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내 딸 아리아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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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내 딸 아리아나 (1)
2023.05.02.
“내게는 저지른 짓이 있고, 동령과는 관계가 안 좋지. 그 사건 후로 남제후는 아예 제국에 발을 들이지도 않고. 황제가 믿을 건 서령뿐인데 어찌 그리 쉽게 서령을 등질까.”
“그럼 아무 소용없었던 거야?”
“그건 아니야. 오늘 낸 작은 흠집이 언젠가 크게 벌어지겠지.”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먼저 움직여봐야 모두의 칼날을 북령으로 돌리게 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검 끝이 자연스럽게 서령으로, 또한 제국으로 향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아리아나는 언젠가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하겠지.”
브론테 가문을 향한 그녀의 복수가 이쯤에서 끝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어코 동제후를 찾아가 양육권 재판까지 벌여 동령 공주의 지위를 획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리아나는 브론테 가문과 서제후를 노릴 거고, 나는 그녀가 일으킨 바람을 폭풍으로 바꿀 수 있겠지. 폭풍은 서령을 쓸어, 그 단단한 껍질 속에 숨긴 비밀이 드러나게 할 거야.”
“흠. 그래서 이용 가치가 있는 제후비를 앞으로도 쭉 지켜보고 도와주겠다?”
“그래야지.”
“으흠.”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뭐라고 해야 하나. 음. 제후비보다 더 어여쁘고 다루기 쉬운 영애들도 많잖아. 그 영애들에게 미소 한번 지어주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텐데. 아마 불 속에라도 뛰어들걸?”
사이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 여인 중에 아리아나보다 더 사교계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있지 않을까? 예쁘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여인은 널리고 널렸어.”
“아리아나만 한 여인은 없지.”
“음. 있을걸.”
“아니, 없다.”
“아리아나보다 예쁘고.”
“없어.”
“교양 있고.”
“없어.”
“그래, 자네 눈에는 아리아나 화이트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그 말이지?”
“내가 되묻고 싶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네가 지금까지 본 여인 중에 아리아나보다 예쁘게 생긴 여인이 있었나?”
있었다.
물론 아리아나도 정말 예쁘지만, 아이작은 샤를로트 황녀가 외모로만 따지면 아리아나보다 예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해도 돌아올 대답이 뻔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 뜻이 다 옳아. 자네 보는 눈이 내가 보는 눈이지, 뭐.”
아이작은 생각했다.
‘이 대화를 안드레이가 들었어야 했는데!’
+++
목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증오하는 자들의 피가 이 대지를 적시면…….”
어둠 속을 유영하는 목소리. 어디선가 들었던 그 음성이 안개처럼 흩어져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부인은 참으로…….”
“깨닫지 못했을 뿐…….”
“이 미천한…….”
“부인이 원하는 것을…….”
허공을 떠다니는 음성을 제대로 들어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아리아나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끌려갔다.
짧은 것 같기도 하고 긴 것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난 후, 아리아나는 파티장에 있었다.
눈부시게 호화로운 장식과 들려오는 음악이 왜인지 익숙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제 것이 아닌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아름다운 귀부인들과 영애들, 귀족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초라한 여인. 풍성한 하늘색 머리칼이 몹시 잘 어울리는 하얀 피부의 여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약간 겁에 질린 듯도 했고, 긴장을 한 듯도 했다. 이런 파티에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애처롭고도 사랑스러웠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이 역시 아리아나의 감정이 아니었다. 아리아나의 영혼은 자신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되어, 그가 보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리아나.’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었다.
‘내 딸.’
태어났을 때 딱 한 번 품에 안아본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의 딸. 매일 밤 꿈에 한 번 찾아오기를 바랄 만큼 그리웠던 내 딸.
‘하지만 나를 보면 두려워하겠지.’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제이콥 브론테를 친아버지로 여긴다고 했다. 본 적도 없는 러셀 화이트라는 자에게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했다.
혹여 친부와 가까이 지냈다가 양부에게 미움받을까 봐, 가족에게서 멀어질까 봐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말을 걸고 싶어도, 안고 싶어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지냈느냐 묻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아리아나를 두렵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아리아나가 이번 황실 파티에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발길하지 않았던 제국에 찾아온 건데 잘한 건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아리아나의 얼굴을 본 것은 좋지만, 딸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는 건 어려웠다.
안아주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잘 지냈느냐, 나는 이렇게 지낸단다, 소소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제이콥은 멀리 있는데. 이쪽을 보고 있지 않는데. 아주 짧은 인사 한마디, 근황 한 마디 나누는 담백한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걸어가려다가 마침 이쪽을 돌아보는 아리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술렁, 흔들리다가 왈칵 일그러지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찌푸린 미간과 힘이 들어간 입술, 꽉 쥔 작은 주먹이 심장을 찢었다. 우뚝 멈춰서 멍하게 아리아나를 응시했다.
