사 잘못된 황명이라 해도 그게 바뀌는 일은 없다.
“보석금을 냈다.”
“어, 얼마나……?”
“천만 골드.”
천만 골드는 공작가의 1년 생활비였다. 이에 더해 레이첼의 벌금 3천만 골드와 서제후의 벌금 천만 골드를 합치면, 이번 일로 5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쓰게 되었다.
서령의 재정이 휘청거릴 금액이었다.
하지만 서령의 공주였던 레이첼이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게 둘 수도 없는 노릇. 서제후는 거금을 들여서라도 레이첼을 감옥에서 꺼낼 필요가 있었다.
뼈아픈 패배였다. 속이 끓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제후는 득실을 따질 줄 알았다.
동제후도 아닌 16살 어린 소녀의 양육권 문제는 이 이상의 힘을 쏟을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리아나의 학대 사실이 알려진 마당에 입을 막기 위해 더 힘쓸 필요는 없었다.
예쁘장한 아리아나를 사용할 만한 계획이 여러 개 있었지만, 그런 건 다른 손녀들로도 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패배한 일에 매달려봐야 얻을 것은 없다는 걸, 서제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리아나는…… 아리아나, 그 계집은 지금 뭘 하고 있죠? 동령으로 떠났나요?”
서제후는 두 눈을 부릅뜨고 묻는 레이첼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이제 그 애한테서는 신경을 꺼라. 그 애는 우리와 관계가 없어.”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어요!”
“황명이 내려졌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런 건 없어!”
서제후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레이첼이 몸을 움츠렸다. 서제후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황명이다! 안 그래도 그 일로 황제 폐하께서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지셨을 게야. 괜히 수작을 부리다가 또다시 폐하의 눈 밖에 나면 그때는 재기가 불가능해. 알겠냐, 레이첼? 더는 그 애를 건드리지 마라. 애초에 낳았다고 생각하지도 마. 그런 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
“하지만…….”
레이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지만, 서제후는 냉랭하게 제 딸을 응시했다.
“서령에 돌아가는 대로 애들이나 잘 교육시켜. 둘 중 하나는 어떻게든 황궁에 들여보내야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되겠어요? 저랑 우리 애들은 아리아나를 학대한 희대의 악녀가 되었다고요!”
“그런 건 더 자극적인 사건으로 덮으면 돼. 조만간 제국 백작 영애와 극단 배우의 염문설이 터질 게다. 어느 백작 부인이 기사와 사랑에 빠져서 도주를 준비했다는 소문도 퍼질 거고. 애를 학대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얘기들은 도처에 널려 있으니 걱정할 거 없다.”
+++
아리아나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열흘이 넘게 걸렸다.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동제후와 선대 동제후 내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아리아나의 곁을 지키다가 돌아갔다.
아리아나는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선대 동제후 내외를 찾아가 재판 때 애써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올렸다.
“감사할 것 없는 일이다.”
캐러딘이 아리아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말했다.
“아리아나, 이건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야. 알겠니? 네가 감사할 일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그동안 널 돌봐주지 못한 걸 미안해해야지.”
아리아나는 화이트 가문의 문화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이첼은 늘 아리아나에게 키워준 값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 하나 해주었을 때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동제후도 그렇고 선대 동제후 내외도 그렇고, 감사하다고 할 때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그럼 대체 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티어도어가 말했다.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겠니? 더 쉬어도 되는데.”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아이작이 지어준 약은 정말 효과가 좋더라고요.”
“그래. 원래 페런 가문이 대대로 그쪽으로 재능이 있었지. 우리도 예전에 그 애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단다.”
동령으로 떠날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출발은 다음 날 오전에 하기로 했다.
그다음에 아리아나는 동제후에게 찾아갔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러셀은 아리아나가 들어오자 허둥지둥 책을 덮고 아리아나에게 다가왔다.