딸의 얼굴에 가득한 공포가 발목을 묶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제야 인정했다.
‘저 애는 내 딸이 아닌 레이첼과 제이콥 브론테의 딸이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시기에 딱 한 번 안겨본 아버지인데,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다. 아리아나에게 나는 그저 낯선 타인일 뿐.
그저 멀찌감치에 서서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되뇌는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나, 언젠가 나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거든, 아니, 도움이 필요할 때라도 언제든 찾아오거라. 나는 늘 이곳에서 널 기다릴 테니.’
언제나 기다릴 테니.
꿈결처럼 흩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리아나는 도로 끌려 나왔다. 또다시 빠른 이동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복부에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번쩍-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꿈이라기에는 몹시도 생생했다. 그러나 현실이라기에는 이상했다. 아리아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느낀 적 없는 감정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 황실 파티에 간, 18살의 아리아나 알프레히 자작 부인.
‘설마 나는…… 동제후의 몸에 들어갔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그건 이미 지난 과거, 지금은 벌어지지도 않은 일인데. 게다가 영혼이 동제후의 육체에 들어가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하기에는, 지금 아리아나의 존재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한 번 죽고 시간을 돌아와서 되살아난 존재.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있을 리 없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동제후가 그때 날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동제후는 아리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찌푸렸었다. 불결한 것을 보았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서 아리아나는 그에게 말도 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동령에 와서 마주하게 된 러셀을 떠올렸다.
러셀은 무표정하지만, 곤란하거나 당혹스러울 때는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그 모습은 몹시 화가 난 듯 보여서 이제는 두려울 것 없는 아리아나도 깜짝 놀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티어도어는 러셀의 팔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눈에서 힘 좀 풀어라, 이 녀석아. 그렇게 해서 애가 무서워하겠냐?”
그러면 러셀은 언제나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리아나. 내가 원래 표정이 좀…… 그렇다.”
만약 그런 거였다면?
아리아나가 불결하고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저 당혹스러워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라면? 사실은 아리아나와 만나고 싶고 대화하고 싶었던 거라면?
‘아니야.’
아리아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아니야, 네 편한 대로 생각하지 마, 아리아나. 너는 그냥 네가 원하는 꿈을 꿨을 뿐이야. 동제후의 몸에 들어가서 그의 감정을 느끼고 그가 하는 생각을 함께하다니. 말도 안 되잖아. 그런 일은 없어. 이 세상에 널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그렇게나 당했으면서, 아직도 그 희망을 못 버렸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재판에서 져서 다시 레이첼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도, 배에 나이프를 찔러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다가 죽은 주제에, 또다시 애정을 갈구하는 미련한 자신이 싫고 한심했다. 처절하고 불쌍했다.
그렇게 좋은 일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보 같은 꿈까지 꾸며 기대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싫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심장을 도려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다, 누구도 날 사랑해주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게 편하니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갈구하지 않아도 되고, 애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 사랑받지도 않고 사랑을 주지도 않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이번 생애는 그렇게 황야와도 같은 척박한 땅을 걷고 싶었다. 그래야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존재하리라는 덧없는 희망을 품지 않을 테니까.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이불을 내려보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러셀이 침대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이것도 꿈일까?’
러셀의 흐트러진 남색 머리칼과 뺨을 기댄 두꺼운 팔뚝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손가락 끝이 러셀의 머리카락에 스쳤다.
아주 살짝, 그 끄트머리에 닿았을 뿐인데 러셀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리아나를 본 러셀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인상을 찌푸렸다. 파티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이번에 체이스 성에 찾아가 그와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처럼.
“아리아나, 깨어났구나!”
다급하고도 기쁜 목소리에 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러셀의 커다란 손이 아리아나의 머리로 향하다가 우뚝 멈춘 이유를, 어째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싫어하니까. 내가 무서워하니까.’
머뭇거리던 손이 도로 내려갔다. 러셀이 아리아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늘 그렇듯 조금 화가 난 듯 보이는 어색한 미소였다.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아리아나.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아팠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레이첼은 아리아나가 아프다고 하면, 쓸모도 없는 게 가지가지 한다며 화를 냈다. 네 건강 관리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느냐며 짜증을 냈다.
그래서 아리아나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나 항상 괜찮아야만 착한 아이니까.
죽을 것같이 아파도 아픈 티를 내면 어머니가 화를 내니까. 남편이 성질을 부리니까. 시어머니가 저런 건 내쫓으라며 혀를 차니까.
그래서 아리아나는 늘 그래왔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전하.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