걱정이 담긴 푸른 눈동자가 아리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살짝 찌푸린 러셀의 얼굴을 보며, 아리아나는 예전에 황실 파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러셀을 떠올렸다.
경멸 섞인 눈빛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기절한 후에 꾼 이상한 꿈 때문이었다.
‘그건 정말 뭐였을까?’
그 꿈에서 러셀이 되었다. 러셀이 되어서 느낀 감정을 떠올릴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무뎌졌다. 러셀의 눈빛을, 찌푸린 표정을, 굳은 입매를, 자꾸만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아리아나, 이제 걸어 다녀도 괜찮은 거냐?”
무뚝뚝한 목소리조차도 다정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아리아나는 무디게 풀어지는 마음을 단단히 죄고 말했다.
“네, 이제 다 나았어요.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이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감사할 거 없다, 그런 말 마라, 아리아나.”
또 이런다.
감사할 일이라서 감사하다고 한 건데, 왜 자꾸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지.
“동령에는 소식을 전해뒀다. 지금쯤 동령 사람들은 공주가 돌아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정말 기뻐하면서 기다릴까?
태어나자마자 동령을 떠나서 서령에서 자란 아이가 인제 와 돌아오는 걸 기뻐할 사람이 있을까?
누구에게도 기쁨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에, 동제후의 말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제후는 그저께 제국을 떠났으니 이곳에 널 노리는 사람은 없을 거다. 네가 원한다면 떠나기 전에 시내를 좀 돌아다녀도 되겠구나. 호위기사를 꼭 동반하고.”
“네, 전하. 그렇게 할게요.”
아리아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서 인사하고 서재를 나섰다. 서재 앞에는 호위 기사인 랜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중앙문으로 향하자 랜스터가 물었다.
“외출하십니까?”
“아니, 그냥 정원에서 바람을 좀 쐬려고.”
아리아나는 시내를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다.
양육권 재판 때 충분히 눈에 띄었으니,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리아나를 따라 정원으로 향하며 랜스터가 말했다.
“공주님께서 돌아가시면 모두 기뻐할 겁니다.”
“글쎄. 정말 그럴지 모르겠네. 서령에서 지내던 내가 동령의 공주가 되었는데,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주군께서는 종종 공주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리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랜스터를 돌아봤다.
“전하께서 내 이야기를 하셨다고?”
“네. 처음 태어났을 때 이렇게 작았는데.”
랜스터가 두 손으로 주먹만 한 크기를 만들었다.
“혹여 부서질까 봐 안는 것도 조심스러웠다며, 그립다는 듯 말씀하시곤 했죠. 저희 기사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
“공주님과의 추억이 저 하나뿐이시라, 매번 저 하나만 말씀하시는구나 싶어서요.”
아리아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나는 늘 이곳에서 널 기다릴 테니.’
러셀이 되었을 때, 그가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가슴이 시큰거리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희는 공주님께서 한 번만이라도 동령에 방문하시어, 주군께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주시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동령의 공주가 되셨으니, 당연히 기쁘지요.”
아리아나는 꿀꺽, 목에 차오른 눈물을 삼켰다.
-“너 같은 건 낳고 싶지 않았어.”
-‘언제나 기다릴 테니.’
-“뱃속에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 아가 손을 좀 잡고 싶어서.”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니?”
-“다 괜찮으니, 우선 쉬도록 하자꾸나, 응?”
-“넌 애가 왜 그 모양이니? 시키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왜 여기서도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앉아 있어?”
-“그 정도로 아프다는 말은 하지도 마라. 귀찮게 하지 말고 좀 나가.”
-“네 삼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있어라. 알겠지?”
늘 들어온 레이첼의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들이 섞였다. 거칠지만 따뜻한 목소리에서 번진 온기가 차디찬 음성을 밀어냈다.
레이첼이 끊임없이 저주해 걸어둔 몇 겹이나 되는 사슬에 금이 갔다.
아주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